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판 '범죄와의 전쟁' 민중들이 법을 집행하다.

조선판 '범죄와의 전쟁' 민중들이 법을 집행하다. ⓒ 쇼박스


오랜만에 아무 생각 없이 영화를 봤다. 영화 제목에서는 상당히 무게감이 느껴졌지만, 윤종빈 감독은 홍길동이 활동했던 활빈당 류의 유쾌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나 보다.

영화 중간마다 관료와 결탁한 지방 토호들의 부정축재와 민중의 아픔을 농도 짙게 그려냈지만, 대체로 <군도>는 배경음악으로 컨트리 웨스턴 리듬을 사용하여 민중들의 역동적인 존재감을 드러내 주었다. 또, 관객들로 하여금 당시 사회상의 그림자에 갇히지 않게 해 주었다. 특히, 중요한 순간에 튀어나오는 코믹한 장면은 영화 내내 가졌던 긴장의 끈을 누그러지게 해 주는 양념이 되었다.

김지운 감독의 <놈, 놈, 놈>에 이은 퓨전 사극답게 배경음악과 등장인물들의 캐릭터들은 현대인의 전형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석양을 배경으로 먼지 일으키며 말 달리는 광경은 <황야의 7인>이나 <석양의 무법자>시리즈를 그대로 베껴 놓은 듯한데 이는 한국 영화의 수준이 스토리와 캐릭터의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다양한 창조성이 담보되어 진일보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전체적인 흐름은 조윤을 연기한 강동원의 출생과 서얼로서 겪어야 했던 기구한 사연 그리고 그가 아버지의 인정을 받기 위해 점점 독한 악인으로 변해가는 과정에 덧대어 지리산 추설들의 이야기가 붙여진다.

최근 히트작 <트랜스포머> '사라진 시대'가 감당 못 할 플롯을 대책 없이 풀어놓아 영화 종반에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채 끝맺음을 맺어야 했던 것에 비하면, 영화 <군도>는 그런 부분에서는 나름대로 선방했다.

조윤과 돌무치, 지리산 추설들이 지닌 각각 스토리는 너무 깊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백성들을 탄압, 수탈하는 관리들과 양반들의 비위행위 그리고 이를 힘없이 당해내야 하는 백성들의 고초를 우울한 색감과 내레이션으로 잠시 표현했을 뿐 관객으로 하여금 지나친 억압의식이나 패배주의에 갇히지 않도록 배려해 주었다.

각각의 스토리, 영화의 폭과 넓이에 넘치지 않게 배분

거의 대여섯 개에 가까운 각각의 스토리를 영화의 폭과 넓이에 넘치지 않게 적절히 배분했던 것이 주효했던 것 같다. 그래서 이 영화를 진중한 태도를 가지고 깊이 있게 보려 했던 사람들에게는 실망스러울 수도 있다. 단지 조선의 서부평야에서 벌어지는 유쾌한 활극으로만 보려던 관객들에겐 그래도 나름대로 성과가 있다고 하겠다.

 '조윤'역의 배우 강동원.

'조윤'역의 배우 강동원. ⓒ 쇼박스


난 <군도>를 보면서 등장인물의 캐릭터에 좀 집중해서 보았다. 타 영화에서 가져온 캐릭터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 캐릭터 간의 매치 작업이 작은 재미였다고나 할까. 악역 조윤을 담당한 강동원은 나비처럼 날아오르는 칼사위를 보여주며, 춤과 검법을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미적인 부분에 상당 부분을 할애했다. 그의 여성스러운 외모와 티 없이 깔끔한 연기는 과거 일본영화에서 악귀인 '오니'를 쫓는 '음양사'를 보는 듯했다. 사뿐히 날아올라 보여주는 춤사위는 검법의 이치를 예술로 이끌어 올렸다고 보아도 과장된 말은 아니다.

돌무치역의 하정우는 단순무식을 무기로 상대를 제압하는 카리스마가 넘쳐난다. 백정들이 소를 잡을 때 사용하는 짧은 쌍칼을 멋들어지게 돌리고 어깨에 걸치는 장면은 마치 영화 <쟝고>나 <석양의 무법자>에서 쌍권총을 난사하다 적을 쓰러뜨린 후 쌍권총을 두세 바퀴 돌리다가 권총지갑 안으로 넣는 화려한 개인기의 오마쥬처럼 보인다.

아쉬운 건 투톱 주연으로 강동원과 쌍두마차를 이루는 하정우의 영화를 통해 드러나는 개인사나 스토리의 집요함이 강동원보다 덜 하다. 거의 카메라 원샷으로 이동하는 강동원에 비해 돌무치의 연기는 지리산 추설들의 집단행동에 묻혀버리는 아쉬움이 있긴 했다.

땡추 역의 이경영은 한동안 영화계의 능력자, 고단수, 달인으로 주목을 끌었던 백윤식의 캐릭터를 완전히 이어받은 듯하다. 백윤식이 정중동의 마력을 보여줬다면, 이경영은 우문현답을 무기로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반은 도사이다. '성불하소서'란 말이 당분간은 유행할 듯.

그리고 누가 보아도 동학운동의 '전봉준'을 닮은 이성민은 농민 혁명의 지도자 그 자체였다. 탐관오리와 양반의 수탈행위를 눈감아 줄 수 없는 홍길동이 나타난 것 같았다. 지리산의 굴곡진 계곡을 굽이굽이 내려오는 그의 연설은 영화 내내 자욱한 연기를 뚫고 현실을 직시하게 해주었으며, 내가 누구인지, 우리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하는 명연설이었다.

영화 종반 백성의 목숨을 담보로 알아낸 관군은 지리산 추설을 찾아내 모조리 죽이고 불태워 버린다. 이후에 대나무 숲에서 조윤과 돌무치가 마지막 대결할 때, 조윤이 한마디 던진다.

"타고난 운명을 바꾸기 위해 생을 걸어본 자가 있거든 나서거라. 그 자의 칼이라면 받겠다"

망해가는 왕조 하에서 계급 사회에 절망 느낀 자의 최후 외침

이 말이 조윤의 악행을 정당화할 순 없다. 그러나 망해가는 왕조 하에서 계급 사회에 절망을 느낀 자의 최후의 외침으로서는 이보다 더 적당한 문장은 없을 듯하다. 결국, 조윤은 타고난 운명을 바꾸기 위해 생을 건 농민에게 장창이 몸을 관통하여 죽게 된다.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 군도의 홍일점 '마향'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 군도의 홍일점 '마향' ⓒ 쇼박스


아! 참……. 이 영화에서 가장 매력적인 역이었다면 여성으로서 기막힌 무공을 선보였던 '마향'역의 윤지혜를 꼽고 싶다. 아무래도 여성들이 액션을 감당하기엔 기본자세와 액션의 연결씬이 부자연스럽기 마련인데 '윤지혜'는 그런 허점이 보이지 않았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며 '마향' 역에 조금만이라도 비중을 더 주었으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도 든다.

군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영화, 음악, 종교학 쪽에 관심이 많은 그저그런 사람입니다. '인간은 악한 모습 그대로 선하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