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서중석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 원장이 25일 오전 서울 양천구 국과수 서울연구소 대강당에서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으로 추정되는 변사체의 정밀부검 결과 "왼쪽 두 번째 손가락 끝마디 뼈 결손, 네 번째 손가락 변형으로 나왔다"고 발표하고 있다.
▲ 서중석 국과수 원장 "유병언 시신 맞다" 서중석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 원장이 25일 오전 서울 양천구 국과수 서울연구소 대강당에서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으로 추정되는 변사체의 정밀부검 결과 "왼쪽 두 번째 손가락 끝마디 뼈 결손, 네 번째 손가락 변형으로 나왔다"고 발표하고 있다.
ⓒ 유성호

관련사진보기


며칠 전이었다. 피부병에 걸린 세 아이를 처가에 보내고 밖에서 아내와 저녁을 먹었다. TV에서는 연신 '백골'로 발견된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 관련 보도가 나왔다. 모종편 방송이었다.

"유병언 현상금은 어떻게 될 것 같아요?"

아내가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마침 유 전 회장 시신을 발견해 신고한 매실밭 주인 할아버지의 인터뷰가 나왔다. 내심 아내에게 한마디 쏘아주고 싶었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은 피눈물이 나는데, 지금 현상금 따위가 중요하느냐고 말이다.

내 마음을 알았을까. TV 아나운서가 현상금 문제가 어떻게 처리될지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종편 방송들이 왜 많은 사람의 이목을 끄는지 알 것 같았다. 삿된 호기심을 가진 시청자들을 배려하는 그들은 얼마나 친절한가.

유대균과 '얼짱 호위무사'가 주인공인 '막장드라마'

전남 진도군 팽목항 매표소에 '구원파' 유병언과 유대균 부자의 수배전단이 붙어 있다.
▲ 팽목항에 나붙은 '구원파' 수배전단 전남 진도군 팽목항 매표소에 '구원파' 유병언과 유대균 부자의 수배전단이 붙어 있다.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바야흐로 '유씨 일가 박멸기(아래 '박멸기')'의 계절이다. 첫 번째 주인공은 유씨 가문의 제1대를 대표하는 유 전 회장이었다. 그는 일찌감치 대한민국 검·경에 의해 4·16 세월호 참사의 '주범'으로 지목되었다. 경찰은 검찰 지휘를 받아 대대적으로 병력을 동원했다. 토끼몰이하듯 그를 쫓았다. 지명수배 전단지에 오른 그의 이름 아래에는 수억 원의 현상금이 박혔다.

유 전 회장이 붙잡히면 세월호 참사의 진실이 백일하에 완전히 드러날 것 같았다. 박근혜 대통령을 포함해 어떤 식으로든 세월호 참사 책임을 져야 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들에게 유 전 회장은 참사 책임 유무와는 별개로 꼭 있어야 하는 존재였다. 특급 '희생양'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유 전 회장은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다. 여기에는 부패한 시신과, 돈다발이 뭉텅이로 든 가방 등 세간의 눈길을 끌 만한 선정적인 흥행 요소들이 넘쳐났다.

전남 순천의 이름 없는 마을 상공에는 수많은 헬리캠이 떠다녔다. 그 헬리캠들이 전하는 생생한 화면들은 시청자들에게 넘치는 '박진감'을 선사했다. 졸지에 전국적인 명소가 돼버린 매실밭은 유례 없이 삼엄한 경찰과 이유 없이(?) 열의에 넘치는 젊은 기자로 넘쳤다. B급 범죄영화 같은 '유씨 일가 박멸기'는 그렇게 마무리되는 듯했다.

그러나 유 전 회장의 비극적인 최후로 마무리된 매실밭 이야기는 '박멸기' 전체의 밋밋한 발단부에 불과했다. 며칠 전, 유 전 회장의 큰아들 유대균(44)씨가 경기도 용인의 한 오피스텔에서 체포되었다. 유씨 체포를 기점으로 발단부보다 더 흥미진진한 전개부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발견한 시신을 놔둔 채 수만 명의 병력을 동원해 유병언 검거작전을 벌인 검·경으로서는 구겨진 체면을 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유씨 체포 과정에 더 극적인 흥행 요소가 등장한 이유다.

사실 '유씨 일가 박멸기'의 발단부는 유 전 회장의 단독 주연 성격이 짙었다. 신출귀몰하는 운전수와 헌신적인 '김 엄마' 등 대중의 시선을 끌 만한 구원파 신도들이 잠깐 조연으로 출연하긴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석 달간 이어진 유씨의 도피를 도운 구원파 여신도 박아무개(34)씨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놀랍게도(?) 박씨는 여성이었고, 일명 '얼짱 호위무사'로 불린 데서 알 수 있듯이 미모와 무술 실력을 겸비하고 있었다. 대중의 호기심을 끌 만한 요소를 두루 갖춘 박씨는 순식간에 온·오프라인을 완전히 평정했다.

젊은 여성 호위무사 곁에는 또 다른 한 여성이 있었다. 유씨에게 먹을거리를 갖다주며 은신을 도운 오피스텔 실소유주 하아무개(35)씨였다. 그녀는 박씨가 체포 작전에 나선 경찰들에게 손을 들며 항복하는 자세를 취하자 옆에서 눈물을 흘리며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그 모든 과정은 CCTV 카메라 화면에 담겨 전국민 앞에 중계되었다.

유씨와 얼짱 호위무사가 주인공으로 등장한 전개부는 막장 드라마보다 못할 게 전혀 없었다. 익히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막장 언론은 이들 두 사람의 관계를 시시콜콜 파고들고 있다. 민감해 보이는 개인정보들이 별다른 여과 없이 사람들 앞에 쏟아지고 있다. 구겨진 체면(실은 완벽한 무능이라고 해야 옳지 않을까) 때문에 약이 바짝 오른 검·경의 도움 없이는 알기 힘든 것들이다. 갈 길 바쁜 검·경에게 피의자 인권 보장이니 뭐니 하는 것 따위는 사치에 불과하다.

짜증지수 높이는 '유씨 일가 박멸기'

25일 오후 경찰에 검거된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청해진해운 회장)의 장남 대균씨가 인천지검으로 압송되며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25일 오후 경찰에 검거된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청해진해운 회장)의 장남 대균씨가 인천지검으로 압송되며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발단부와 전개부를 지나고 있는 '박멸기'는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까. 이미 유 전 회장 가족은 거의 풍비박산이 났다. 형 유병일(75)씨와 동생 유병호(62)씨는 횡령과 배임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되어 있다. 부인 권윤자(72)씨와 처남 권오균(64)씨 역시 횡령·배임 혐의로 구속 기소되었다. 장녀 유섬나(48)씨는 프랑스에서 체포돼 범죄인 인도 재판을 받고 있다. 그녀에게는 횡령 및 배임에 조세포탈 혐의를 받고 있다.

유 전 회장의 가족 중 아직 대한민국 검·경의 손아귀에 잡히지 않은 사람은 차남 유혁기(42)씨와 차녀 유상나(46)씨다. 유섬나씨와 마찬가지로 유혁기씨도 횡령 및 배임과 조세포탈 혐의를 받고 있다. 미국 영주권자인 유상나씨에게는 횡령·배임 혐의를 받고 있다.

언론 보도를 종합하면, 이번에 체포된 유대균씨는 그룹 경영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았다. 유씨는 조각가로서 회사 경영보다 예술 분야에 전념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그는 유 전 회장의 장남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세간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고 있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그의 직접적인 책임을 입증할 만한 요소를 찾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룹의 실질적인 경영 후계자는 차남인 유혁기씨였다. 검찰도 그를 유 전 회장의 자녀들 가운데 맨 먼저 수사 대상에 올렸다고 한다. 현재 유씨는 인터폴에 수배되어 있다. 우리 정부는 그에게 범죄인 인도 청구를 해 놓았다. 미국에 체류하고 있어서다.

검·경이 유씨 일가를 싹쓸이하듯 잡아들이고 있는 까닭은 돈 때문이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검찰이 현재 동결해 놓은 유씨 일가 재산은 1054억 원이다. 이중 646억 원이 유 전 회장의 것이다. 하지만 이 돈은, 이미 그가 사망한 상태이기 때문에 추징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나머지 408억 원어치도 유씨 자녀들이 받고 있는 횡령 및 배임 혐의가 유죄로 입증돼야 환수할 수 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검찰은 정부가 예상한 세월호 참사 수습 비용을 유씨 일가에게 받아낼 계획이었다. 구상금 청구 소송이라는 민사소송을 통해 사고 수습 비용을 유씨 일가에게 맡기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박멸기'의 절정부를 미리 상상해 본다. 절정부의 주인공은 유혁기씨가 될 공산이 크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그룹 경영에 실질적으로 관여한 인물이 바로 그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내려진 횡령·배임 금액만도 559억 원에 이른다.

1291억 원에 달하는 유 전 회장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액수다. 혐의 입증 등의 여러 문제 때문에 장담하기 힘들지만 최소한 그가 있어야 그나마 정부와 검찰의 사고 수습 로드맵이 작동한다. 그를 '박멸기'의 절정부를 주도하는 주인공으로 보는 까닭이다.

하지만 그는 쉽게 잡히지 않을 것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대한민국 검·경이 그를 쉽게 잡지 못할 것이다. 그동안 그들이 거쳐온 과거가 그 무능의 근거다. 그래서다. 그가 주인공이 될 것으로 보이는 절정부는, 뻔한 파국의 대단원이 계속 유예되면서 시청자의 애간장을 타게 만드는 여느 막장 드라마와 비슷하게 지지부진 이어지지 않을까.

물론 가끔은 C급 도피담의 주인공으로 잠깐잠깐 등장할 수도 있겠다. 미국에 있는 어느 최고급 호텔에서 묘령의 여성과 함께 있는 모습이 포착됐다느니, 그가 거쳐간 고급식당의 한 끼 식사가 우리 돈으로 얼마니 하는 쓸데없는 이야기들과 함께 말이다.

그럴수록 대한민국 검·경과 언론이 합작 연출하는 '박멸기'는 우리 국민의 짜증지수를 맘껏 높이지 않을까. 놀라지 마시라. 그래야만 그사이 온통 '박멸기'에 둘러싸이게 될 세월호 참사 사건이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진도 맹골수도 깊은 바다 속에 수장된 그 수많은 세월호 희생자들이 우리를 어떻게 바라볼지 두렵다.

덧붙이는 글 |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태그:#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 #장남 유대균, #'얼짱 호위무사', #차남 유혁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