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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가 발생한 지 1073일 만에 세월호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수면 위로 올라온 세월호는 선체 곳곳에 구멍이 뚫리고, 녹이 슬어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만듭니다. 많은 이들은 이제 세월호 참사의 진실이 밝혀질 것으로 기대합니다. 생존자의 진술, 재판과정에서 밝혀진 사실들을 통해 진실의 실마리를 찾고자, '다시보는 오마이뉴스'를 게재합니다. 진실은 결코 침몰하지 않습니다. [편집자말]

[기사 대체 : 30일 오후 11시 20분]

세월호에 탑승했던 단원고 생존 학생들이 드디어 입을 열기 시작했다. 28일 학생 6명이 수원지방법원 안산지원 401호 법정 증인석에 앉았다. 다음날인 29일에도 무려 17명이 예정되어 있다. 당초 검찰은 생존학생 증언자로 23명을 신청하면서도 이중 상당수가 응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증언을 거부했던 학생들까지 마음을 바꾸면서 23명 전원이 증언대에 서게 됐다.

이 법정은 세월호 선원들의 공판을 심리하는 광주지방법원 형사합의11부(부장판사 임정엽)가 따로 마련한 기일이었다.

생존 학생들이 그날, 그 상황에 대해, 공개적으로 증언하는 것이 이번이 처음이다. <오마이뉴스>는 그 중요성을 감안해 좀 길더라도 학생들의 증언을 최대한 가감 없이 보도한다.

28일 오후 세월호 침몰사고에서 생존한 단원고 학생들이 경기 수원지법 안산지원에서 사고 당시 상황을 증언한 뒤 귀가하고 있다.
▲ 세월호 참사 증언한 단원고 생존학생들 28일 오후 세월호 침몰사고에서 생존한 단원고 학생들이 경기 수원지법 안산지원에서 사고 당시 상황을 증언한 뒤 귀가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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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로 증언한 C학생(여, 기자 주 - 발언순서에 따라 알파벳순으로 명명)은 28일 나온 학생들 중 가장 상세하고 명확한 발언을 쏟아냈다. 그의 숙소는 4층 좌현 선미 쪽 다인실인 SP-1번방이었고, 사고 당시에도 그 방에 있었다. C학생은 방으로 물이 들어오기 시작했을 때 "나랑 친구는 캐비닛이 뒤집어지면서 그 안에 갇혔다, 다행히도 그 안에 공기가 있어서 숨 쉬었다"고 말했다. 잠시 동안이지만 소위 에어포켓에서 숨을 쉰 것이다.

그는 4층 후미 비상구 쪽으로 탈출할 때 상황에 대해 "애들이 살겠다고 막 뛰쳐나온 게 아니라, 줄 서서 서로 울지 말라고 하면서, 인원수 세면서 나왔다"면서 "우리끼리도 도와서 나갔는데, 어른들이 도와주면 (더 쉽게) 나갈 수 있지 않았겠는가"라고 말했다. 그는 "해경이 비상구 문을 열어준 것이 아니라, 친구가 문을 열었다"면서 그때야 해경이 '나왔다, 나왔다' 하며 도와줬다고 증언했다.

C학생은 자신이 비상구를 통해 마지막으로 나올 때 파도가 한 번 세게 쳤는데, "그때 (뒤에 있던 아이들이) 물에 휘말려 (다시 안으로) 들어간 것 같다"고 말했다.

다음은 그의 증언을 정리한 것이다.

"우리끼리도 도와서 나갔는데, 어른들이 도와줬다면 더 쉽지 않았겠나"

4월 16일 오전 안산 단원고 수학여행 학생과 여행객 등을 태우고 제주도로 향하던 여객선 '세월호'가 전남 진도 인근 해역에서 침몰하고 있다.
 4월 16일 오전 안산 단원고 수학여행 학생과 여행객 등을 태우고 제주도로 향하던 여객선 '세월호'가 전남 진도 인근 해역에서 침몰하고 있다.
ⓒ 해양경찰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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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측 신문]

"그날 아침 먹고 나서 너무 졸려서 방(4층 좌현 선미 쪽 다인실, SP-1번방)에 있는 애들하고 자고 있었다. 아침 먹을 때가 8시 정도였다. 배가 기운 시각은 잘 모르겠다."

"방안에 나무 캐비닛이 있었다. 그 옆에 캐리어가 놓여 있었고, 캐비닛 위 사물함에 각자 가방이랑 화장품을 넣어뒀는데, (배가) 기울어지자마자 캐리어랑 가방이랑 신발이랑 다 떨어졌다. (배가 왼쪽) 창문 쪽으로 기울었는데, 우리가 넘어질 때 짐들도 같이 떨어졌다. 창밖으로는 컨테이너 두 개랑 박스 두 개, 철근 같은 게 떠다녔다. 자고 있을 때 배가 기울어서 쿵하거나 쇠가 긁히는 소리는 못 들었다."

"처음에는 위험할 수 있으니까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그 방송을 계속 하다가 '여자 아이를 찾는다'는 방송도 나왔다. 여자 아이가 없어졌으니까 있는 쪽에서 소리 질러 달라고. 그 다음에는 '해경이랑 헬기가 오고 있다'고 했고, 또 다시 '가만히 있으라'고. 그 뒤에는 '제발 단원고 학생들 가만히 있어 달라'는 방송이 나왔다. 이걸 기억하는 이유는, 방안에 있는 친구가 '가만히 있는데 자꾸 가만히 있으라 한다'며 울었다. 그 다음에 방송이 한 번 끊겼고, 잠깐 정전이 됐다. 다시 불이 켜진 뒤에는 방송에서 '구명조끼 입을 수 있으면 입고, 주위에 잡을 것 있으면 잡으라'고 했다. 구명조끼를 입으라는 방송은 사고가 난 지 한참 후에 나왔다. 몇 분 뒤인지는 모르겠다. 대피하라거나 어디로 탈출하라는 방송은 없었다. 움직이면 위험하다, 그런 얘기밖에 없었다."

"방송이 나오기 전에, 처음에 배가 기울었을 때 (친구들 보고) 빨리 입으라고 했다. 무서우니까. 이 배가 바닷물 속에 빠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무섭다는 생각밖에 안 들고, (배가) 기울어진 것이 창문 밖으로 보이는데, 다시 제자리로 돌릴 수 없을 것 같았다. 또 제가 지식이 없잖아요. 믿을 건 구명조끼밖에 없어서 (아이들에게) 입자고 했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다 창문 쪽으로 쏠려 있었다. 그러다가 창문에 물이 닿았을 때에야 애들이 다 캐비닛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물이 더 많이 들어오면서부터는 수압 때문에 캐비닛이 다 부서졌다."

"캐비닛 뒤집혀 생긴 에어포켓에서 숨을 쉬었다"

"친구 두 명과 맨 안쪽 칸에, 창문 바로 앞에 있었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없어서 캐비닛 안에 들어가 있었는데 (방에) 물이 차면서 캐비닛이 부서질 때 한 명은 나간 것 같았다. 하지만 나랑 친구는 캐비닛이 뒤집어지면서 그 안에 갇혔다. 다행히도 그 안에 공기가 있어서(에어포켓) 숨 쉬면서 친구랑 저랑 '그래도 살아서 다행이다, 둘이라 다행이다, 혼자면 무서울 텐데 울지 마라'면서 있었다.

계속 밖을 향해 애들 이름 부르면서 살려달라고도 했는데 안 되겠다 싶더라. 그래서 이걸(캐비닛) 들어올릴까 했는데, 해보니까 숨을 쉴 수 없었다. 발버둥밖에 안 쳐지고. 그래도 진짜 살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나도 모르게 한 손으로는 친구를 잡고 캐비닛을 (위로) 쳤다. 그렇게 빠져나오는데 구명조끼를 입었으니까 물에 떴다. 그때엔 (이미 배가) 90도로 기울어진 상태라 문이 우리 위에 있었다. 문까지 높이가 성인남자 키 정도였고, 손을 위로 쭉 뻗어야 간신히 닿을 정도였다. 내 힘만으로는 나올 순 없었다. 밖에 있던 친구가 끌어주고, 밑에 있던 친구는 엉덩이를 밀어줘서 나왔다."

"방에서 나온 다음에는 복도에 줄을 서 있었다. 애들이 살겠다고 막 뛰쳐나온 게 아니라, 줄 서서 서로 울지 말라고 하면서. (선미 비상구 쪽으로) 해경이 보여서 애들이 안도하면서 더 울었다. 그래도 (서로 인원 수) 세면서 나왔다. 내가 (복도에서) 마지막으로 나올 때 파도가 한 번 쳤는데, 그게 많이 셌다. 그때 (뒤에 있던 아이들이) 물에 휘말려 (다시 안으로) 들어간 것 같다."

"배가 90도로 기울어져서 (벽을 바닥처럼 짚으면 되는 상황이라) 복도에서 선미 쪽으로 나갈 때는 안 힘들었다."

"선원이 도와준 적은 없었다. 해경은 밖에 비상구 쪽에서 애들이 나오면 건져주긴 했는데 안으로 들어오진 않았다. 우리끼리 복도에서 '왜 들어오지 않느냐'고 얘기하기도 했다. 우리가 줄을 서 있을 때 앞에서 해경이 보였다. 복장은 모르겠고 검정색 보트가 보였다. 해경은 비상구 바로 앞에 있었다. (우리가) 비상구로 나가면 바로 잡아줬다. 그쪽과 우리가 있는 쪽이랑 물의 높이는 비슷했다."

"파도에 휘말려 아이들이 다시 배 안으로 밀려들어갔다"

4월 16일 오전 안산 단원고 수학여행 학생과 여행객 등을 태우고 제주도로 향하던 여객선 '세월호'가 전남 진도 인근 해역에서 침몰하는 가운데 긴급 출동한 해경이 구조작업을 벌이고 있다.
 4월 16일 오전 안산 단원고 수학여행 학생과 여행객 등을 태우고 제주도로 향하던 여객선 '세월호'가 전남 진도 인근 해역에서 침몰하는 가운데 긴급 출동한 해경이 구조작업을 벌이고 있다.
ⓒ 해양경찰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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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초기에 탈출하지 않았냐는 질문에) 우리는 아무 지식이 없고, 그런 사람도 없고, 처음에 배에 탈 때 '이러면 어디로 나가라 어떻게 하라'는 교육마저 없던 상황에서 '기다리라'는 방송이 나왔다. 아무래도 승무원이나 선장이 우리보다 지식도 많고 하니까 믿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말 믿고 계속 기다렸다."

"탈출하면서 다친 건, 그냥 (캐비닛) 나무가 부서지면서 거기에 잠깐 끼어서 상처 난 정도다. (당시 상황을 떠올리면 정신적으로 고통스럽냐고 묻자)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선원들은 당연히 엄벌에 처해야 한다."

"세월호에 탔을 때는 안전 교육 같은 게 아예 없었다. 배에 타자마자 바로 밥을 먹은 뒤 휴식시간이었다. 우리가 만약 그 방송을 봤다면 식당 안에 있는 텔레비전으로 봤을 텐데, 내가 계속 거기 서 있었고 3층을 돌아다녔는데 전혀 그런 것이 없었다. 다른 친구들도 없었다고 한다."

"('만약 구명벌이 터져서 바다에 떠있었다면 그걸 보고 탈출했겠냐'는 재판장의 물음에)퍼져만 있었다면 우리는 몰랐겠죠? 그런데 (밖으로) 나가라는 방송과 (어른들의) 도움이 있었다면 정말 충분히 나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우리끼리도 도와서 나갔는데, 어른들이 도와주면 (더 쉽게) 나갈 수 있지 않았겠나."

"배를 탔을 때 안전교육 전혀 없었다"

[변호인 측 신문]

"처음 배가 기울었을 때 그 각도는 한 45도? 그리고 방송 말고는, 어른들 목소리는 안 들렸다. (숙소가) 안쪽 방이라 우리 목소리밖에 안 들렸다."

"'10분 뒤에 해경이 도착한다, 5분 뒤에 해경이 도착한다' 이런 방송을 두세 번쯤 들었다. 남자목소리이긴 한데 살짝 여자 쉰 목소리 같았다. 동영상 보면 나오는 그 목소리였다. 한 사람이 방송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물이 차지 않았을 때엔 도움 없이 나갈 수 있었냐는 질문에) 캐비닛이 있었으니까(기자 주 - 캐비닛을 밟아서 올라가면 된다는 뜻) 나가라고 했으면 친구들끼리 도와서 복도까지는 나가긴 했을 거다."

"방에서 빠져나왔을 때 복도에는 친구들이 아주 많이 있었다. 1개 반 인원(30~40명) 정도? 맞은편 SP-2번방에선 많이 탈출하지 못했다. 복도에 있던 애들 중에 절반 정도가 파도에 휩쓸려갔다. 내가 나간 뒤부터 애들이 못 나왔다."

"비상구(표시가) 보이니까 선미로 나갔다. 거기에 해경 구명보트가 근접해 있었는데, 한 보트에 두 명씩 있었고, 두 대 정도 와 있었다. 해경이 비상구 문을 열어준 것이 아니라 먼저 (그쪽으로) 간 친구가 문을 열었더니 다른 사람을 구하러가던 해경이 '나왔다, 나왔다' 하면서 (우리를) 도와줬다. 근데 내가 마지막으로 나오면서 '저기 안에 애들 많아요'라고 말했는데 내게 '구명조끼 벗으라'고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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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세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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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정치부. sost38@ohmynews.com

오마이뉴스 선임기자. 정신차리고 보니 기자 생활 20년이 훌쩍 넘었다. 언제쯤 세상이 좀 수월해질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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