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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 부채 1000조 원 시대. 빚을 감당할 수 없는 장기 연체 채무자들의 고통도 커지고 있습니다. 미국 '99% 월가를 점령하라' 운동에서 비롯된 '롤링 주빌리'가 한국에 더 절실한 이유입니다. <오마이뉴스>는 '99%에 의한, 99%를 위한 빚 탕감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희망살림과 함께 장기 연체 부실 채권 '땡처리' 실태와 '대출 권하는 사회'를 고발합니다. 이 글은 그 세번째다. [편집자말]
제윤경 에듀머니 대표는 희망살림 이사를 맡아 '한국판 롤링 주빌리'인 '99%에 의한, 99%를 위한 빚 탕감 프로젝트'를 이끌고 있다.
 제윤경 에듀머니 대표는 희망살림 이사를 맡아 '한국판 롤링 주빌리'인 '99%에 의한, 99%를 위한 빚 탕감 프로젝트'를 이끌고 있다.
ⓒ 김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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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 없는 세상을 위해."

지난 2012년 여름 제윤경(43) 에듀머니 대표를 만났을 때 <약탈적 금융사회> 첫 장에 직접 적은 메시지다. 그때 제 대표는 감당 못 할 빚을 권하는 약탈적 금융을 고발하고 '채무 노예 해방'을 외쳤다(관련기사: "빚 권하고 집 뺏는 건 약탈... 주범은 은행").

그로부터 2년이 흐른 지금 제 대표는 '한국판 롤링 주빌리'로 그 '약속'을 실천하고 있다. 올해 이미 두 차례에 걸쳐 시민들에게 십시일반 모은 돈으로 채무자 216명의 묵은 빚 14억 7천만 원어치를 모두 불태운 것이다.

"부도덕한 부실채권 거래 폭로하려 '빚 탕감 운동' 나서"

"빚 탕감은 빚을 없애주자는 시혜적 차원이 아니라 이 구조를 바꿔보자는 거예요. 채무자가 제 목소리를 내서 부실 채권을 처리하는 금융회사와 정부의 수면 아래 부도덕함을 폭로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부실 채권을) 저가에 거래하면서 빚 면책해주는 시늉만 하는 게 무슨 음모 같잖아요."

제 대표가 사단법인 '희망살림'을 비롯한 시민사회단체들과 '99%에 의한 99%를 위한 빚 탕감 프로젝트'에 나선 진짜 이유다. 미국 시민단체인 '월가를 점령하라'(OWS) 역시 지난 2012년 11월 '롤링 주빌리' 프로젝트로 7억여 원을 모금해 부실 채권 155억 원을 소각했다. 50년마다 돌아오는 '희년(주빌리)'에 빚을 탕감하고 노예를 해방시켜주던 구약성서 정신을 이어받는 한편, 부실 채권을 헐값에 거래하는 실태를 고발한 것이었다.

지난 24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한 커피점에서 제 대표를 만나고 있을 때 최경환 경제팀이 새 경제 정책 방향을 발표했다. 예상대로 주택담보인정비율(LTV)과 총부채상환비율(DTI) 같은 주택담보대출 규제를 완화해 '빚내서 집 사기' 유리한 환경을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가계부채 1000조 원 시대. 있는 빚도 없애야 한다는 제 대표에게 빚을 더 늘리는 정부가 달가울 리 없었다.

"정부 정책이 어떻게든 채무자를 쥐어짜고 빚을 더 늘리는 방향으로 가서 전 국민을 채무 노예화 하려는 거예요. 빚지면 죄의식 갖고 어디다 하소연도 못 하고 원금 이상 갚고도 숨어 살고 도망 다닐 수밖에 없어요. 결국 국민들을 통치하기 쉬운 구조를 만들고 있는 거죠."

제 대표는 돈을 풀어 경기를 살리기는 불가피하지만 방향을 잘못 잡았다고 지적했다.

"부동산 건설 경기 부양이 아니라 실질적 가계 소득을 늘리고 빚 면책 쪽으로 가닥을 잡아야 해요. 지금 금융회사는 몸집이 비대해지고 많은 이익을 내고 있는데, 우리를 찾아오는 채무자들 상당수는 갚은 이자가 원금을 초과한 상태에서 빚을 감당 못해 연체 중인 경우가 많아요. 금융회사가 자체적으로 (원금을 일부 탕감하는) 워크아웃을 하면 채무자들도 숨통이 트이고 가처분소득이 늘어 내수도 살아날 텐데, 빚내서 집을 사라는 신호를 동시에 주고 있어요. 결국 기업 돈이 부동산 건설 경기 쪽으로 흘러가도록 하고 소비자들은 빚을 내서 투자 주체로 나서라고 선언한 셈이죠."

"부동산 말고 빚 면책으로 경기 살려야"

은행, 신용카드사, 저축은행, 대부업체 등에서 3개월 이상 연체된 채권은 부실채권으로 분류돼 유동화전문회사나 자산관리회사에 매각되고, 다시 대부업체나 추심업체로 흘러들어간다. 이 과정에서 무담보 부실채권 가격은 원금의 1~10% 수준까지 떨어지지만 추심업체는 원금을 다 받아내려고 채무자를 압박한다.

"부실채권 처리시장은 채무자가 빚을 갚게 하는 게 아니라 쥐어짜는 프로그램이에요. 정부가 개입해서 채무자가 일할 의욕을 만들어주고 소득이 안정될 때까지 도와줘야 해요. 미국에선 채무자 소득이 중단되면 추심을 못하게 돼 있어요. 다만 일자리가 생기면 소득에 압류를 걸고 채권자와 채무자가 협상해서 합리적인 워크아웃 계획을 마련해요. 평범한 사람들은 소득이 다 노출되기 때문에 굳이 추심할 필요도 없는 거죠. 소득을 감출 수 있는 건 일부 돈과 권력 있는 사람들뿐이에요. 그건 다른 방법으로 털어내야지 그런 사람들 때문에 서민만 쥐어짜고 있잖아요."

제윤경 에듀머니 대표가 24일 서울 연희동 사무실에서 빚 탕감 프로젝트 대상자의 채권 내용을 살펴보고 있다.
 제윤경 에듀머니 대표가 24일 서울 연희동 사무실에서 빚 탕감 프로젝트 대상자의 채권 내용을 살펴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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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현재 10조 원 규모인 부실채권 시장은 애초 1998년 IMF(국제통화기금) 사태 직후 기업들의 부실채권을 털어내는 과정에서 출발했다. 금융회사들은 정부에서 요구하는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을 맞추려고 부실채권을 손실로 처리한 뒤 시장에 헐값에 내놨다. 그렇다 보니 부실채권 시장도 채무자 채무 조정보다는 채권자들의 재테크 수단으로 변질됐다.

"금융회사 건전성 때문이 아니에요. 이미 부실채권시장에서 사냥꾼이 여러 명 생긴 거예요. 채무자 한 사람을 뜯어먹으려고 금융회사, 대부업체, AMC(자산관리회사), 유동화전문회사가 계속 채권을 회전시키면서 매달려 있는 거죠."

무담보 채권을 원금 3% 정도에 사서 30%만 받아내도 이익이 10배가 넘는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위험이 클수록 수익이 높다). 요즘 부실채권시장에 큰손 투자자들이 몰리는 이유다.

"(채권 투자자들에겐) 대박이죠. 그래서 채권 가격이 오르고 있는 거예요. 이전엔 금융회사들도 이런 일 안 하려고 대부업체로 바로 채권을 넘겼는데 요즘엔 돈이 된다는 걸 알고 자신들이 출자한 업체에서 중간에서 채권을 다 가져가 대부업체도 사기 힘들다고 해요."

"사냥꾼들이 채무자 한 사람 뜯어먹기... 5년 이상 연체하면 안 갚아도 돼"

여기서 거래되는 부실채권 가운데는 연체한 지 10년이 넘어 거의 회수가 불가능한 것들도 상당수 섞여 있다. 민법상 채권 소멸시효가 5년인데도 이처럼 오래된 부실 채권들이 버젓이 거래되고 있는 건 대부업체나 추심업체에서 편법으로 소멸시효를 중단시키거나 늘리고 있기 때문이다.

"연체한 지 5년 지난 빚은 못 갚겠다고 배 째라고 해야 해요. 5년 동안 못 갚았으면 못 갚는 거죠. 그게 소멸 시효잖아요. 지금 민법을 적용하고 있는데 신용소비자보호법을 따로 만들어야 해요. 채무자-채권자 양측을 모두 보호해야 하는 개인 간 대출의 경우 민법에 따라 인지상정으로 가야겠지만, 금융회사-개인 간 거래에서 금융회사는 절대 강자잖아요. 소멸시효 중단 요건을 더 강화하든가 못하게 해야 해요."

'빚 탕감 프로젝트'는 이처럼 헐값에 거래되는 부실채권을 매입한 뒤 모두 소각해 채무자들을 추심의 굴레에서 해방시키려는 것이다. 지난 4월 1차 소각한 부실채권 117명분 4억 7천만 원어치를 매입하는 데는 3%에도 못 미치는 1300만 원이 들었고, 최근 2차 소각한 99명분 10억 원어치 채권은 한 대부업체에 모두 기부받았다. 이들 채권의 평균 연체 기간은 10년에 이른다.

희망살림은 시민단체들과 모금파티를 열어 부실채권 매입에 쓸 500만 원을 모금한 데 이어 지난 4월부터 진행한 1차 '크라우드 펀딩'에도 120여 명이 참여해 400만 원 정도를 모았다. 현재 2차 펀딩을 진행하고 있지만 세월호 참사 등의 여파로 시민들의 참여가 기대에는 못 미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희년함께와 같은 종교단체의 결합은 단비였다.

제윤경 에듀머니 대표가 21일 서울 명동 열매나눔재단에서 열린 부채 탕감 토론회에서 채권 추심 업체의 독촉장 견본을 소개하고 있다.
 제윤경 에듀머니 대표가 21일 서울 명동 열매나눔재단에서 열린 부채 탕감 토론회에서 채권 추심 업체의 독촉장 견본을 소개하고 있다.
ⓒ 김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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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년함께는 안식년과 희년에 빚을 탕감해주는 성경 교리를 빚 탕감 운동과 결합시켰어요. 종교단체와 결합하면 빚 탕감 운동을 더 확장할 수 있어요. 작은 교회들이라도 신도를 기반으로 하고 있고, 이념적으로 가치중립적인 교회에서도 공감하는 게 확장성에 도움이 돼요.

그 다음 단계는 지방자치단체예요. 지자체들도 복지 사각지대에 있는 채무자들을 찾아서 새 출발을 지원하고 시민들이 빚에서 해방하는 걸 돕는 성과도 거둘 수 있죠. 마침 지자체가 대부업체 관리·감독 권한이 있어 소멸시효 지난 채권을 편법 추심하는 업체를 설득해 10년 넘은 채권들을 모으고 있고, 교회엔 채무자 상담센터도 만들 생각이에요."

한국금융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2013년 8월 현재 빚이 연체된 채무취약계층은 350만 명에 이르고 이 가운데 114만 명은 상환이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나타났다. 제 대표의 궁극적 목표는 이런 사람들을 모아 '채무자 협동조합'을 만드는 것이다. 2년 전에도 '빚을 갚고 싶은 사람들(빚갚사)'라는 채무자 단체를 만들었지만 채무자를 모으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채무자 협동조합은 빚을 탕감받은 채무자가 출자한 돈으로 다른 부실 채권을 매입해서 채무 조정하는 방식이에요. 채무자 재무 상태를 봐서 100% 탕감이 아니라 '채무자 우호적인' 채무 조정을 하는 거죠. 100% 소각도 채무자 자존감을 떨어뜨릴 수 있거든요. 채무자를 상담해서 갚을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형편껏 갚게 해주는 거예요."

"'돈 떼먹는 사람' 편견 바꾸려면 채무자가 직접 나서야"

결국 이번에도 채무자들의 자발적 참여가 관건이다. 하지만 지난 1차 소각한 채무자 100여 명 가운데 연락이 온 사람은 5명에 불과했고 이들도 아직 기부금을 낼 형편은 아니다. 그나마 1회성이라도 1만3천 원씩 기부하겠다는 채무자들이 늘고 있는 건 반가운 현상이다.

"대리인이 하는 건 한계가 있고 채무자가 직접 나서야 해요. 국민들 정서가 '돈 떼먹는 사람'이라고 손가락질하는 분위기에선 채권자가 더 많은 명분을 쥐고 있어요. 채무자가 나서 그동안 갚은 이자만으로 채권자들이 배불리 먹고 있고, 많은 채권자가 나를 둘러싸고 먹이사슬을 형성했다는 걸 폭로해야 구조가 바뀌죠. 자신이 자립 의도가 있다, 도망 다니는 게 아니다.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가 아니라고 얘기해야죠. 모럴 해저드는 오히려 채권 시장에서 사람을 노예화하는 채권자들에게 물어야 해요."

제 대표가 수년간 채무자 권리 회복 운동을 벌여오면서 가장 큰 벽도 금융 채무자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편견이었다. 진보 진영도 예외는 아니다.

"진보 진영에서도 개인 빚을 왜 탕감해 주냐는 인식이 있어요. 금융에 대한 박탈감이 큰 거죠. 나는 돈도 못 빌리는 데 돈을 빌렸으면 그래도 먹고 살만한 거 아니냐, 그러면 벌어서 갚아야지, 하는 건 왜곡된 생각이에요. 큰 틀에서 어떤 게 옳은지 논란이 됐으면 해요. 지금까지 일방적으로 채권단 이데올로기가 강요되고 독점되고 있었어요. 한번 뒤집어져야죠. 지금 같은 언론 환경에서 쉽지 않겠지만 채무자들이 자꾸 자신을 드러냈으면 좋겠어요."


태그:#제윤경, #빚 탕감 프로젝트, #에듀머니, #희망살림, #롤링 주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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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사회부에서 팩트체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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