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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 버스를 타고 만주를 지나다가 본 어느 식당의 풍경. 현수막에는 '조선족 불고기'라는 한글과 '朝族'이라는 한자가 함께 적혀 있었다. <유관순>을 지은 강소천도 동요 <닭>을 지을 무렵에는 만주에 살았다.
 야간 버스를 타고 만주를 지나다가 본 어느 식당의 풍경. 현수막에는 '조선족 불고기'라는 한글과 '朝族'이라는 한자가 함께 적혀 있었다. <유관순>을 지은 강소천도 동요 <닭>을 지을 무렵에는 만주에 살았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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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한 모금 입에 물고
하늘 한 번 쳐다보고
또 한 모금 입에 물고
구름 한 번 쳐다보고 

1937년, 강소천은 북간도 용정에 살면서 동요 <닭>을 썼다. 닭이 물을 먹는 모습을 너무나 간결하게 묘파해낸 이 동요는 시에서 압축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촌철살인의 교훈으로 가르쳐주는 걸작이다. 이 동요는 해방 이후 이계석이 곡을 붙여 음악으로 만들어지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불려졌다.

1. <순이 무덤>의 강소천은 <유관순>도 썼다. 필자는 <순이 무덤>의 '순이'가 유관순이 아닐까 혼자 생각해 본다. 2. 유관순 생가 정면 우측의 포토존은 만세 운동 중인 군중들 사이에 들어가 자신도 "대한독립만세"를 외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1. <순이 무덤>의 강소천은 <유관순>도 썼다. 필자는 <순이 무덤>의 '순이'가 유관순이 아닐까 혼자 생각해 본다. 2. 유관순 생가 정면 우측의 포토존은 만세 운동 중인 군중들 사이에 들어가 자신도 "대한독립만세"를 외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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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의 주제는 무엇일까? 작가의 의도와 동떨어진 감상을 '해석의 오류'라고 한다. 그러나 <닭>은 읽을 때마다 그것이 비록 오류일지라도 마냥 범하고만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이다.

닭은 물을 한 모금만 마신다. 단 한 모금일 뿐이다. 그러나 곧장 마시는 것이 아니라 '입에 물고' 하늘을 쳐다본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할 때의 바로 그 하늘이다. 북간도 용정에서 강소천은 하늘에 소원을 빌며 가난하게 살아간 민족의 삶을 함축적으로 노래하지 않았을까?

금잔디 파래진 순이 무덤에
오늘도 찾아가 보았습니다.
순이는 잠을 잘까 순이는 꿈을 꿀까

꽃 하나 아니 핀 순이 무덤이

어쩐지 쓸쓸해 보였습니다.
민들레 심어 줄까 할미꽃 심어 줄까

저녁 바람 스산한 순이 무덤에
고운 꽃 꺾어다 심어 놓고는
순이야 순이야 가만히 불러 봤네

강소천의 다른 동시 <순이 무덤>도 마찬가지 시각으로 읽어 본다. 어려서 죽은 순이의 무덤은 '꽃 하나 아니 핀' 모습으로 향량하게 들판에 버려져 있다. 순이에게 만약 아버지와 어머니, 오빠나 동생이 살아 있다면 어찌 그 무덤이 '저녁 바람 스산한' 속에 그렇게 내팽겨져 있을까? <순이 무덤>은 우리에게 한민족이 일제 시대에는 살아 있더라도 사실상은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다는 사실을 되짚어 생각하게 해준다.

'순이'는 유관순이 아닐까?

<닭>과 <순이 무덤>을 민족문학적 관점에서 감상하는 것은 강소천이 <유관순>을 쓴 사람이기 때문이다. '조선의 잔 다르크'로서 영원한 겨레의 '누나'가 된 유관순은 1919년 독립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가 일제에 의해 무자비하게 옥중 사망한 민족운동가이다.

유관순 생가. 본래 집은 일제가 헛간은 물론 유품 하나까지 남김없이 태우는 바람에 전소되어 없어졌고, 지금 보는 것은 1991년에 복원한 것이다. 생가 왼쪽의 적벽돌 건물은 열사가 생전에 다녔던 매봉교회를 새로 건축한 것이다. 교회에 들어가면 유관순 열사 전시 기념실이 만들어져 있다.
 유관순 생가. 본래 집은 일제가 헛간은 물론 유품 하나까지 남김없이 태우는 바람에 전소되어 없어졌고, 지금 보는 것은 1991년에 복원한 것이다. 생가 왼쪽의 적벽돌 건물은 열사가 생전에 다녔던 매봉교회를 새로 건축한 것이다. 교회에 들어가면 유관순 열사 전시 기념실이 만들어져 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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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보며

유관순 누나를 생각합니다
옥 속에 갇혀서도 만세 부르다
푸른 하늘 그리며 숨이 졌대요

삼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보며
유관순 누나를 불러 봅니다.
지금도 그 목소리 들릴 듯하여
푸른 하늘 우러러 불러 봅니다.

유관순 열사 생가터 현지 안내판의 내용
<유관순 열사 생가지>
사적 제 230호
소재지: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 338-1

이곳은 유관순 열사가 태어난 곳이다.
열사는 1902년 12월 16일 충청남도 천안시 용두리에서 아버지 유중권의 5남매 중 둘째딸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이소제이다. 이화학당에 다니던 중 서울의 3.1만세운동에 참여하였고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1919년 4월 1일 3천여 군중이 참여한 호서지방 최대의 독립만세운동인 아우내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일본헌병에게 체포되어 경성복심법원 최종 판결에서 3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중 끊임없는 옥중 만세시위 운동을 주도하다가 갖은 폭행과 고문에 못 이겨 1920년 9월 28일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추서하고 열사의 애국정신을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1991년 옛 집터에 생가를 복원 정비하였다. 생가 옆에는 기념비와 열사가 다녔던 매봉교회가 있으며 매봉교회 지하에는 유관순열사전시관이 있다.

유관순은 1919년 3월 13일 귀향하여 아버지, 숙부 등에게 서울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설명했다. 그렇게 뜻을 모아 3월 31일 매봉산에 올라 봉화를 올린 후 4월 1일 아우내장터에서 만세운동을 펼쳤다. 유관순 열사는 1920년 9월 28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생가 '비문'에 "천 년에나 한 번씩 나타나는 빛난 별"로 묘사되어 있는 유관순 열사가 1902년 12월 16일에 태어났던 생가는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 탑원리 338-1번지에 있다.

물론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집은 생가 그 자체는 아니며, 1991년에 복원한 것이다. 일제가 유관순 열사 생가의 가옥과 헛간은 말할 것도 없고 유품 하나 남김없이 모두 불질러 태워없앴기 때문이다.

복원된 유관순 생가터 일대는 국가 사적 230호로 지정되어 있다. 오늘날 생가터를 찾아가면 집 바로옆에 유관순 열사가 다녔던 매봉교회도 새로 건축되어 있고, 교회 안에는 유관순 기념 전시실도 조성되어 있다. 또 집 뒤 800m 지점 봉화터에 오르면 의거를 기려 세워진 기념탑도 볼 수 있다.

유관순 열사 생가 비문
천 년에나 한 번씩 나타나는 크고 빛난 별이 바로 이 곳에 내려와 일천구백이년 양력 십이월 십육일에 유관순으로 태어났다. 유관순은 별처럼 밝고 총명하고 씩씩한 처녀로서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의 교훈 아래 어려서부터 효성과 신념이 강하였고 형제와 친구에게도 우애가 남달리 두터웠다.

관순은 서울 이화학당에서 배우는 동안에도 성실한 모범생으로 이름이 높았다. 기미년 거국적인 삼일독립운동을 보고 고향에서 거사할 것을 결심하고 고향인 지령리로 돌아왔다. 이십 여일을 돌아다니며 교회, 학교, 유림의 대표들을 만나 취지를 설명하고 거사의 장소와 시일을 약속한 다음 마침내 음력 이월 그믐날 밤에 관순은 매봉에 올라 내일을 알리는 봉화를 높이 들었다.

양력 사월 일일 정오에 아우내 장터에서는 나라의 주권을 외치는 수천 명의 만세소리가 태극기의 물결과 함께 천지를 흔들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관순의 부모와 수십여 명의 열사들은 즉석에서 저들의 총칼 아래 충혼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이어 관순도 체포되어 일본헌병의 손아귀에서 갖은 악형을 당했으나 추호도 굴하지 아니하였으며 마침내 경성복심법원에서 삼년형을 받았다. 그리하여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면서도 밤낮없이 옥중 투쟁을 계속하다가 일천구백이십년 구월 이십팔일 크고 빛난 우리의 별은 이 땅 위에서 빛을 거두고 말았다. 그러나 그 별은 이 하늘에 떠있어서 영원히 겨레의 별이 된 것이다.

서기 일천구백칠십칠년 팔월 일일 세우다.
박화성 짓고, 이철경 쓰다.



태그:#유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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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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