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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을 잊은 우리는 별이 빛나는 밤에 라디오를 가슴에 품고 음악을 들었다. 볼펜을 꾹꾹 늘러가며 노래 가사를 받아쓰고, 가슴 졸이며 녹음을 하고, 마음에 오래오래 담아 두었다. 요즘은 클릭과 스킵을 하면서 음악을 빠르게 구하고 듣는다. 많은 사람들이 음악은 다 쓰면 버리는 소모품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음악을 쉽게 소비한다. 한때는 소녀였고 지금도 소녀라고 믿고 싶은 우리는 [올드걸의 음악다방]에서 음악에 얽힌 이야기를 한다. 이 이야기를 듣고 누군가는 마음 깊숙한 곳에 소장했던 노래를 꺼내 듣고, 누군가는 새로 알게 된 노래를 즐겼으면 좋겠다. - 기자말

ⓒ 반지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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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우~ 이게 뭐야? 장미잖아!"

수요일에 비가 오기만 하면 꽃집의 장미가 동나는 시절이었다. 밴드 '다섯손가락'이 비오는 수요일엔 아름다운 그녀에게 장미를 안겨주고 싶다고 부른 노래 영향이었다. 애인에게 받았거나 호감을 표현하기 위래 누군가가 내민 장미를 들고 있는 친구들이 어찌나 부럽던지. 한 다발은 언감생심 바라지도 않고 한 송이라도 받으면 노랫말처럼 흰옷을 입은 천사가 저절로 될 것 같았는데…. 나는 그냥 쭉 인간이었다.

그랬는데 중앙도서관 내 자리에 빨간 장미꽃 한 송이가 놓여있었다. 나와 처지가 비슷했던 친구들이 장미꽃을 보고 화산에서 용암이 분출하는 것처럼 온갖 말을 쏟아내었다. 대학 4학년, 졸업반이고 취업준비반이라는 이유로 도서관에 껌처럼 붙어서 공부만 해야 한다고, 청춘의 낭만은 보류해야 한다고 다짐은 했지만 왠지 억울했던 우리에게 장미는 청량제 역할을 했다.

"누굴까?"
"얘 주위에 있는 남자들은 우리가 다 아는데... 도대체 누구지?"
"어떤 사람이 얘를 보고 한눈에 반했나?"
"근데 도서관에서 얘를 보고 반하기는 쪼매 어렵지 않나?"
"그렇지? 엎드리고 침 질질 흘리며 자거나 우리와 매점에서 수다 떨거나 그게 전부인데…."
"잘 생각해봐라. 주위에서 너를 쳐다보는 뭐, 그런 시선 없었나?"

친구들의 말처럼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겠나. 동아리 후배가 갖다 놓은 장미였다. 작고 마르고 유난히 얼굴이 하얗던 그 후배를 내가 많이 아끼기는 했다. 어쩌다가 후배의 연애 상담을 내가 하게 되었다. 좋아하는 여학생에게 고백을 하니 마니, 고백을 한다면 이렇게 하니, 저렇게 하니, 그 여학생이 다른 애를 좋아하는 것 같다는 등등. 별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후배는 끊임없이 고민을 털어놓았고 나는 그저 들어주는 선배였다.

그 여학생의 생일날, 생일 선물과 빨간 장미를 준비한 후배는 고백을 하고 거절당했다. 그 날이 수요일이었나, 그랬을 거다. 나는 옆에서 토닥토닥 해주었고…. 몇 번인가 그 여학생이 거절한 장미가 나에게로 오더니, 어느 날부터는 후배가 빨간 장미를 아예 처음부터 나에게 가져오기 시작했다. 수업시간이 달라서 만나지도 못하는데 꼬박꼬박 도서관 내 자리에 장미 한 송이를 놓고 갔다. 수요일이면 도서관 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묘하게 설레고 기분이 좋았다.

친구들이 시들해지자, 이번에는 내 자리 주위의 도서관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늘 일정한 자리에서 공부를 하다 보니 안면이 생기고 눈인사 정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도 장미의 사연이 궁금했을까? 장미를 받기 시작한 지 두 달이 넘은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이 자리 주인 몇 시쯤 오니까 기다려서 보고가라"고 후배에게 말했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후배에게 "그러면 쪽지라도 남겨요. 꼭"이라고 그랬다나, 어쨌다나.

그날의 장미가 마지막이었다. 우리 둘이 썸 타고 있다고 오해했던 그 사람, 도와주고 싶어 했던 그 사람 덕분에 '빨간 장미'는 사라졌다. 아쉬웠다. 내 일생에 수요일에 빨간 장미를 받는 일이 또 있을까 싶었다. 서글펐다. 지루하고 힘들었던 취업준비반 시절을 견디게 해주었던 장미가 없어졌다. 슬펐다.

이봐요. 연인이 아니어도 빨간 장미 줘도 되잖아요? 안 그래요?


태그:#올드걸의 음악다방,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 #다섯손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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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로 세상과 소통하고 싶은 주부입니다. 교육, 문화, 책이야기에 관심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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