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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22일(현지시각) 여야 간 합의로 1년 가까이 지속된 캄보디아의 정치적 교착상태가 드디어 풀렸다. 상원에서 만난 훈센 총리와 삼 랭시 통합야당(CNRP) 총재는 5시간 가까운 긴 회담 끝에 극적으로 합의에 성공했다고 월스트리트저널 등 주요 외신과 현지 언론이 일제히 보도했다.

정치적 신념이나 추구하는 가치가 전혀 달라도 언제든 상황에 따라 타협은 물론이고 정치적 연대마저 가능하다는 점이 한국정치와는 다른 동남아 정치의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다.
▲ 캄보디아 훈센총리(좌측)와 삼 랭시 통합야당(CNRP)총재 정치적 신념이나 추구하는 가치가 전혀 달라도 언제든 상황에 따라 타협은 물론이고 정치적 연대마저 가능하다는 점이 한국정치와는 다른 동남아 정치의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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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담을 마친 후 밝은 미소로 삼 랭시 총재와 함께 상원을 나선 훈센 총리는 기자들의 질문에 '성공적'이라는 표현으로 여야 간 합의가 잘 마무리되었음을 시사했다. 여야 간 주요 합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지난 15일 야당의 집회 장소로 사용된 자유공원(Freedom Park) 앞에서 발생한 시위자들의 구청 소속 경비원 폭행사건과 관련하여 교도소에 수감되었던 야당 의원 등 8명 석방에 전격 합의했다.

둘째, 지난해 7월 부정 총선 시비와 관련하여 논란의 중심에 있던 중앙선거관리위원회(NEC) 개혁에 대해서도 합의했다. 선관위 위원 9명 중 여야가 각각 4명을 지명하며, 캐스팅보트를 지게 될 1명은 여야 합의로 임명키로 했다.

셋째, 국회의장과 제2국회 부의장 1명은 여당이, 제1국회 부의장 1명 자리는 야당이 갖기로 했으며, 상임위 10개 각 분과 위원장은 여야 공평하게 5석씩 갖기로 합의했다. 마지막으로, 5년마다 열리는 총선 일정은 여야 합의를 통해 추후 조정키로 했다. 

아직 구체적인 총선 일정은 결정하지 않았지만, 당초 2018년 7월보다 최소 5개월 이상 앞당겨 치러질 예정이다. 여야는 새로운 선관위 구성과 그동안 논란이 끊이지 않았던 선거인명부에 대한 합의가 이뤄지는 시점에 선거 일정을 협의, 최종 확정키로 했다.

야당의 집회 장소로 활용되어온 프놈펜 시내 자유공원은 지난 1월 유혈사태 이후 군경에 의해 폐쇄되었으며, 지난 15일 자유공원을 되찾기 위해 무소쿠 의원 등 야당 국회의원들과 지지자들이 진입하는 과정에서 구청 경비직원들과 충돌 30여명이 부상을 당했다.
▲ 철조망이 처진 자유공원 앞 모습 야당의 집회 장소로 활용되어온 프놈펜 시내 자유공원은 지난 1월 유혈사태 이후 군경에 의해 폐쇄되었으며, 지난 15일 자유공원을 되찾기 위해 무소쿠 의원 등 야당 국회의원들과 지지자들이 진입하는 과정에서 구청 경비직원들과 충돌 30여명이 부상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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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영수회담이 성공적으로 끝나자마자, 지난 15일(현지시각) 수도 프놈펜에 위치한 자유공원에서 발생한 시위자들의 경비 용역 폭행에 대한 책임을 물어 당국에 체포, 교도소에 수감중이던 무소쿠 여성 국회의원을 포함한 7명의 국회의원과 사회운동가 1명이 오후 4시께 곧바로 보석으로 풀려났다. 교도소 앞에서 기다리던 수백여명의 야당 지지자들은 환호를 지르며, 이들의 무사귀환을 반겼다.

캄보디아 노동자들의 시위, 한국으로 불똥 튀다

한편, 이날 정부 대변인은 여야 대표가 노로돔 시하모니 국왕을 알현한 가운데 합의문에 대해 국왕의 재가를 받을 예정이라고 밝혔다. 조만간 55명의 야당 국회의원 당선자들도 국왕 앞에서 국회의원 선서식을 가질 예정이다.

지난 7월 19일 삼 랭시가 총재가 프랑스 외유를 마치고 포첸통 국제공항에 도착하자 수천여명의 지지자들이 그를 반겼다. 이 날은 국왕의 사면으로 망명생활을 마치고 캄보디아에 돌아온 지 1주년이 되는 날이다.
▲ 프랑스 외유를 마치고 지난 19일 캄보디아로 귀환한 삼 랭시 야당총재의 모습 지난 7월 19일 삼 랭시가 총재가 프랑스 외유를 마치고 포첸통 국제공항에 도착하자 수천여명의 지지자들이 그를 반겼다. 이 날은 국왕의 사면으로 망명생활을 마치고 캄보디아에 돌아온 지 1주년이 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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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7월 총선을 불과 10여일 앞두고 국왕의 사면령을 받아 망명생활 4년여 만에 국내 정치무대에 복귀한 삼 랭시가 일으킨 돌풍은 총선 결과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당시 부정선거 논란이 끊이지 않던 총선에서 전체 의석 123석중 훈센총리가 이끄는 여당은 과반수가 조금 넘는 68석을 얻어 야당을 꺾고 간신히 승리했다. 이로 인해 아시아 최장수 집권자인 훈센 총리는 5년 더 장기집권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여당은 지난 총선에 비해 무려 22석이나 의석을 잃은, 예상치 못한 최악의 선거결과에 당황했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부정선거로 유권자표 150만표를 잃었다는 야당의 공세와 국제사회의 비난여론에 휘말려 오랜 시간 곤욕을 치러야 했다.

지난해 7월 총선 이후 삼 랭시가 이끄는 통합야당은 부정선거를 이유로 그해 9월 국왕이 직접 주재한 국회 등원식 마저 거부하며, 1년 가까이 노조와 연대한 장외투쟁을 통해 훈센정부를 끊임없이 압박해 왔다.

전국 55만 명에 달하는 섬유봉제공장 노동자들도 야당과의 공조를 통해 대정부 임금인상 협상투쟁을 벌였고, 전국적인 파업시위는 급기야 유혈사태로 번졌다. 지난 1월 초 시위진압에 나선 군경의 총기 발포로 최소 4명의 민간인이 숨지고, 40여 명이 심한 부상을 입는 불행한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캄보디아 노동자들의 시위사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한국에도 불똥이 튀었다. 당시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주캄보디아 한국대사관이 공식 홈페이지 게시판에 교민기업보호를 위해 군에 직접 도움을 요청했다는 오해 소지가 많은 글을 올리는 바람에 국제사회와 노동자 시민인권단체들로부터 혹독한 비난을 받기도 했다. 

공장 앞 노동자 시위현장에 공수여단 병력이 투입된 사건과 관련해서도, 해당 군부대와 벽을 사이에 둔 한국기업이 군부대에 직접 시위대 진압을 요청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과거 이 회사와 해당 군부대와의 유착 관계가 한동안 국내외 언론의 도마 위에 오르기도 했다.

당시 노조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한 한국봉제기업들도 구설수에 올랐다. 국제노동기구(ILO)의 강력한 권고에도, 현지 한국기업들이 무차별적인 손해배상 소송으로 노동자들의 파업권을 무력화하는 노동탄압을 자행하고 있다는 것이 국제사회가 지적한 비난의 요지였다.

이에 대해 해당 한국 기업들은 "캄보디아 봉제협회(GMAC)의 협조 요청에 따른 것"이라고 적극 해명했지만, 국제사회와 인권 및 노동단체들의 비난을 피해갈 수 없었다. 

지난 1월 초 야당의 집회장소로 사용되던 프놈펜 시내 자유공원에 난입한 무장괴한들. 헬멧을 쓴 무장괴한들은 훈센 총리의 큰아들 훈마넷 중장 직속 경호부대 군인들이라고 현지 인권단체들이 밝힌 바 있다.
▲ 야당의 집회장소로 사용되던 자유공원에 난입한 무장괴한들 (금년 1월초) 지난 1월 초 야당의 집회장소로 사용되던 프놈펜 시내 자유공원에 난입한 무장괴한들. 헬멧을 쓴 무장괴한들은 훈센 총리의 큰아들 훈마넷 중장 직속 경호부대 군인들이라고 현지 인권단체들이 밝힌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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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잠시 거슬러 유혈사태 직후인 지난 1월 5일, 야당이 수개월째 시위장소로 활용한 프놈펜 시내에 위치한 자유공원은 훈센 총리의 큰아들 훈 마넷 중장의 예하 부대원들로 추정되는 오토바이 헬멧을 쓴 무장괴한들에 의해 강제철거 되었다. 집회 장소에 간이텐트를 치고, 임시거처 삼아 장기투쟁을 벌여온 야당지지자들과 사회운동가, 심지어, 승려들도 무력진압에 의해 강제로 쫓겨나야 했다.

이 무렵 체포된 사회운동가들과 시위 가담자 23명은 정식재판도 받지 못한 채 외딴 교도소에서 약 5개월 가량 강제 수감된 채 고초를 겪다가 간신히 풀려나기도 했다. 지금도 자유공원 진입로는 군경이 쳐놓은 철조망으로 막힌 상태며, 무장한 군경병력과 시위진압용 차량이 24시간 이곳을 지키고 있다.

그동안 캄보디아 정치적 교착상태를 해결하기 위해 노로돔 시하모니 국왕이 직접 중재에 나서는 등 수차례에 걸쳐 영수회담이 열렸으나, 매번 서로간의 입장차가 워낙 커 번번이 무산됐다. 따라서 이번 여야 영수회담의 결과는 지난 1년간의 혼란과 위기로 얼룩진 캄보디아 정치에 새로운 전환점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강경노선 일관하던 훈센 총리, 관계 개선 위해 양보?

한편, 이번 영수회담 결과를 두고 현지인들은 물론이고, 캄보디아 정치에 관심이 높은 교민들조차도 대체로 매우 놀랍다는 반응이다. 그동안 야당이 지난 해부터 끈질기게 주장해온 선거개혁 등 주요 핵심 현안이 거의 대부분 관철되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유혈사태이후 강경노선으로 일관하던 훈센 총리가 정치 및 사회안정을 위해 야당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한발짝 양보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일부 나왔다.

그러나, 이에 대해 현지 정치전문가들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이번 여야 합의는 야당 측의 지속된 정치적 공세와 민심이탈에 위기감을 느낀 훈센 총리가 겉으로만 야당에 대해 양보를 통한 화해의 제스처를 취한 것일 뿐, 실제로는 여야간 '이면 합의'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두고, 야당으로부터 자신이 만족할 만한 수준의 타협안을 별도로 이끌어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고 있다.

캄보디아는 독재자로 악명높은 훈센총리가 29년째 장기집권중이다.
▲ 훈센 부부사진이 걸린 관공서 앞을 지나가는 현지인 여성 캄보디아는 독재자로 악명높은 훈센총리가 29년째 장기집권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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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29살 젊은 나이에 정치무대에 뛰어들어 산전수전 다 겪은 정치 9단 훈센 총리 입장에서는 4년 후에 치러질 총선에서의 승리를 결코 장담하기 힘들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에, 야당과의 밀약을 통해 향후 자신의 정치적 지분, 권력분배문제, 그밖에 차후 신변안전보장과  등의 보장 약속을 얻어냈을 것이라는 것.

대외적으로 공개된 합의안과 별개로, 전문가들의 추측처럼 만약 여야 간에 이런 이면합의가 이뤄졌을 가능성이 높다면, 약 4년 후 치러질 총선에서 현 여당이 패하더라도 훈센 정권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거나, 야당의 정치적 보복이 이어질 가능성이 극히 희박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오랫동안 동남아 역사와 정치를 연구해온 어느 사회학 연구자도 기자와의 이메일 인터뷰를  통해 "동남아 정치의 성향을 비춰볼 때 캄보디아 여당이 다음 총선에서 패해 군소정당으로 몰락하는 극한 상황이 닥치더라도 여야간 모종의 타협과 합의를 통해 종국엔 연립정부가 구성될 가능성도 적지 않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우리 눈으로 언뜻 보면 정치인들의 '밀실 야합' 정도로 비춰질 수도 있고, 좀체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런 동남아 정치스타일은 권력다툼의 틈바구니속에서 서로 간에 정치적 보복으로 이어지거나, 극단적인 경우에도 서로 피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나름 상생의 장점이 있어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와 별개로 현재 캄보디아 정국은 우리나라 정치 만큼이나 여야간 합의하고 풀어가야 할 숙제가 산적해 있다. 우선 당장, 야당과 노조는 현재 최저임금인 100불은 여전히 기본생활 조차 힘들다며 160불 인상을 요구하는 상태인지라, 금년 말 임금인상을 둘러싼 노사정은 물론이고 여야간 갈등도 더욱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게다가 국제인권단체들이 비난해온 벙칵호수 등 도시철거민 보상 문제 외에도 재벌들의 토지수탈, 각종 인권탄압문제와 공무원 부정부패 문제, 수년간 논란이 가시지 않은 베트남국경 문제를 둘러싼 여야간의 현격한 시각차도 여전히 해결해야 할 문제로 남아 있다.

게다가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캄보디아는 1인당 국민소득 1천불에 여전히 아시아 최빈국이다. 그런 가운데 과거 우리나라 7~80년대처럼 정국은 여전히 불안하고 정권교체와 민주화를 열망하는 국민들의 요구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역사적으로 독재자의 말로가 좋았던 예는 거의 없다. 정치 고단수 훈센 총리가 이를 모를 리 없다.

그는 정치생명 연장을 위해선 어떤 일도 서슴지 않을 정치인이다. 과연 독재와 탄압으로 악명높은 훈센 총리가 30년 가까이 지켜온 그의 정치생명을 연장시키기 위해 어떤 이면 합의로 꼼수를 부렸을 지, 야당이 얼마나 이를 받아들었는지는  좀 더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보면  볼수록 특별한 교훈을 주는 동남아 정치세계다.


태그:#캄보디아, #HUN SEN, #SAM RAINSY, #CNRP, #CAMBO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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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캄보디아 뉴스 편집인 겸 재외동포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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