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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1. 고려시대의 사립학교

충이 후진들을 불러 모아서 가르치기를 부지런히 하니, 여러 학생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드디어 낙성(樂聖)·대중(大中)·성명(誠明)·경업(敬業)·조도(造道)·솔성(率性)·진덕(進德)·대화(大和)·대빙(待聘)이라는 9재(齋)로 나누었는데, 시중최공도(侍中崔公徒)라고 일렀으며, 무릇 과거를 보려는 자는 반드시 먼저 그 도(徒)에 들어가서 배웠다. 
- <고려사절요, 문종 22년, 1068년>

고려시대 문인 최충(崔沖)에 대한 기록이다. 최충은 1055년 재상에서 물러난 뒤 자신의 집에서 후학을 양성하기 시작한다. 당대 최고의 유학자였던 최충이 학당을 운영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전국 각지에서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결국 학당을 9개의 반(9재)으로 나누어 운영할 만큼 최충의 학당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고려시대 사립학교의 효시인 문헌공도는 이렇게 탄생하였다.

당시 국가에서는 고등교육을 위해 국자감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립학교인 문헌공도를 졸업한 학생들이 과거시험에서 더 우수한 성적을 거두자, 학생들이 국자감을 기피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러한 문헌공도의 성과에 힘입어 여러 유학자들은 제각기 사립학교를 열어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그 중 최충의 문헌공도를 포함한 11개의 유명한 사립학교를 십이공도(十二公徒)라 불렀다.

십이공도는 과거시험을 위한 교육에 집중하였다. 특히 문헌공도는 여름철에 과거시험 합격자를 강사로 삼아 하과(夏課)를 실시하거나 각촉부시(刻燭賦詩)라 하여 촛불에 눈금을 그어놓고 그곳까지 초가 타들어갈 동안 글을 짓는 일종의 모의고사도 실시하였다.

국가의 입장에서 이러한 십이공도는 골치 덩어리였다. 국자감(훗날 성균관)에 입학해야 할 우수한 학생들이 모두 사립학교인 십이공도에 입학하였기 때문이다. 당시에 국자감이 맞닥뜨린 위기는 심각한 수준이였다. 급기야 국자감 폐지를 주장하기에 이른다.

윤달에 재상 소태보(邵台輔) 등이 아뢰기를, "국학(國學)에서 선비를 양성하는 데에 소용되는 경비가 적지 않아서 백성에게 폐가 되며, 또 우리나라에서는 중국의 법대로 시행하기는 어려우니 혁파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답하지 않았다.
- <고려사절요, 숙종 7년, 1102년>

고려의 왕들은 십이공도로 인해 유명무실해진 국자감을 개선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하였다. 숙종은 국자감에 서적포(도서관)를, 예종은 양현고(장학 재단)와 보문각(학문 연구소)을 설치하였다. 인종은 국자감의 학칙을 개정하여 국자감의 진흥을 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립학교는 날로 번창하였다. 결국 십이공도는 공양왕 때 국가교육의 진흥을 위해 모두 폐쇄된다.

십이공도는 고려시대 교육에 있어서 국자감의 발전을 유도하였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으나, 심각한 부작용도 낳았다. 십이공도는 고려의 수도인 개성에 있었는데, 십이공도를 졸업해 과거에 급제한 학생들이 일종의 '파벌'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요 관직을 차지하여 권력을 장악하고, 음서 제도의 특전으로 막대한 토지를 소유하여 권문세족이 되었다. 이후 권문세족은 신분을 유지하기 위하여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어 고려를 엘리트 중심 사회로 만들어 나갔다.

#장면2. 대한민국의 자율형 사립고

'특권학교 폐지·일반학교 살리기 서울 공대위' 소속 회원들이 2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시교육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공교육의 정상화를 촉구하며 서울에 있는 25개 자사고 지정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 "빈부격차에 따른 교육 차별 반대. 자사고 폐지하라" '특권학교 폐지·일반학교 살리기 서울 공대위' 소속 회원들이 2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시교육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공교육의 정상화를 촉구하며 서울에 있는 25개 자사고 지정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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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되풀이 된다고 한다. 1000년이 지난 지금도 바뀐 것이 없다. 2010년 교육과정 다양화와 수월성 교육을 근거로 문을 연 자율형 사립고에서 고려시대의 십이공도가 보이는 건 왜일까. 십이공도로 인해 쇠퇴한 국자감과 같이, 자사고가 문을 연 이후 일반고 슬럼화가  급격하게 진행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관련기사: '깡패' 자사고 우수학생 독점 '슬럼화' 일반고 패배감 젖어)

자사고에서 상위권 학생들을 휩쓸어 가며, 일반고는 공부하지 않는 학교라는 일종의 낙인이 찍혀진 셈이다. 이러한 낙인이 학생들의 학업에 대한 태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뻔하다. 뿐만아니라, 자사고의 우선선발권이 약화된다 해더라도 일반고에 비해 현저히 높은 등록금으로 인해 자사고는, '잘사는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 '돈 많은 학교'의 이미지를 갖게 될 것이다. 자연히 일반고는 '돈 없는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라는 인식이 생겨날 것이고.

자율형 사립고의 폐단은 일반고의 슬럼화 현상뿐만이 아니다. 고려의 십이공도에서 나타나듯, 자사고를 통해 특권층이 생산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존재한다. 이미 과학고, 외고, 특목고는 본래의 설립 목적이 아닌 명문대학 진학을 위한 통로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사고가 높은 수업료와 우수학생 선발을 계속 할 경우, 사회적 배경이 좋은 학생들과 그렇지 않은 학생을 가르고 계층화 시키는 경향을 더욱 부추길 가능성이 높다.

자사고를 찬성하는 핵심 논리는 수월성 교육이다. '더 잘할 수 있도록 교육하는 것'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자사고인 셈이다. 하지만 '수월성 교육'은 '엘리트주의'와 구분되어야 한다. 내가 잘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짓밟고 희생하는 것은 '수월성 교육'이 아니다. 교육은 함께 더불어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수월성 교육은 이러한 교육의 기본 태두리 내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소수를 위해 다수를 희생시키는 자사고는 전근대의 엘리트주의의 늪에 빠져있다.



태그:#자율형 사립고, #자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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