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스타 ■취재/이선필 기자·사진/이정민 기자| 영화 <군도: 민란의 시대>(이하 <군도>)의 마향은 전형적인 외강내유의 여걸이었다. 활과 화살을 자유롭게 다루며 군도 무리의 선봉을 굳건하게 지키고 동료들의 구애도 차갑게 외면하는 듯하지만 속정은 깊은 인물이다. 그런 마향을 윤지혜가 생동감있게 살려놨다.

본인 스스로는 "선착순으로 먼저 달려가서 캐스팅된 게 아닐까"라며 겸손하게 말했지만 분명 마향은 윤지혜의 것이었다. 본래 물망에 올랐던 다른 배우가 고사했었다지만 마향은 그에게 올 운명이었고, 그는 충실히 역할을 해냈다.

"갑자기 연락을 받고 바로 미용실로 달려가서 꾸민 후 윤종빈 감독님을 만났죠. 감독님이 절 보고 '무덤 파먹게 생겼다'고 말했어요. 마향이 무덤을 도굴해 살아가는 캐릭터잖아요(웃음). 그간 많은 작품에서 홍일점 캐릭터가 있었지만 특정 작품을 생각하진 않았어요. 영화가 영화인만큼 심장은 유관순, 외형은 밀라 요보비치, 그리고 성격은 개그우먼 안영미씨, 이렇게 세 부분으로 가져왔어요."

"<군도>는 마치 잘 차려진 잔칫상 같았다"


윤지혜가 이해한 <군도>는 유머와 해학이 살아있는 의적들의 이야기였다. 윤지혜는 "어쩌면 지금 시대에 예민할 수도 있지만 그걸 가벼우면서도 재밌게 푼 게 좋았다"며 "단순하게 선악을 구분한 게 아니라 삶을 능동적으로 살아가는 점을 전하고자 한 것 같다"고 말했다. 

"출연할 수 있어서 기뻤고, 그만큼 현장에서의 추억도 많아요. 그런데 다들 내공이 대단한 배우들이잖아요. 하정우, 강동원, 마동석, 조진웅씨 등등. 그 연기에 밀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현장에서는 이미 그 분들끼리 친분이 있는 분위기였지만 저 역시 그 틈에 쑥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죠.

영화에 잠깐 나오는 분들마저 제가 평소에 정말 좋아했던 배우들이었어요. 단역이라고 치부하기엔 다들 소중한 분들이죠. 최씨 부인으로 나온 박명신 언니, 김종구 선생님, 그리고 김꽃비, 김성균씨까지요. 대본 리딩 할 때 그 분들을 만났는데 마치 잘 차려진 잔칫상을 만난 느낌이랄까."

강동원마저 촬영 종료 후 눈물을 흘렸다고 했을 만큼 현장은 추억으로 꽉 차 있었다. 윤지혜 역시 "작품을 끝내고도 혼자 집에 있을 때 생각이 많이 나서 종종 울었다"며 당시의 소회를 전했다. "화면 속 마향을 보니 진짜 못생겼다"면서도 "세련된 방식으로 민란을 풀어낸 데에 일조해서 뜻깊다"고 말하기도 했다. 백성을 탄압하는 부호 조윤(강동원 분)마저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매력적인 캐릭터"라고 윤지혜는 생각했단다. 모든 캐릭터가 개성을 지닌 채 살아있다는 점에 보람을 느꼈던 것이다.

오랜 무대 경험? "오히려 앞으로 좋은 기회 많을 것"


극장과 TV 화면에서 다소 낯설게 느낄 수도 있지만 윤지혜는 데뷔작인 <여고괴담> 이후 연극 무대에서 충실하게 내공을 쌓아왔다. 갈수록 여배우의 입지가 좁아지는 게 한국 영화계 현실이고, 그만큼 도중에 포기하는 이들이 늘어가고 있지만 윤지혜는 연기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렇다고 대중적인 작품을 아주 안 한 것도 아니다. 드라마 <아일랜드>를 비롯해 <특수사건전담반 TEN> <유령> 등에서 존재감을 발휘했다.

"고등학교 때 연극반을 했었는데 그때는 나름 예쁘다는 말도 들었어요(웃음). 특별히 다른 걸 할 게 없다고 생각하던 시기였지만, 연기를 하면 할수록 이 길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지는 거예요. 나를 표현하는 느낌이 좋았던 거죠. 지금 생각해보면 <여고괴담>으로 데뷔를 너무 쉽게 했던 거 같아요. 그때는 그런 기회가 소중한 줄 몰랐거든요.

그래서 그 이후 제가 느리게 성장했나 봐요. <여고괴담>에 함께 나왔던 동료들이 드라마에 나오고 이름을 알려갔지만 전 영화 쪽을 더 하고 싶었거든요. 사실 그게 마음대로 되진 않잖아요. 배우는 곧 선택을 받아야 하는 입장이니까요. 하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연극 무대를 택한 것도 제 생각이었어요. 그만큼 이 판을 떠나지 않고 버티고 기다려왔는데 <군도>에 참여한 거죠. 정말 각자의 몫이 있고, 타이밍이 있는 거 같아요."

'좋은 배우란 무엇인가' 그가 지금까지 가슴에 품고 있는 질문이다. "매번 답이 바뀐다"면서도 윤지혜는 작품을 할 때마다 자신에게 묻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2010년 초반부터 최근까지 이전 회사와의 문제와 작품 문제 등으로 여러 번 좌절을 겪었다. "이걸 어떻게 뛰어 넘지, 생각하다보니 극복하고 있더라"며 스스로 배운 하나의 교훈을 언급했다.


"답답했지만 연기 말고 다른 걸 할 생각은 안 했던 거 같아요. 전 저이고 싶지 않아요. 다른 캐릭터를 연기하는 모습도 결국 저겠지만 연기를 통해 내가 아닌 누군가를 만나고 싶은 거죠. 그래서 좋은 연기자에 대한 생각이 계속 달라지는 것 같아요.

예전엔 좋은 사람이 되는 게 좋은 연기자의 우선 조건이라고 생각했어요. 재료 자체가 좋아야 좋은 연기가 나온다고 여긴 거예요. 하지만 어느 정도 선에 올라온 분들이라면 '좋은 배우'라는 말 자체가 의미 없어져요. 어떤 캐릭터를 만났고,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평가받잖아요. 결국 인연이죠. <군도>의 마향은 제게 분명 좋은 운명이에요. 인생을 통틀어 운명처럼 다가온 순간이라 꼽을 수 있습니다."

특정 작품이나 장르를 원하기보다 그녀는 '자연스러운 연기', 즉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세밀한 연기를 보이는 게 목표"라고 했다. 유럽 지역의 다양한 작품 군을 부러워하면서도 윤지혜는 "우리나라에서도 다양하고 다른 시선을 담은 작품이 나왔으면 좋겠다"며 "그런 작품에서 좋은 연기를 보이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