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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기 시대를 상징하는 유물 중 하나인 빗살무늬토기(왼쪽 사진)와 가락바퀴(대구박물관 전시물 촬영 사진)
 신석기 시대를 상징하는 유물 중 하나인 빗살무늬토기(왼쪽 사진)와 가락바퀴(대구박물관 전시물 촬영 사진)
ⓒ 대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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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석기인들은 기원전 약 70만년 전부터 기원전 8천년 전 사이에는 커다란 돌에서 떼어낸 날카로운 돌조각을 도구로 썼다. 그렇게 뗀석기를 사용한 기간을 구석기 시대라 한다. 그 이후부터 기원전 1500년 전 사이에는 돌을 갈아서 더욱 정밀한 도구를 만들어서 썼다. 그렇게 간석기를 사용한 기간을 신석기 시대라 한다.

지구 전체로는 약 4만 년 전에 신석기인이 나타났다. 현생(現生) 인류의 조상으로 여겨지는 슬기슬기인간(Homo sapiens sapiens)이 출현한 것이다. 이들은 떠돌아다니면서 먹을거리를 구하는 구석기인들의 생활에서 탈피, 바위그늘이나 동굴을 벗어나 움집에 살았다.

신석기인들의 집인 움집(사진은 경남 김해 봉황대에 설치되어 있는 복원물을 찍은 것임)
 신석기인들의 집인 움집(사진은 경남 김해 봉황대에 설치되어 있는 복원물을 찍은 것임)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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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최초의 인공 주거는 움집

따라서 움집은 인류가 만든 최초의 인공 주거이다. 신석기인들은 땅을 수직으로 구멍(穴)처럼 판 후 그 위에 더벅머리(豎) 모양의 지붕을 씌워 집으로 사용했다. 그 모양 때문에 움집은 흔히 수혈(竪穴)주거라 부른다. 일정 깊이 이상의 땅 속은 온도 변화가 적어 추위를 견디기 쉽고, 건물의 높이를 낮추어 거센 바람을 버텨낼 수 있다.

신석기인들이 떠돌이 생활을 뛰어넘어 움집에서 정착 생활을 했다는 말은 그들이 농사를 지었다는 뜻이다. 아직 벼농사까지 나아가지 못한 채 조 중심의 밭농사였지만, 농경 사회의 시작은 주워 먹던 구석기 때와는 차원이 다른 인류 생활의 혁명이었다. 그래서 이를 '신석기 혁명'이라 부른다. 신석기인들이 사용한 농기구는 돌괭이, 돌삽, 돌보습, 돌낫 등이었다.

이제 신석기인들은 많은 먹을거리를 가지게 되었다. 그 결과 먹고 남은 것을 저장할 그릇이 필요했다. 그들은 빗살무늬토기를 창조했다. 주로 물가에서 조개도 캐먹으며 농사를 지었으므로 신석기인들은 흙이나 모래에 꽂아두기 좋게 토기 밑을 뾰족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의 간석기는 돌을 갈아 바늘을 만들고, 실 뽑는 가락바퀴를 만들어 옷을 제조해내는 놀라운 수준이었다. 

대구 서변동 선사유적 전시관의 입구(위 사진)와 내부 전시물 일부
 대구 서변동 선사유적 전시관의 입구(위 사진)와 내부 전시물 일부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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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드문 신석기 전시관이 서변동에 있다

1998년 10월 15일부터 2000년 2월 29일까지 17개월에 걸쳐 대구 서변동 일대에서 빗살무늬토기 등 신석기 유물이 발굴되었다. 그 발굴 이전까지는 대구에 석기인들이 거주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져 왔다. 즉, 서변동 신석기 유물 대량 발굴은 대구의 역사를 바꾼 사건이었다.

그 후 서변동 1724-1 유니버시아드 레포츠센터 1층에는 '대구 서변동 선사유적 전시관'이 설치되었다.

전시관 내부에는 "이곳에서는 대구 지역 처음으로 신석기 시대의 유물이 많이 발굴되어 대구의 역사를 (8천 년 전부터 대구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으로) 다시 쓰는 계기가 되었다"라는 글이 게시되어 있다. 서변동 신석기 유물 출토 이전까지는 대구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때를 청동기 시대부터로 알았기 때문이다.

물론 출토된 유물 진품은 대구박물관을 찾아야 볼 수 있다. 구석기 유적 답사를 하기 이전에 이미 이곳저곳 박물관을 답사했으므로 오늘은 서변동선사유적전시관을 찾을 일이다. 물론 대구박물관, 경주박물관, 상주박물관, 대가야박물관, 안동 마애선사유적전시관 등 인근의 박물관을 다시 들러도 좋다.

70만 년이나 되는 석기 시대 여행인데 어찌 박물관 한번 들렀다고 해서 "다 보았다"면서 자만할 것인가?

서변동'선사'유적전시관의 '선사'의 의미
선사(先史)와 원시(原始)는 다르다. 선사 시대는 역사(史)를 기록하기 이전(先) 시대를 말하고, 원시 시대는 사유재산과 계급이 발생하지 않았던 석기 시대를 뜻한다. 즉, 원시공동체사회가 아닌 청동기 시대라 하더라도 그 부족이 역사를 기록하지 않았다면 선사 시대로 분류된다. 대구 서변동에서 신석기 유물이 대거 출토된 것을 기념하여 세워진 전시관에 '대구 서변동 선사유적 전시관'이라는 명칭을 붙인 것도 그 때문이다. 석기 시대의 유물이 출토되었고, 그 당시 역사를 기록하지 않았으므로 '선사유적 전시관'이라는 이름을 쓴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는 기원전 91년에 편찬된 사마천의 <사기>에 처음 기록된다. 물론 고조선에 대한 기록이다.

덧붙이는 글 | 국립대구박물관이 2011년에 발간한 <국립 대구박물관>(35,000원)과 국립경주박물관이 2009년에 발간한 <국립경주박물관>(30,000원)을 집에 한 권 비치하면 아주 좋을 것입니다. 삼국 시대 이후의 문화유산과는 달리 그 이전의 것들은 책 없이는 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태그:#신석기 혁명, #서변동선사유적전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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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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