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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차례 북한 여행을 다녀온 뒤 내게는 북한에 두고 온 수양딸과 수양조카가 생겼다. 피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정을 나눈 그들이 다시 보고 싶어서, 더 많은 북한동포들과 소통하고 싶어서 다시 북한에 다녀왔다. 2013년 8월 15일부터 8월 26일까지 한 차례 그리고 9월 4일부터 13일까지 또 한 차례 북한을 여행했다. 새 연재 '재미동포 아줌마, 또 북한에 가다'를 통해 북한동포들의 지금과 북한의 여러 명소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 기자말

어젯밤의 평양 밤거리 산책은 내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내가 지금껏 봐왔던 평양의 밤거리란 차를 타고 가면서 본 대로변과 식사를 위해 찾아간 식당이나 술집 주변이 전부였다. 식당이나 술집 주변은 손님들로 꽤 번잡하다. 그러나 골목길에도 사람들이 오가고 있으리라고는 상상해 보지 못했다. 호텔의 맨 위층에 있는 회전 레스토랑에서 바라본 평양의 밤거리는 주로 큰 대로변만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평양을 '죽은 도시'라고 표현했던 게 생각난다. 예전엔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미디어를 통해 본 평양의 낮 풍경은 삭막해 보였고, 밤은 그야말로 암흑이었다. 그러나 내가 직접 걸어 다니며 본 평양의 밤은 살아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다리가 쑤시기 시작한다. 전날 밤 무리를 했나 보다. 잠깐 걷는 걸로 생각하고 구두를 신은 채 나간 게 화근이었다. 게다가 대로가 아닌 좁은 길가는 보도블록이 깨진 곳이 많아 울퉁불퉁해 걷기 힘들었다.

늘어나는 외국인 관광객

관광객들로 붐비는 호텔 로비
 관광객들로 붐비는 호텔 로비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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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에서 로비까지 걷는데도 통증이 느껴진다. 로비에 도착하니 조선국제려행사 안내원 방은미가 실습생을 데리고 소파에 앉아 있다.

"은미야, 일찍부터 나와 있네."
"안녕히 주무셨어요? 여기서 손님들과 만나 안내를 나가야 해요."

"얘, 이번 달에는 관광객이 유난히 많네. 근데 현수를 비롯해서 영길이까지 전부들 세포등판에 가 있으니 어떻게 하니?"
"올해가 조선국제려행사 60주년이 되는 해라 저희 려행사에서 주최하는 행사가 겹쳐 더합니다. 근데 일없습니다. 실습생들도 많이 나와 배우며 돕고 있습니다."

"뭐, 조선국제려행사가 생긴 지 60년이나 됐다고?"
"그라문요."
"오래됐구나. 그렇다면 60년 전부터 북에 외국 관광객들이 왔었단 말이야?"
"네. 매년 조금씩 늘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요즘은 매년 거의 배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관광안내원 수요도 따라서 늘고 있는데 다행히 많은 외국어 전공자들이 저희 회사에 지원을 해 일없습니다. 아, 저기 제가 맞고 있는 손님들이 오시네요. 저 이제 떠나요, 이모. 나중에 봬요."

왼쪽부터 실습생, 나, 방은미
 왼쪽부터 실습생, 나, 방은미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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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8월에 우리를 안내했던, 지금은 우리 둘째 수양딸인 설향이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설향이가 어렸을 적에는 관광 대학이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인기가 없었단다. 그러나 지금은 안내원 직업 인기가 높아졌다고 한다. 따라서 학생들이 관광대학 진학을 선호해 관광대학에 입학하기가 무척 힘들어졌다고 한다. 설향이도 어린 시절에 관광대학에 가 안내원이 되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설향이는 어려서 무용 선생님이었던 엄마의 손에 이끌려 오랫동안 무용을 전공했다. 설향이는 13세 당시 금강산에서 열린 '6·15 남북공동기념식' 행사에 뽑혀 춤을 췄다고 말했다. 

이 이야기를 듣던 나는 "공연까지 갈 정도였으면 대단한 춤 실력이었을 텐데, 왜 계속 춤을 추지 않았느냐"라고 물었다. 그러자 설향이는 조곤조곤 자기 이야기를 했다. 설향이는 어렸을 때 엄마가 원해서 열심히 춤을 췄는데 사실 춤보다 책 읽고 사색하기를 더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서 대학에 가기 전에 자기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게 해달라고 엄마를 설득했다. 어학에 관심이 많았던 설향이는 관광대학 영어과에 입학할 수 있었다. 

"갑자기 준비를 했을 텐데, 관광대학에 입학하기는 힘들지 않았느냐"라는 질문에 설향이는 "입학 자격 조건의 덕을 보고 관광대학에 진학했다"라고 답했다. 예술을 한 아이들은 감각이 있고 인내력과 창조력이 뛰어나 특혜를 준다는 설명이었다. 음악을 전공한 나로서는 듣던 중 반가운 소리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호텔 로비는 방은미의 말대로 외국인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김정은 제1비서를 볼 수 있을까

로비에서 방은미와 작별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우리 안내원 김 선생이 다가와 말한다.

"오늘 4·25 문화회관에서 중앙보고대회가 열리는데 가시렵니까? 혹시 가실 거면 지갑 외 모든 소지품을 방에 놓고 1시간 후에 내려오십시오."

남편이 물었다.

"중앙보고대회가 뭐요?"
"가보면 아시게 돼요, 정 선생."
"하여간 뭐든지 가보면 안대…. 작년에 우리 안내한 사람도 불꽃놀이 가면서 일언반구 안 하더니…. 카메라도 안 돼?"
"물론."

우리는 알겠다고 대답하곤 아침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향했다. 그런데 남편이 중앙보고대회에 안 가겠단다. 이번에는 내가 우겼다.

"여보, 가봅시다. 카메라를 가져오지 말라는 걸 보니 혹시 김정은 위원장이 나오는 행사가 아닐까요?"
"에이구, 당신두…. 김정은 위원장이 나오는 행사에 가면서 장소를 다 알려줘? 4·25 문화회관이라는 곳에서 한다잖아. 당신 기억 안 나? 작년에 불꽃놀이 행사 가면서 김정은 위원장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거."
"싫으면 나 혼자 갈게요."

뭐든지 자기 뜻대로만 하는 남편에게 "혼자 갈 테니 마음대로 하라"라고 말하니 자기도 가겠단다.

북한 노동당 중앙보고대회 초대장
 북한 노동당 중앙보고대회 초대장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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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5 문화회관 주차장에 도착하자 군 장교들이 금속탐지기로 하나하나 몸수색을 한다. 회관 안은 북한 주민들로 꽉 차 있다. 남성들은 양복이나 인민복 차림이고, 여성들은 한복 또는 양장 차림이다. 남녀할 것 없이 옷에 훈장을 여러 개씩 주렁주렁 달아놨다.

우리는 해외동포석으로 안내됐다. 우리의 앞줄에는 북한에서 큰 사업을 하는 재미동포 한 분이 앉아 있었다. 김정일 위원장의 장례식에 참석한 그분을 언론을 통해 본 적이 있다.

곧이어 군복 차림과 양복 차림의 사람들이 주석단이라고 불리는 연단에 등장한다. 세 줄로 된 주석단에서 내가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단 두 사람뿐이었다. 양복 차림의 김영남 최고 인민회의의장과 군복 차림의 최룡해 노동당 비서다. 김영남 의장은 2012년 불꽃놀이 때 본 적이 있었고, 최룡해 비서는 뉴스에서 많이 봐 금세 알아봤다. 최고 지도자를 제외한 북한의 수뇌부가 모인 것처럼 보인다.

김영남 의장이 보고서를 읽어 내려간다. 솔직히 나는 보고서의 내용보다는 이 행사의 분위기에 관심을 쏟았다. 한국의 언론은 주석단의 배석 위치를 보고 북한의 권력 서열을 추측한다. 나는 지금 북한의 주민들과 함께 섞여 앉아 북한의 권력 핵심들이 모인 그 주석단을 바라보고 있다. 묘한 기분을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김영남 의장이 읽은 보고서는 상당히 길었다. 지금 회상해 보니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대충 기억하기로는 '전인민과 군대가 경제강국 건설에 총력을 다하자'는 내용 같다. 주로 경제 발전과 인민생활 향상에 관한 이야기인 것으로 기억한다. 이날 김정은 위원장을 끝내 볼 수 없었다.

북한의 경제 개방을 원한다면...

아파트 단지에 있는 북한의 상점(2013년 8월 촬영 분)
 아파트 단지에 있는 북한의 상점(2013년 8월 촬영 분)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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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북한은 경제에 모든 것을 집중하는 듯하다. 만나는 주민들마다 경제에 관한 이야기를 빼놓지 않는다. 핵무장을 한 뒤 국가 안보에는 자신이 생겼는지 지금은 인민 생활 향상을 위한 경제개발에 온 힘을 쏟고 있다. 그러나 서방세계가 가하는 경제제재를 극복하고 발전을 이루자니 쉽지 않을 것이다.

서방세계는 온갖 경제제재를 통해 북한을 거의 봉쇄해놨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북한에게 개방을 요구한다. 그렇다면 북한은 폐쇄경제인 걸까? 언론의 발표에 따르면 북한의 국민 총생산은 300억 달러 정도이며 무역량은 100억 달러 정도라고 한다(대상국은 주로 중국).

이를 증명하듯 북한의 상점은 중국산 상품들로 가득 차 있다. 국내 생산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해 일어나는 현상인 것으로 보인다. 만약 봉쇄가 풀린다면 북한 경제의 해외의존도는 지금보다 훨씬 더 높아질 게 분명하다. 지금도 무역의존도가 이렇게 높은데, 이것이 폐쇄경제인지 내 초보 경제지식은 나를 혼란스럽게 한다.

개방경제란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포함한다. 그러나 서방세계는 북한에 대해 철저한 금융봉쇄를 하고 있다. 미국 시민이 북한에 투자하기 위해서는 미 국무부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허가가 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듯하다. 자유로운 은행거래를 할 수 없으니 북한에서는 신용카드도 쓸 수가 없다. 때문에 여행객들은 북한에 갈 때 현금을 소지해야 하는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다만 북한 내에서 미리 돈을 내고 현금카드를 사서 쓸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적어도 북한에게 경제를 개방을 하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미국 등 서방세계가 북한의 경제 개방을 원한다면 북한이 국제 경제에 더 활발히 참여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그리운 수양조카 방현수

왼쪽부터 평양의 수양딸 설경이와 수양조카 현수(2012년 5월 촬영 분)
 왼쪽부터 평양의 수양딸 설경이와 수양조카 현수(2012년 5월 촬영 분)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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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나는 이번에 수양조카 방현수를 만나러 북한에 왔다. 그러나 그를 만나는 것을 포기해야만 할 것 같다. 세포등판이라는 곳은 강원도 오지에 있고 가는 데 하루가 걸리기 때문이다. 출국일자가 가까이 오는 지금, 그곳에 다녀온다는 건 시간적으로 점점 불가능해진다. 게다가 무리한 요구를 해 이들을 곤란하게 만들어서도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남편에게 조용히 말을 꺼냈다.

"여보, 아무래도 현수를 만나러 세포등판에 가는 건 포기해야 할 것 같아요. 시간적으로 되지도 않고, 또 자꾸 요구를 해 이분들을 곤란하게 만드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요. 사실 지난달 관광비자로 온 우리를 설경이네 집에 가게 해준 것도 따지고 보면 큰 배려를 해준 것 같아요.

영길 아우가 한 말 생각 안 나요? 남한 출신의 해외동포가 관광객으로 북에 와서 북한 주민과 수양가족 관계를 맺고, 또 그 집을 방문한 경우는 전쟁이 끝나고 처음일 거라는 말이요. 오죽하면 설경이네 집에 가던 날 영길 아우가 '오늘은 역사적인 날'이라고 했겠어요."

성격이 불같은 남편도 수긍이 가는 듯하다. 조용히 듣고 있더니 조금은 농도가 옅어진 불평을 쏟아놓는다.

"원 참, 거기 좀 데려다 주면 안 되나? 이역만리에서 얼굴 좀 보겠다고 찾아왔는데…. 하여간 여기는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고…. 에이, 신경질 나."

"여보, 우리 그러지 말고 내년 겨울에 다시 옵시다. 당신 대동강에서 얼음낚시 해보고 싶다고 그러셨잖아요. 겨울에 와 현수 데리고 가서 얼음 깨고 낚시하세요. 오는 길에 마식령 스키장에도 가고요."

낚시 소리에 귀가 번쩍했는지 남편은 금세 풀어지는 듯 "그럴까?"라더니, 또 밖에 나가잔다. 하여튼 남편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이다.

북한 신혼부부의 혼수 비용은 얼마일까

평양역 앞
 평양역 앞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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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산책 나가기 전 대동강 맥주로 목이라도 축이잔다. 하루라도 대동강 맥주를 안 마시면 기운이 안 생긴다면서 말이다. 카페에 앉아 남편은 맥주를, 나는 강서약수를 마시고 있는데, 옆자리의 해외동포 한 분이 우리를 알아본다.

"신은미 선생 부부가 아니십니까?"
"어머, 어떻게 저희를…?"
"기행문 잘 읽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께서는 관광을 오셨나요?"
"아니요. 저는 이곳에서 나무를 심는 일을 하고 있어요. 북은 전반적으로 자연이 잘 보존돼 있는데, 마을 주변의 경우 나무를 땔감으로 쓰는 바람에 산에 나무가 없습니다. 이미 보셨으니 잘 아실 테지만요."

이분은 북한에 나무심기 운동을 하신다고 한다. 내가 북에 대해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오는 사이 이미 많은 해외동포들이 북한 동포들을 위해 각자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북에 와서 만나는 해외동포들은 하나같이 감동적인 사연을 갖고 있다. 누군가가 이분들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기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전날 밤 평양의 밤거리를 걷느라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면서도 빨리 나가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이제는 겁도 없어져 길을 잃지 않을까라는 걱정도 없다. 오히려 내가 겁 없이 행동하곤 한다. 내가 이분께 제안했다.

"선생님, 저희들은 지금부터 산책이라도 나가려는데 함께 나가시겠습니까?"
"네, 그러지요. 마침 잘 됐습니다."

평양역 앞
 평양역 앞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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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역 앞
 평양역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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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호텔을 나와 평양역 쪽으로 향했다. 우리가 역을 좋아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많은 사람들이 갖가지 사연을 품고 오가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가 여러 공항을 거쳐 이곳에 오듯이.

우리는 역 근처에 있는 한 상가에 들렀다. 이 상가에는 북한 상품이 외국 상품보다 훨씬 많이 진열돼 있었다. 입구에는 환전소가 있는데 환율은 1달러에 북한 돈 7500원 정도다. 환전소가 있는 것을 보니 이곳 상가에서는 북한 돈을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일 게다. 환율을 기억해두고 물건값을 유심히 살펴봤다.

가구점을 지나치는데 수양딸 설경이네 집 옷장과 거의 흡사해 보이는 가구가 눈에 들어온다. 얼른 들어가 가격표를 봤다. 4미터 정도 길이의 나무 옷장인데 가격표가 북한돈으로 표시돼 있다. 숫자가 너무 길다. 영이 다섯 개나 붙어 있는 일곱 자리 숫자다. 도대체 값이 얼마나 되는 가구일까. 숫자에 어두운 나는 남편에게 달러로 환산해 가격이 얼마나 되는지 물어봤다.

"여보, 몇 달러나 되나요?"
"대충 600달러 정도, 왜?"
"설경이네 집에 똑 같은 가구가 있던데, 얼마나 주고 샀나 궁금해서요."

한국 돈으로는 약 61만 원 정도. 갑자기 설경이의 한 달 월급이 궁금해졌다. 혼수를 장만하느라 얼마를 썼으며, 그 비용을 마련하느라 얼마동안 돈을 쓰지 않고 억척같이 모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와중에 남편은 낚시점에 들어가 나오질 않는다. 동행한 해외동포분께 무척 미안해 남편을 끌고 나오다시피 데리고 나왔다.

평양역에서 생각난 '뽕짝'

평양역
 평양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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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가를 나온 우리는 지하도를 건너 평양역에 이르렀다. 역시 기차역은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곳이다. 현대 한국의 기차역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출장 다녀온 남편을 마중하기 위해 애들을 데리고 나온 부인, 갈아탈 기차를 기다리는 듯 배낭을 내려놓고 앉아있는 여인, 임지로 가는지 군대 배낭(더플백, Duffel bag)을 깔고 앉아 오가는 자동차 행렬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병사들...

평양역 안으로 들어가 봤다. 지금껏 이 앞을 여러 번 지나쳤지만, 역 안으로 들어와 보기는 처음이다. 아! 어쩌면 이렇게도 내 어린 시절 봤던 고향 대구역 혹은 서울역과 흡사하단 말인가!

역 안에 들어서니 두 노래가 떠오른다. 일본풍의 '한국 엔카' <대전 부루스>와 <서울이여 안녕>이다. 나는 고전 음악을 전공해 '뽕짝'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이 노래가 뇌리에 스친다. 나 역시 식민지 시절을 겪은 조국의 정서에서 벗어나지 못한 '해방 후 세대'인 걸까. 주옥같은 가곡 대신 가련한 '뽕짝'이 가슴을 두드리다니.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이별의 말~도 없이. 떠나~가는 새벽열차, 대전(평양)발 영시 오~십분…."
"안녕, 안~녕, 서울(평양)이여 안~녕. 그~리~운 님찿아 바~다건너 천~리길. 쌓이고 쌓인 회포 풀려고 왔는데, 님의 마음 변하고 나홀로 돌아가네, 그래~도 님 계시~인곳 서울(평양)하늘 바라보~며 안~녕 안~녕, 서울(평양)이~여 안녕…."

평양역 앞 스낵코너... '침이 고인다'

평양역 앞 스낵코너
 평양역 앞 스낵코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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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역 앞 스낵코너
 평양역 앞 스낵코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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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역 앞 스낵코너
 평양역 앞 스낵코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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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역을 벗어나 계속 걸었다. 그곳에는 열차 이용객들을 위한 스낵코너가 있다. 빵, 만두, 짜장면, 족발, 가재미식해밥, 닭튀김, 송이버섯볶음, 아이스크림, 오리구이, 청어튀김, 소고기 불고기, 햄버거, 오이소박이, 계란졸임 등등 온갖 게 다 있다.

스낵코너에서 맛있게 음식을 먹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섞여 앉고 싶은 충동이 말할 수 없다. 우리와 동행한 해외동포분에게 스낵코너에 가자고 권하니 "점심을 늦게 먹어 생각이 없다"고 한다. 아! 먹고 싶어 미칠 지경이다. 조선국제려행사에게 충고해줘야겠다. 꼭 한 번쯤은 외국인 관광객들을 이곳에 데려오라고.

긴장 속에 복권 당첨을 확인하는 한 여인
 긴장 속에 복권 당첨을 확인하는 한 여인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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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낵코너를 지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곤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복권이 있는 게 아닌가.

"아니, 북한 땅에도 복권이?"

한 여인이 긴장을 늦추지 않고 복권을 꼭 쥔 채 당첨을 확인하고 있었다.


태그:#북한, #평양, #로또,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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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음대 졸업. 미국 미네소타 주립대 음악박사. 전직 성악교수 이며 크리스찬 입니다. 국적은 미국이며 현재 켈리포니아에 살고 있습니다. 2011년 10월 첫 북한여행 이후 모두 9차례에 걸쳐 약 120여 일간 북한 전역을 여행하며 느끼고 경험한 것들 그리고 북한여행 중 찍은 수만 장의 사진들을 오마이뉴스와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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