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전영화의 역사에 길이 남을 프랭클린 J. 샤프너의 그 유명한 영화 <혹성탈출>이 만들어진 이래 벌써 마흔하고도 여섯차례의 겨울이 지났다. 그동안 본편의 시리즈는 5편씩이나 제작되었고 2001년에는 야심에 찬 팀 버튼에 의해 새로운 <혹성탈출>이 만들어졌지만 모두 원작이 이뤄낸 성취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이어쓰기는 부담스럽고 다시쓰기도 만만치 않은 막막한 시간이 흘렀다. 2011년 루퍼트 와이어트의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이 나오기까지는.

새로운 영화는 원작의 이후를 풀어나가는 속편도, 원작을 다시쓰는 리메이크도 아니었다. 프리퀄이었다. 프리퀄이란 시간상으로 원작 이전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속편을 뜻하는 용어로 <배트맨 비긴즈>,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의 사례에서처럼 최근 몇 년 간 할리우드에서 속편제작의 스타일로 유행해온 흐름이었다. 새로운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도 이런 흐름 속에서 탄생했다.

프랜클린 J. 샤프너의 <혹성탈출>이 20세기 지구에서 출발해 다시 2000년 후 지구에 불시착한 이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므로 어떻게 지구가 유인원들의 행성이 되었는지를 그려내는 루퍼트 와이어트의 <혹성탈출>은 원작의 프리퀄이자 새로운 시리즈의 시작점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혹성탈출> 1편인 <진화의 시작>이 프리퀄 시리즈를 이끌어갈 캐릭터 시저의 탄생을 다뤘다면 2편인 <반격의 서막>은 시저가 다른 유인원들을 이끌며 이룩한 유인원 문명이 치명적 전염병으로부터 살아남은 인류의 생존자들과 충돌하게 되는 과정을 그려낸다.

문명을 이뤄낸 유인원과 대재앙 속 살아남은 인간


<반격의 서막>은 인간들의 도시에서 탈출한 이래 이제는 어엿한 문명사회를 이뤄 살아가는 유인원들의 대대적인 사냥장면으로부터 시작한다. 샌프란시스코 인근의 숲에 터를 잡은지 10년, 무리의 지도자인 시저는 아내 코르넬리아로부터 아들인 푸른눈을 얻은 믿음직한 가장이 되어 있다. 여전히 강하고 현명한 리더십으로 무리를 이끄는 그의 곁에는 전편에서도 등장했던 코바, 모리스, 로켓 등이 자리를 지킨다.

시저를 비롯한 유인원사회의 지도자들은 젊은세대에게 '유인원은 유인원을 죽이지 않는다', '유인원은 뭉치면 강하다' 등의 도덕규범을 가르치고 사냥과 건축 등의 분야에서 나름의 성취를 이뤄내며 문명의 발전을 거듭한다. 그러나 평화롭고 활기차게 살아가던 유인원들과는 달리 치명적인 바이러스로부터 살아남은 극소수의 인간들은 파괴된 도시에 모여 문명을 재건하기 위해 처절한 사투를 벌이는 중이다. 지난 10년 동안 접촉이 없었던 두 종족은 인간이 전기를 공급받기 위해 숲 속에 위치한 수력발전소로 향하면서 본격적으로 충돌한다.

유인원과 인간을 잇는 유일한 끈, 시저


영화는 지속적으로 유인원과 인간의 두 문명이 충돌할 수 있다는 위기감을 조성함으로써 극에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평화와 전기, 서로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서로를 믿어야 하지만 좀처럼 서로를 믿기 어려운 두 종족의 상황은 이런 설정에 설득력을 부여한다. 협력의 역사가 없을 뿐 아니라 서로에 대해 무지한 두 종족을 이어주는 유일한 끈은 시저라는 유인원 지도자의 존재다.

전편인 <진화의 시작>에서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인간들에 의해 길러진 시저는 다른 유인원들과는 달리 인간들에 적대적이지만은 않다. 그런 시저와 수력발전소를 가동시키기 위해 숲으로 들어간 말콤의 신뢰는 두 종족 간에 이어진 유일한 끈이라 할 수 있다.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 위태로웠던 신뢰의 끈이 마침내 지켜지고 인간들이 살고있는 도시에 전력이 공급된 바로 그 때 영화의 기류는 급변한다.

끈은 마침내 끊어지고

여기까지의 흐름이 유인원과 인간이 이뤄내는 신뢰의 탄생과 그 과정에서 보여진 시저의 지도력이었다면 이후는 새로운 지도자 코바의 파괴적인 리더십과 문명의 충돌이 주를 이룬다. 인간에 의해 실험대상으로 쓰였던 코바는 시저와는 달리 인간을 증오하고 믿지 않는다. 그는 시저가 말콤을 도와 수력발전소의 수리를 도울 때 일이 틀어질 것에 대비해 무기를 점검하는 인간들을 염탐하고 그들에 대한 자신의 분노를 숨기지 않는다. 코바는 유인원들의 지도자가 인간에게 협력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며 마침내 사랑했던 시저를 쏘아 떨어뜨리기에 이른다.

시저와 코바는 모두 유인원에게 애정을 갖고 있는 캐릭터다. 하지만 그들이 인간과 만났을 때 보인 행동은 전혀 달랐다. 시저는 유인원들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인간과의 공존을 선택했고 그 공존을 위해 인간을 신뢰하고 협력했다.

하지만 코바는 달랐다. 그는 인간을 신뢰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인간을 염탐했고 그들이 자신들을 습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분노하여 전쟁을 일으킨다. 이러한 차이는 얼핏 인간을 신뢰한 시저는 현명했고 불신한 코바가 어리석었기 때문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코바의 잘못은 인간을 신뢰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분노에 삼켜진 나머지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한 데 있기 때문이다.

유인원과 인간은 얼마나 닮았는가

영화는 인간과 유인원이 얼마나 다른지보다는 얼마나 같은지에 대해 그려낸다. 말콤과 시저의 신뢰는 인간세계의 그것과 같고 드레퓌스와 코바의 불신 역시 인간세계의 것과 다르지 않다. 자신들은 인간과 다르다며 유인원이 이룩한 문명이 정작 인간들이 밟아온 걸음을 그대로 답습할 때 우리는 인간과 유인원이 얼마나 같은지를 새삼 깨닫는다. 시저에게서 권력을 찬탈하고 그것도 모자라 스스로 유인원 세계의 규범을 깨부수던 코바의 모습에서, 두려움 속에서 그의 폭압에 저항하지 못하는 유인원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다.

유인원과 인간이 다르지 않으니 영화는 결국 문명의 대비가 아닌 캐릭터의 이야기가 된다. 시저와 코바, 말콤과 드레퓌스. 이 영화가 가진 미덕 가운데 하나는 주요 캐릭터 모두를 선과 악으로 단순화시키지 않고 설득력있게 표현해냈다는 점에 있다. 코바의 불신과 폭압은 그가 인간에 대해 가지고 있는 분노를 감안한다면 충분히 이해가 되는 부분이고 인간에게 우호적인 시저를 보며 그가 느끼는 감정선은 관객 일반이 자연스레 따라갈 수 있는 정도다. 심지어 몇몇 캐릭터는 영화의 흐름에 따라 성격이 변하는 입체적인 인물로 설정되어 이야기를 더욱 풍성하게까지 한다.

유인원에게서 진정한 리더를 보다

영화의 서사는 단순하다. 시저와 코바, 그리고 시저의 아들 푸른눈의 관계는 얼핏 <라이언 킹>의 무파사와 스카, 심바의 관계를 떠올리게 하며 시저와 말콤의 관계는 <아바타>의 나비족과 제이크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두 영화를 적당히 버무려놓은 듯한 설정이지만 조잡하게 느껴지지 않는 건 오로지 캐릭터의 힘이며 그 중심에서 가장 빛나는 인물은 역시 시저다.

가슴속에 유인원과 인간에 대한 애정을 품고서 아무리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진중하고 현명한 결단을 내리는 그의 모습은 관객들을 절로 숙연하게 한다. 약자에게 먼저 손을 내밀고 옳다고 믿는 바를 실천하기 위해 기꺼이 스스로를 규범에 종속시키는 그의 모습은 이 시대에 부재한 진정한 리더의 상을 만난 듯한 느낌마저 불러일으킨다.

어쩌면 이건 정말로 리더에 대한 영화일지도 모른다. 어떠한 협력의 역사도 없는 상황에서 작은 신뢰를 통해 문명의 공존을 이룩하려는 시저의 원대한 구상을 바라보자면 우리에게 오랫동안 잊혀졌던 위대한 리더의 행적을 보는 듯 가슴 한 켠이 뿌듯하게 차오른다.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있다고 믿고 믿는 바를 행했던 시저의 행보는 현실만을 바라보다 스스로를 파괴했던 코바와 드레퓌스, 그리고 그들과 다르지 않은 나의 비좁은 마음에 오랫동안 잊히지 않을 파문을 남겼다.

극장을 나서 집까지 오는 내내 수십차례나 시저가 말한 "Trust"를 되뇌였던 건 아마도 그 때문이었으리라. 어쩌면 진정한 리더라는 건 스스로의 꿈을 다른 이의 꿈으로 전이시킬 수 있는 그런 사람을 가리키는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