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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거리가 불안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방사능 오염 위험을 안고 있는 후쿠시마 발 수산물에 이어 최근에는 정부의 쌀시장 전면 개방 정책으로 GMO쌀 위험에 대한 논란까지 일고 있는데요.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식량자권 사업단 언니네텃밭과 함께 안전한 먹거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을 담아봅니다. [편집자말]
여성농민들이 주축이 되어 활동하고 있는 여성농민회에서는 토종씨앗지키기의 일환으로 토종실태조사를 벌여오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강원 횡성군의 여성농민회에서도 토종씨앗으로 농사짓는 할머니들의 살아온 이야기를 엮어 지역신문에 연재도 하고,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도 하는 등 토종씨앗을 지키는 데 함께 하고 있다(관련기사 : 금보다 비싼 씨앗, 이 정도일 줄 몰랐죠?).

토종씨앗 실태조사 때의 모습
 토종씨앗 실태조사 때의 모습
ⓒ 한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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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노력들이 조금씩 알려지고, 사회적으로 꼭 필요한 일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올해 횡성군에서는 '토종의 메카도시, 횡성'을 만들겠다는 청사진을 가지고 토종보유현황전수조사와 토종씨앗채종포운영을 함께 하기 시작했다. 참 기쁜 일이다.

토종씨앗을 지키는 어른들에 '왈칵' 하는 이유

토종보유현황조사를 통해 지난 3월부터 5월까지 9개 읍면을 찾아다니면서 식량작물, 원예작물, 과일나무 등을 포함 대략 400여종의 토종씨앗을 수집했다. 그리고 실태조사를 통해 수집한 씨앗과 여성농민회 회원들이 보존해오고 있던 씨앗, 토종씨앗 지킴이 안완식 박사님이 갖고 계신 고추씨앗 등 50여종을 토종씨앗채종포에 심어 함께 가꾸고 있다.

이러한 조사와 채종포 운영을 통해 우리는 횡성의 토종유전자원에 대한 목록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어느 누구도 거부하지 못할 농민들의 훌륭한 자산이다. 사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면별로 2인 이상 실태조사를 수행할 분들에게 조사원 교육을 사전 진행했고, 매주 2박3일씩 두 달에 걸쳐 실태조사를 벌였다.

박부례 할머니는 강원 횡성군 공근면 오산리에서 토종마늘과 토종물고구마 농사를 짓고 계신다. 3년 전, 우리 지역에서는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수십 년 된 토종물고구마를 찾은 기쁨이 씨앗으로 나눠져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졌었다.
 박부례 할머니는 강원 횡성군 공근면 오산리에서 토종마늘과 토종물고구마 농사를 짓고 계신다. 3년 전, 우리 지역에서는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수십 년 된 토종물고구마를 찾은 기쁨이 씨앗으로 나눠져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졌었다.
ⓒ 한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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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종보유자현황조사, 토종씨앗에 대한 정보, 씨앗에 얽힌 이야기, 작물 재배방법, 작물의 사용처 등을 일일이 여쭙고 기록하면서 할머니들과 씨앗을 지키는 분들의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실태조사를 진행하면서 토종씨앗을 지키는 할머니들을 많이 만나 뵐 수 있었는데, 특히 기억에 남는 건, 지난 봄 조사 때 만난 박부례(84) 할머니다. 박 할머니를 다시 한 번 찾아가 보았다.

박 할머니는 강원 횡성군 공근면 오산리에서 토종마늘과 토종물고구마 농사를 짓고 계신다. 3년 전, 우리 지역에서는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수십 년 된 토종물고구마를 찾은 기쁨이 씨앗으로 나눠져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졌었다.

자녀들은 연로하신 할머니에게 더 이상 농사를 짓지 말라고 하지만, 할머니는 농사일을 놓지 못하신다. 겨울이면 "이제 농사는 앞으로 못 지을 거야" 하시며 겨우내 방 안에만 계신다. 그렇지만 봄이 되어 몸을 움직일 수 있을 정도만 되셔도 어김없이 마늘밭에 나와 농사 일을 시작하신다.

주위 분들도 더 이상 농사짓기는 힘드실 거라고 했지만 할머니는 올해도 어김없이 농사를 짓고 계신다. 덕분에 지난 3월에는 긴호박, 둥근호박, 청갓, 토종물고구마 씨앗을 다시 얻을 수 있었다. 자식들은 많지만 모두 외지에 나가있어 홀로 생활하시는 할머니에게 농사일은 살아있다는 의미, 그 자체인 듯하다.

"내 언제 다시 씨앗을 주노? 왔을 때 가져가!"

봄에 진행된 실태조사 때는 씨앗만 봤기에 토종작물이 자라는 모습을 보기 위해 할머니댁을 다시 찾았다. 할머니 댁은 비어 있었다. '병원 가셨나? 어디 아프신가?' 가슴이 쿵 내려앉아 여기저기 둘러보니 할머니는 텃밭에서 콩밭을 매고 계셨다. '아, 다행이다.'

콩밭을 매는 할머니는 아침부터 사이사이 비름을 뜯고 풀을 뽑고 계셨는데, 풀 뽑은 자리가 그리 넓지 않다. 허리가 90도로 굽어져 쭈그리고 앉거나 설 수 없는데도 엉덩이를 끌며 풀을 매는 할머니를 보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빨리 자리를 벗어나고 싶고, 그날 하루 찾아가야 할 곳이 많아 서두르고 싶은 마음이 가득한데, 할머니는 "청갓 씨앗 받아 논 거 줄까?" 하신다. 이미 지난 봄에 뽑아간 청갓을 심어 씨앗을 받아놨기에 괜찮다고 하는데도 할머니는 주섬주섬 비닐포대로 만든 옷을 벗고 집으로 들어가신다.

밭에서 집까지는 얼마 안 되는 가까운 곳인데 할머니의 걸음은 흡사 고행하는 순례자의 길처럼 느리고 멀었다. 난 조급했던 마음을 풀고 할머니 뒤를 따랐다. 조용히 한 걸음, 한 걸음 할머니 뒤를 따라 걸으면서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동안 나는 너무도 정신없이 달려왔다. '할머니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많은 것을 얻고 배워서 빨리빨리 토종씨앗도 퍼트리고 할머니들의 전통적인 농사 방법도 전수받아 널리 알려야지' 하는 야무진 꿈만 좇기 바빴다.

그렇게 정신없이 달려왔는데, 아직도 할머니들의 작물과 사람들에 대한 정성에는 한 치도 다가서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는 청갓 씨앗도 아끼셨지만 씨앗을 찾아다니는 나를 아끼는 마음이 크셨다. 해서 "내 언제 다시 씨앗을 주노? 왔을 때 가져가!" 하시며 곱게 챙겨놓은 씨앗을 경대에서 꺼내주셨다.

너무나도 소중한 할머니의 청갓! 그런데 가만 보니 밭에 심지는 못할 것 같아보였다. 척 보기에도 쭉정이만 있고,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흙만 보였다. 그러나 할머니가 어떤 마음으로 그 씨앗을 준비해 놨는지 알기에 소중히 받아왔다.

할머니 삶과도 일치하는 토종씨앗, 잘 지키고 나눌게요

횡성 토종씨앗채종포 앞에 모인 사람들. 우리는 할머니들의 이런 씨앗을 찾아 더 많은 사람들이 현장에서 심고 가꿀 수 있도록 토종씨앗을 나눌 생각이다.
 횡성 토종씨앗채종포 앞에 모인 사람들. 우리는 할머니들의 이런 씨앗을 찾아 더 많은 사람들이 현장에서 심고 가꿀 수 있도록 토종씨앗을 나눌 생각이다.
ⓒ 한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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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 한 포기 그냥 뽑아버리는 것 없이 다시 자연으로 돌려주는 할머니! 씨앗은 모두 받아서 농사짓는 박 할머니는 올해는 물론 내년에도 계속 농사를 지어주실 거라 믿는다. 횡성에서 살아온 토종씨앗은 할머니들의 삶과도 일치한다. 할머니들이 씨앗을 지키는 이유들은 그 수만큼 다양하다.

'뿌리 번식을 하는 꽈리는 감기에 약이 된다, 돼지감자(자주감자)는 전분이 많이 나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심는다, 흰들깨는 겉껍질째 갈아 양념으로 사용하면 좋다, 돼지파에 대한 소문이 좋게 나서 사방 군데서 주문을 하니 매년 심고 또 심는다, 손주가 다른 건 안 먹는데 토종찰옥수수 만큼은 두 통 세 통을 거뜬하게 먹으니 매년 심는다, 토종오이처럼 달고 아삭한 오이는 없으니 매년 오이를 심는다, 빗자루를 만들어 파는 재미가 농사짓는 것보다 더 쏠쏠해서 매년 빗자루수수를 심고 있다.'

이러저러한 다양한 이유들로 우리의 씨앗은 지금도 꿋꿋하게 현장에서 지켜지고 있다. 우리는 할머니들의 이런 씨앗을 찾아 더 많은 사람들이 현장에서 심고 가꿀 수 있도록 토종씨앗을 나눌 생각이다. 박 할머니가 언제 올지 모를 새댁을 위해 청갓씨앗을 고이고이 챙겨 놓았듯이.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언니네텃밭 횡성오산공동체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태그:#토종씨앗, #언니네텃밭, #횡성오산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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