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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의 퇴근 후 모습은 대략 이렇다. 영화 <호타루의 빛> 가운데 한 장면.
 언니의 퇴근 후 모습은 대략 이렇다. 영화 <호타루의 빛> 가운데 한 장면.
ⓒ 영화사 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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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취 경험이 있는 내 친구들은 가끔 된장찌개나 김치를 보면 엄마가 생각난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좀 다르다. 나에게 엄마를 생각나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맥주. 특히 캔맥주만 보면 엄마가 아련히 떠오른다.

엄마와 캔맥주. 어찌보면 잘 어울리지 않는 이 조합을 설명하기 위해선 엄마의 일과를 샅샅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언니가 취직한 이후 엄마는 마치 언니의 매니저가 된 것 같았다. 이건 말이 좋아 매니저지, 거의 하인 수준이다. 엄마의 기상시간은 오전 5시 반. 엄마가 일일이 챙겨주지 않으면 엄마의 표현으로 "드럽게 안 처먹는" 언니를 위해 늘 정성스런 아침상을 준비한다.

언니가 출근하고 나면 지난밤에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언니의 옷가지들을 치우고 빨래하는 게 엄마의 다음 일과다. 실험실에서 연구직으로 일하는 언니가 입었던 옷에는 해로운 약품이 묻었을 수도 있기 때문에 매일매일 빨아줘야 한다.

사지 멀쩡한 28살 언니는 자기가 알아서 깔끔하게 정리해주면 참 좋으련만 뱀이 허물 벗어놓은 듯 동선에 따라(!) 옷을 벗어두기 일쑤다. 샤워를 끝내고 나서도 수건은 여기저기 툭툭. 아이스크림, 과자 봉지도 쇼파나 침대 주변에 아무데나 버려둔다.

이러니 엄마의 손은 쉴 틈이 없다. 이렇게 언니의 뒤치다꺼리와 집안일을 하다 보면 어느덧 저녁. 입이 짧고 까다로운 언니를 위해 엄마는 또 언니의 퇴근시간에 맞춰 열심히 저녁식사를 준비한다. 나는 언니와 함께 20여년을 살았지만, 언니가 자신이 먹은 밥그릇을 싱크대에 갖다 놓는 꼴을 못 봤다. 그야말로 '먹튀'!

엄마에게 가장 꿀 같은 시간... 저녁 설거지 뒤에 한잔 '탁'!

매일매일 이토록 언니만 위해 사는 엄마에게 가장 꿀 같은 시간은 저녁 설거지를 끝내고 숨을 돌리며 경쾌한 '탁!' 소리와 함께 맥주 한 캔을 따는 순간이었다. 다른 술은 독하다고 입에도 못 대지만 유일하게 엄마가 마실 줄 아는 술이 맥주다.

딱 한 캔 정도만 마시고 자면 잠도 잘 오고 기분도 딱 좋다는 엄마의 총평. 가끔 땅콩이나 다른 안주도 가볍게 먹긴 했지만 대부분 엄마는 '깡맥주'를 즐겼다. 엄마는 그렇게 고단한 일과를 맥주 한 캔으로 달래는 듯했다. 

직장생활 처음에야 적응하느라 힘들어서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입사 2년차가 되어도 여전히 언니의 만행(?)은 계속됐다. 한 번은 내가 너무 화가 나서 엄마에게 큰소리를 냈다.

"아니 먹는 사람 따로 있고, 치우는 사람 따로 있나! 적어도 자기 먹은 과자 봉지나 입었던 옷가지들은 치워야 할 거 아냐. 엄마가 너무 오냐 오냐 키워서 그 모양이라고!"

"가족끼리 그런 말이 어딨어. 너도 새벽같이 나가서 돈 벌어봐. 언니는 몸도 허약해서 얼마나 힘든데…. 집에 있는 사람이 좀 더 해주고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너도 힘들면 하지 말어, 엄마가 다 할게."

얘기했다가 괜히 본전도 못 뽑았다. 나만 천하의 나쁜 동생이 된 것 같은 이 '느낌적인 느낌'. 어릴 때부터 뭐든지 잘해온 언니에게 열등감을 갖고 언니와 차별당한다고 느껴온 나는 슬슬 엄마의 이 무조건적인 헌신에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언니와 내가 집안일로 다투는 일이 잦아질수록 엄마는 티 내지 않고 더욱더 혼자서 모든 일을 도맡아 했다.

나는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으면서도 집안일엔 손 하나 까딱 안 하는 언니가 얄미웠고, 그걸 당연히 여기는 엄마도 사실 미웠다. 엄마는 단지 곱게 키운 딸내미가 새벽부터 밤까지 고된 일을 하는 게 안쓰러울 뿐이었고, 언니는 취업준비생을 가장한 백수(나)가 집에만 있으면서 집안일 좀 한다고 잔소리를 퍼붓는 걸 이해할 수 없었나보다.

'건강식품 전도사'가 된 엄마... "제발 쌀밥 좀 먹고 싶다"

엄마가 맥주를 끊은 이후, 맥주는 시원한 냉장고에서 더운 베란다 서랍장으로 쫓겨났다.
▲ 비상식량과 함께 구석에 처박힌 맥주 엄마가 맥주를 끊은 이후, 맥주는 시원한 냉장고에서 더운 베란다 서랍장으로 쫓겨났다.
ⓒ 남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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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살한테나 있을 법한 '엄마는 언니만 예뻐해' 콤플렉스를 겪으며 엄마와 냉전 아닌 냉전을 시작할 무렵, 엄마는 갱년기로 인해 찾아온 각종 잔병과 함께 고지혈증(필요 이상의 지방이 혈액 내에 쌓여 발생하는 심혈관계 질환)을 진단받았다. 원인은 바로 하루를 마무리하던 그 깡맥주. 엄마는 고깃집에 외식을 하러 가도 상추에 밥만 싸먹을 정도로 채식을 즐겼고, 그만큼 식습관엔 문제가 없었지만 습관적인 음주가 원인인 듯했다.

나 역시 '어떻게 저렇게 풀만 먹고 잘 살 수 있을까' 생각하며 엄마는 진짜 건강하다고 안심해오던 터라 결과가 충격이었다. 안타깝게도 그 후 엄마는 사막의 오아시스 같던 맥주를 끊어야만 했다. 알코올중독자는 아니었지만, 엄마에게 나름 특별한 위안이 되어주던 맥주를 끊는 일은 쉽지 않았다. 엄마에게 맥주란, 단지 마실 것 그 이상의 존재? 가끔 오미자차나 보리차로 그 빈자리를 채우려 했지만 역시나 역부족이었다.

매일 밤 마시던 맥주를 약간의 금단 현상을 잘 이겨내며 끊은 지 벌써 1년. 엄마의 건강은 한결 좋아졌지만 나의 정신건강을 해칠 만한 다른 문제가 생겼다. 고지혈증 진단 이후 건강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높아진 엄마가 식습관만으로는 부족하다며, 온갖 건강식품에 푹 빠져버린 것이다.

고지혈증에 보리가 좋다는 말에, 심어 먹는 새싹보리와 물에 타먹는 새싹보리 가루를 먹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나머지 가족들도 보리가 가득한 거친 밥을 먹고 있다. '제발 쌀밥 좀 먹고 싶다'는 아빠의 50년 전 소망과 지금 나의 소망이 일치하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이것은 정말 시작에 불과했다. 양배추와 당근, 토마토 등을 쪄서 같이 갈아 만든 해독주스가 유행할 때 엄마는 나한테도 아침마다 해독주스를 해줬다. 요상한 맛의 그 주스를 먹는 건 고역이었다. 너무 맛이 이상해서 나는 이 해독주스를 그냥 '독주스'라고 부를 정도였다.

"엄마 몸에 안 좋은 술은 내가 다 마셔 없애버리겠어 하하하"

홍삼정, 새싹보리, 도라지청, 비타민, 종합영양제 등. 매일매일 저걸 먹는 것도 정말 일이다, 일. 다른 건 몰라도 도라지청은 제발 그만 먹고 싶다. 너무 쓰다.
▲ 엄마는 건강식품 마니아 홍삼정, 새싹보리, 도라지청, 비타민, 종합영양제 등. 매일매일 저걸 먹는 것도 정말 일이다, 일. 다른 건 몰라도 도라지청은 제발 그만 먹고 싶다. 너무 쓰다.
ⓒ 남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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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 비타민이나 오메가3, 아사이베리 가루, 도라지청 등의 맛없는 건강기능식품을 수시로 먹어야 하는 것도 힘겹다. 최근엔 아줌마들 사이에서 유산균이 대세라며 엄마가 직접 유산균을 공수해와 집에서 요구르트도 만들어 먹고 있다. 이 유산균은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보통 요구르트의 10배 이상의 신맛이 난다. 건강식품은 뭐든지 맛이 없는가 보다.

맥주를 끊은 이후, 엄마는 건강식품 마스터가 되어 열심히 나에게 전도하고 있지만, 엄마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나의 건강상태는 영 엉망이다. 사실 나는 알아주는 주당이다. 예전의 엄마처럼 자주 술을 먹는 건 아니지만, 한번 마시면 죽을 때까지(!) 마시는 스타일? 아이러니하게도 엄마가 건강식품을 강요하면 할수록 내 안의 청개구리 본능은 깨어나며, 치맥(치킨과 맥주)에 대한 욕구도 상승한다.

나도 스트레스 받는 일이 있을 때마다 곧잘 맥주를 마시곤 하는데, 그때마다 엄마가 생각난다. 왠지 하루 일과에서 맥주가 없어진 엄마는 허전할 것만 같다. 그래서 자꾸 건강식품을 사들이는 건가? 아무리 그래도 정신건강엔, 잘 마신(?) 맥주 하나가 열 건강식품보다 못할 듯하다. 술 좀 마시고 알딸딸하게 집에 들어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엄마의 잔소리.

"엄마는 맥주 쪼금 먹고도 이렇게 아팠는데 넌 또 그렇게 술이 먹고 싶냐?"

그때마다 큰소리 땅땅 치며 이렇게 받아치긴 하지만, 엄마 나이쯤 되었을 때 나의 상태가 걱정되기는 한다.

"그러게나 말이야~. 이렇게 엄마 몸에 안 좋은 술은 내가 다 마셔 없애버리겠어, 우하하하하. 엄마만 건강하라구, 엄마만!"

왠지 집안일 안 하는 언니보다 내가 더 불효녀인 것 같은 느낌은 왜일까. 껄껄.


태그:#엄마, #맥주, #건강식품, #불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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