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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눗방울 그림 활동에 열중하고 있는 군산남고 학생들
 비눗방울 그림 활동에 열중하고 있는 군산남고 학생들
ⓒ 박현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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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2학년인 현수(가명)는 이른바 '착하고 얌전한' 모범생이다. 수업 시간에 차분하게 집중하고, 학교 규정도 잘 따른다. 그런데 현수는 이런저런 고민을 가슴속에 꽁꽁 싸매두었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내면을 밝히는 것을 심하게 꺼리는 학생이었다.

어느 날, 현수의 그런 모습을 눈여겨본 박 선생님이 말했다.

"혼자서 모든 것을 다 잘하려고 하지 마라.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겠나."

박 선생님 말을 들은 현수는 문득 눈물을 글썽였다. 자신의 깊은 속내를 알아봐 주고 따뜻하게 조언해 준 박 선생님이 진심으로 가슴에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다음 시간부터 현수는 한결 표정이 밝아졌다. 평소의 과묵했던 모습을 버리고 말수가 늘어난 쾌활한 학생으로 바뀌었다. 박 선생님에게 먼저 농담을 걸 때도 많았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공감을 받았다는 사실에 현수의 굳어 있던 마음이 열리고 부드러워진 것이다.

현수는 어떻게 해서 그렇게 변했을까. 군산남고등학교(교장 이항근, 아래 '군산남고')에서 미술치료정서지도프로그램(아래 '미술치료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미술치료사 박현창 선생님은 미술심리치료의 놀라운 힘 덕분이라고 믿는다.

미술심리치료의 놀라운 힘, 아이들 변화시키다

군산남고는 군산시 외곽에 위치해 있다. 그런 지리적인 불리함 때문에 성적이 낮은 학생들이 많이 입학한다. 학생들은 스스로를 실패자로 규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자존감 회복이 무척 필요해 보였다. 닫힌 내면을 밖으로 꺼내 보임으로써 자신의 감정과 생각에 솔직한 전인격체로 성장시키는 일도 중요했다.

학교에서는 주저하지 않고 미술치료프로그램을 선택했다. 미술치료프로그램이 학생들의 자존감을 향상시키고, 그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보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았다. 현수는 그런 미술치료프로그램의 효과를 톡톡히 본 대표적인 사례였던 셈이다.

군산남고의 미술치료프로그램은 2학년 3개 반 전체를 대상으로 진행되었다. 지난 4월 14일부터 7월 15일까지 매주 월요일과 화요일 이틀에 걸쳐 하루 6시간씩 총 13회차로 짜인 일정이었다. 프로그램의 구체적인 내용은 그림진단검사, 비눗방울 그림, 한지물감그림, 석고붕대 손 본뜨기, 손 꾸미기, 나의 과거·현재·미래, 주고 싶은 선물·받고 싶은 선물, 9분할 그림, 풍경구성법, 만다라, 10년 후 내 모습 그리기 등으로 구성되었다.

애초 미술치료프로그램은 2학년 학생 12명 정도를 선발해 진행할 예정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항근 교장과의 기획 및 협의 과정에서 대상 학생이 2학년 전체로 확대되었다. 프로그램을 할 거라면 모두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선발된 학생들과 나머지 학생들 사이에 이질감이 생기고, 선발된 학생들이 자신만 '선별'된 것에 대해 거부감을 갖게 될 것으로 우려했기 때문이고 한다.

군산남고에서 미술치료프로그램을 진행한 미술치료사 박현창 선생님
 군산남고에서 미술치료프로그램을 진행한 미술치료사 박현창 선생님
ⓒ 정은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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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램의 '판'이 커지면서 박 선생님은 불안감이 컸다. 학생들이 잘 따라올 수 있을까, 집중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고 한다. 하지만 프로그램이 2회차를 지나면서 크게 자신감이 생겼다. 학생들의 적극적인 반응 때문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호응이 아니었다. 박 선생님은 학생들의 열의를 "'미안'할 정도로 뜨거웠다"고 표현했다.

프로그램은 집단치료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담당 교사는 학생들끼리 자연스럽게 소통할 수 있도록 유도하면서 보조자 역할을 하는 데 머물렀다. 박 선생님에 따르면 학생들이 평소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면서 서로를 알아가는 일을 원했다고 한다. 하지만 학교 교육과정은 일반 교과수업 위주로 진행된다. 자신을 솔직하게 표현하면서 친구와 속 깊은 대화를 나눌 기회를 갖기 힘들다는 말이다. 이런 현실에서 미술치료프로그램은 학생들에게 진정성 있게 소통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아래는 미술치료프로그램을 놓고 박 선생님과 나눈 대화를 정리한 것이다.

- 전문 미술치료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으실 텐데, 미술치료프로그램을 진행한 경험이 꽤 있을 것 같아요.
"<도가니> 사건이 한창 논란이 됐을 때 광주인화학교에서 교육청 의뢰로 주치료사로 참가했습니다. 장수에 있는 장계고에서 신입생과 재학생을 대상으로 진행했고요. 특수학교인 정읍 다솜학교에서는 재활심리치료에 초점을 맞춰 프로그램을 이끌었습니다."

- 프로그램 기획과 진행 중에 겪으신 인상적인 일들을 듣고 싶습니다.
"인화학교와 장계고에서는 다른 미술치료사와 협업해서 공동으로 진행했습니다. 그런데 군산남고에서는 기획부터 진행까지 1인 작업으로 했어요. 제게는 최초의 단독 작업이었지요.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수업을 기다려주는 학생들 때문에 힘이 났습니다.

처음에는 상당수 학생들이 마음을 열지 않았어요.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는 학생들도 있었습니다. 실패의식과 좌절감에 빠져 있기 때문이었지요. 학생들은 평상시 어떤 일을 할 때 이미 실패를 예견하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랬습니다. 마지막 프로그램이 끝날 때 전시회를 해 주겠다고요. 그때부터 학생들이 크게 바뀐 것 같아요. '행복한 고민'이 되었을 정도로 좋은 작품이 많이 나왔어요."

- 박 선생님이 보시기에 미술치료의 강점은 어디에 있다고 보세요.
"무엇보다도 아이들과의 소통에서 부딪히는 진입 장벽이 낮아집니다. 학교에서 관계를 맺을 때 학생들은 본능적으로 심리적 방어를 하기 마련인데, 그 방어막이 약해질 수 있다는 것이지요. 활동에 재미와 흥미를 담은 요소도 많아서 학생들이 무척 좋아해요. 더군다나 그것이 단순한 재미나 흥미로만 끝나지 않고 스스로 느끼고 자신을 살필 수 있게 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학교 생활의 스트레스를 풀면서 동시에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 교내 복도 통로에 학생 작품을 전시해 놓았던데요. 처음 약속을 훌륭히 지킨 셈이네요.
"그렇습니다. 지금은 교내 전시중인데, 나중에 프로그램이 모두 완료되면 학생별로 스크랩북을 만들어 나눠줄 예정입니다. 학생들 스스로 '내 작품이 전시되고 책으로 만들어지는구나' 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자부심을 가지리라 봅니다. 사실 전시회는 학생들을 위한 것이지만 동시에 학생들을 바라보는 학교 내 시선을 달라지게 하려는 의도도 있었습니다. 전시회를 통해 무언가에 집중하고 몰입할 수 있는 학생들의 열정을 보여줄 수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군산남고 미술치료프로그램에서 학생들이 만든 작품들이 교내 복도 통로에 전시되어 있는 모습이다.
 군산남고 미술치료프로그램에서 학생들이 만든 작품들이 교내 복도 통로에 전시되어 있는 모습이다.
ⓒ 정은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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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그램을 진행하실 때 구체적으로 어떤 점에 초점을 맞추셨는지요.
"제가 특별히 한 건 없습니다. 수업할 때 학생들과 친하게 소통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려고 노력했습니다. 판단하고 평가하는 선생님이 아니라 자신을 그 자체로 믿어주는 교사가 되려고 했지요. 사실 저는 중·고등학교 다닐 때 이른바 모범적인 학생이 아니었어요. 아침 잠이 많아서 수업을 많이 빼먹기도 했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고등학교 시절 한 선생님께서 그러시더군요. 아침 잠이 많은 대신 저녁 잠이 적을 테니 저녁에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요. 스스로를 게으른 사람으로만 여기고 있었는데,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가능성을 보게 되었지요. 그래서 학생들에게 '나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데 많은 힘을 기울였습니다."

- 군산남고 프로그램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호응이 좋아서 계속 해도 될 것 같은데···.
"군산남고 프로그램은 이번 학기에 종료됩니다. 많이 아쉽죠. 집단적 소통의 문제는 어느 정도 짚어봤는데, 학생 개개인이 자신의 내면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는 활동은 아직 본격적으로 진행하지 못했거든요. 학생들이 앞으로 프로그램을 더 하자고 요구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더 안타까워요."

군산남고의 미술치료프로그램은 예산 사정으로 이번 학기에만 한시적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이항근 교장은 내년에도 예산을 편성해 프로그램을 지속할 계획을 갖고 있다. 학생들이 이번 프로그램 활동에서 경험한 소통과 치유, 관계 회복 등을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 선생님은 대화 마지막에 학교에서 배우는 교과지식은 인생 30년을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미술치료프로그램은 100세 인생을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학교 현장에 미술심리치료와 같은 소통 중심의 프로그램이 도입되어 확대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강하게 떠올랐다.

덧붙이는 글 |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전라북도교육청에서 발행하는 <전북교육 소식지>에도 실립니다.



태그:#군산남고 미술치료프로그램, #미술치료사 박현창, #이항근 교장, #소통과 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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