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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가 이렇게 '바닥'을 헤맬 때가 있었을까. 진보 진영에게도 '전성기'는 있었다. 2004년 민주노동당은 13%의 정당 지지율을 얻고 있었다. 국회의원도 10명이나 배출했다. 2012년 총선 때도 통합진보당(진보당) 지지율은 10%를 넘었다. 하지만 지금 진보당과 정의당의 정당지지율은 다 합해 봐야 고작 6%에 불과하다.(7월 첫째 주 한국갤럽 여론조사 참조)

우리 사회에서 진보는 불필요한가. 그렇지 않다. 갈수록 확대되는 비정규직화와 공공부문 영리화는 한국 사회의 구조적인 시스템을 흔드는 문제들이다.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 등 거대 양당은 약속이나 한 듯이 오른쪽 깜박이를 켠 채 달리고 있다. 진보의 필요성이나 중요성은 여전히 유효하다. 지난 6·4 지방선거에서 탄생한 13명의 진보교육감은 그 방증이다.

그런데도 진보는 지리멸렬하다. 진보를 향한 국민들의 시선은 냉소 그 자체다. 진보진영의 많은 활동가들은 돈 안 되는 활동에 매진하면서 개인을 희생하는 삶을 산다. 하지만 상당수 시민들은 진보좌파가 '머리'로만 생각하고 '입'만 살아 있다고 조롱한다. 왜 이렇게 돼버렸을까. 끝없는 나락으로 추락한 진보에게 출구는 있을까. 있다면 그것은 어떤 것일까. 이 책 <위기의 진보정당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짚어보고 있는 문제들이다.

책은 부산 지역 진보정당 평당원 4인의 토론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이들은 각각 노동당(남종석), 녹색당(최희철), 정의당(남종석, 이광수)에 가입해 있다. 모두 탈당의 경험을 겪었다고 한다.

모임을 주도한 부산외국어대 이광수 교수(정의당 당원)는 이들 네 명의 탈당·입당의 역사를 통합과 분열, 갈등이라는 진보정당의 역사에 빗댄다. 토론은 그 역사를 있는 그대로 날것의 상태로 살펴보자는 취지에서 마련되었다고 한다. 세 방향으로 진행된 토론 주제는 그대로 이 책의 줄기가 되었다. 자주파(NL), 평등파(PD), 진보정치의 미래 등이 그것이다.

익히 알려진 대로 자주파의 최대 정파는 이석기 진보당 의원 등이 속해 있는 경기동부연합이다. 그 핵심 구성원들은 주사파다. 이 책에서는 이들의 이념적 지향보다는 정치적 행태를 분석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자주파를 애증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들 네 명의 진보정당 평당원들은 자주파를 어떻게 보았을까.

우리는 자주파가 집단적 성찰을 거부하는 조직문화를 갖고 있으며, 대의의 정당성(반제국주의, 통일 등)으로 모든 활동을 정당화하는 독특한 전통을 지닌 조직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자주파의 역설은 '민주주의 문화에 전혀 익숙하지 않은 집단이 민주주의를 위해 가장 헌신적으로 투쟁하는 조직'이 되었다는 점이다. (22쪽)

이 책에는 발로 뛰는 자주파의 헌신성과 소명의식(?)을 보여주는 의미심장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한 진보 조직에 피디 쪽 사람이 100만 원을 받으면서 혼자 실무자로 일하고 있다. 어느 날 늘어난 업무 때문에 엔엘 쪽에서 실무자를 한 명 더 쓰자는 의견을 낸다.

다음 날 엔엘 쪽에서 사람을 데려온다. 처음에는 돈도 받지 않고 헌신적으로 묵묵히 일한다. 이에 부담을 느낀 피디 쪽 실무자가 급여를 반으로 나눈다. 결국 피디 쪽 실무자는 못 견디고 그만둔다. 자주파가 자신들만의 단단한 결속력으로 자기 정파의 세력을 불리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음을 보여주는 예화다.

이 책에 따르면 자주파와 평등파의 대립은 '한반도 리스크'에 대한 관점의 차이로부터 비롯된 면이 크다. 피디가 한반도 리스크를 지나치게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면 반대로 엔엘은 과도하게 본다는 점이다. 이런 차이 자체가 문제가 될 수는 없겠다. 대중정치조직에서 정세 판단을 서로 다르게 하는 정파간 갈등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겠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록 '말'로만 했을지언정 '압력밥솥 폭탄'이니 '전화국 타격'이니 하는 식으로 시대착오적인 '한반도 전쟁 시나리오'를 운위한 '이석기 그룹'은 일반 국민의 정서와 너무 동떨어진 게 아닐까. 이석기 내란예비음모 사건이, 그 법적 다툼의 문제를 떠나 진보 진영 전체가 도매금으로 매도당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음을 부인하기 힘들다고 보는 이유다.

평등파는 '비자주파 진보세력(정당과 사회운동 진영)으로 정리된다. 이념적으로 그 가장 오른쪽에 있는 진보적 자유주의자들과 사민주의자, 가장 왼쪽에 있는 사회주의자들까지가 두루 포함된다. 이 책에서는 최근에 주목받고 있는 녹색당도 범평등파로 분류한다.

토론자들은 그들 각자가 속해 있는 평등파 정당, 곧 정의당·노동당·녹색당 등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비판을 쏟아낸다. 진보적 자유주의자와 사민주의자 등이 연합한 정의당은 '과정 중의 정당'으로 규정된다. 독자적 정체성을 확립한 정당이 아니라 과도기적으로 존재하므로 경우에 따라 오른쪽이나 왼쪽 그 어디로도 갈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정의당은 자본주의 내 개혁을 주장하지만 사실상 자본주의와 타협했다는 비판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다고 지적한다.

노동당은 내부의 반정치주의 문화, 근본주의, 정치적 역량의 부족으로 인해 당세가 점차 약화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노동당이 내세우고 있는 사회주의적 목표 또한 말만 화려할 뿐 구체적인 실행 전략이 부족해 공허한 측면이 많다고 꼬집는다. 근본주의적 관점을 견지하는 녹색당에 대해서는 정치적 경험이 거의 없는 '순진무구한 세력'으로 평가한다.

진보정당들의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한 토론자의 말마따나 정파 문제가 심각해 보인다. 거듭 말하지만 정파간 대립 자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절대악이 아니라는 말이다. 문제는 가령 갑 정파가 세력을 장악하면 을 정파가 반대하고, 을 정파가 세력을 장악하면 갑 정파가 반대하는 정파 패권주의다. 이런 반민주의적인 태도가 진보진영 내에 두루 퍼져 있다는 게 심각성을 더한다.

진보세력이 하는 활동들이 조직을 통한 '정치'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운동'을 위한 것인지 불분명하다는 점도 짚어봐야 할 대목이다. 그런 점에서 사회운동을 통해 정치 쟁점을 만들어 가는 일과 정당의 정책을 생산하는 일이 분담되어야 한다는 이광수의 지적은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운동과 정치가 별개로 가서는 안 되겠지만, 둘이 뒤섞이면 현실에서 힘을 발휘하기 힘들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보정치의 미래는 어떻게 펼쳐가야 할까. 네 명의 토론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지금처럼 진보좌파가 갈라진 현실에서는 미래가 없다는 것, 어떤 형태로든 진보는 재구성되어야 한다는 점에 합의한다.

이들이 살핀 진보 재구성의 경로는 세 가지다. '빅 텐트론', 자주파와의 재통합, 노동당·녹색당·정의당과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제 세력의 통합이 그것이다.

빅 텐트론은 진보 진영이 보수야당에 들어가 좌파블록을 형성하는 길이다. 진보좌파가 안고 있는 현실적인 힘의 한계를 인정하고, 야당에 들어가 생존을 모색하고 미래를 설계하자는 전략인 셈이다. 네 명의 토론자들은 몇몇 스타 정치인의 성공 외에 빅 텐트론은 다른 가능성이 없다고 일축한다.

다음은 자주파와의 재통합. 토론자들은 자주파의 핵심인 주사파가 당분간 변화할 가능성이 없다고 본다. 자주파와 정당 통합을 하려면 자주파가 경기동부연합과 분리하거나, 그간의 조직문화에 대한 깊은 성찰과 자기비판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조건을 강조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자주파는 연대 세력은 되겠지만 연합 세력은 될 수 없다며 일정하게 선을 긋는다.

마지막은 노동당·녹색당·정의당·민주노총 세력의 통합이다. 이와 관련해 토론자들은 통합의 구체적인 방법론이나 형식을 세세히 논의하지는 않는다. 다만 녹색당 내부에서 세력 형성이 필요하다는 현실적인 판단이 등장하고 있는 점, 노동당 내부에 새로운 전환을 모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존재하는 점 등을 통합의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요소들로 언급한다.

토론자들의 마지막 발언은 '뱀같이 교활하게, 그러나 인간을 잃지 않는'이라는 소제목으로 묶여 있다. 진보운동의 대의성과 정치의 현실주의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잃지 말아야 한다는 말로 들린다. 구체적으로 어떤 말들일까.

정의당원 이광수는 통합진보당을 향해 "너희들 당 해체하고, 조직 다 포기하고 뿔뿔이 흩어져 제3지대에서 다시 만나 함께 하자"라는 말을 꼭 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팬덤 현상', 당내 민주주의의 문제, 무조건 승리, 정파 패권주의 등을 되돌아볼 것을 주문한다.

또 다른 정의당원인 이창우는 '사람이 먼저다'라는 슬로건을 언급하면서 패러다임의 완전한 개조를 강조한다. 그는 운동과 정당 활동을 구별한다. 진보정당이 권력의지를 갖고 지지자들의 이해와 요구를 정책화하고, 공직 후보를 발굴해 육성함으로써 표를 모으는 일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가 아니라 운동에 몰두하는 진보세력이 눈여겨보아야 하는 대목이다.

노동당원 남종석은 진보정치의 재구성과 함께 사회운동의 복원을 현실적인 과제로 꼽는다. 민주노총이 제대로 서고, 노동자운동이 대중운동의 중심으로 서면서 사회운동의 힘이 확대될 때 진보정치가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몇몇 활동가 중심으로 돌아가는 제 진보조직 전체가 귀담아들어야 하는 말이 아닐까.

녹색당원 최희철은 패러다임의 변환을 통한 새로움을 강조한다. 그는 진보정치가 신비주의도 아니고 누군가의 희생만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현실을 냉철하게 분석하고 긍정적으로 보는 '정치적 습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주가에서 '바닥'은 '반등'을 함의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진보정당의 현주소가 딱 그런 상황이 아닐까. '바닥'이라지만 마냥 절망할 수준만도 아니다. 지난 6·4지방선거 당시 진보 계열에 속한 4개 정당(진보당·정의당·노동당·녹색당)의 득표율은 10.05퍼센트였다. 이는 통합진보당이 국회의원 13명을 배출한 2012년 19대 총선 당시 진보정당 득표율 11.03퍼센트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수치다.

물론 진보정당의 반등이 저절로 이루어질 리는 없다. 뼈를 깎는 자기 성찰과 혁신, 앎을 실천하고 더 나은 실천을 위해 더 나은 앎을 추구하는 끊임없는 배움의 자세 등이 있어야 할 것이다. '머리'나 '입'으로만 하는 진보는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 진보좌파들의 바지런한 '발'이야말로 일반 유권자들이 진보정당을 찍어야 할 가장 강력한 동기를 제공해 줄 것이다.

<위기의 진보정당 무엇을 할 것인가>(이광수·남종석·이창우·최희철 지음 / 앨피 / 2014. 7. 15. / 274쪽 / 13,800원)

덧붙이는 글 |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위기의 진보정당 무엇을 할 것인가 - 부산 지역 진보정당 평당원 4인의 작은 목소리

이광수.이창우.남종석 외 지음, 앨피(2014)


태그:#<위기의 진보정당 무엇을 할 것인가>, #이광수, 남종석, 이창우, 최희철 지음, #앨피, #진보의 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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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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