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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동안 고생 많았습니다. 20년 동안 우리 산악회 인원이 딱 5명 밖에 늘지 않았네요. 20년 전에 첫 산악회에 온 사람들이 15명이었는데 오늘은 20명이 왔으니까요."

<역사와 산> 전 대표였던 박준성님(현재는 고문)이 20주년 행사 때 하신 말씀이다.

고창의 동학혁명 기념비 탑 앞, 맨 뒤줄 오른쪽에서 다섯번째가 나다.
▲ 20년 전 동학혁명 전적지 답사 후 기념촬영 고창의 동학혁명 기념비 탑 앞, 맨 뒤줄 오른쪽에서 다섯번째가 나다.
ⓒ 문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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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에 <역사와 산>이라는 산악회의 20주년 맞이 산행이 북한산 이북5도청에서 출발해 4·19탑으로 내려오는 코스로 있었다. 산행이 끝난 후 4.19탑 근처 재미난 카페에서는 20주년 맞이 행사를 치렀다. 나는 날씨가 덥다는 핑계로 산행을 하지 않고 행사에만 참석했다. 조그마한 산악회가 어떻게 20년을 쉬지 않고 달려 올 수 있었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았다.

지금도 한겨레신문 광고란은 유지되고 있지만 20년 전 그 때 광고란에는 지금보다 훨씬 재미있는 사연이 많이 올라오곤 했다. 1994년 6월, "동학혁명 100주년 맞이 전적지 답사에 함께 가고픈 사람을 모집합니다. -구로역사연구소-"라는 광고가 떴다. 당시에 나는 신문 광고면을 유심히 보는 편이었는데 그 광고는 마치 나를 부르는 소리처럼 들렸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신청을 했다. 그때 내 나이 25살, 한참 혈기 왕성할 때이다. 무언들 두렵고 어디엔들 못가리.

광고를 보고 모인 사람은 30명 안팎이었다. 연구소 연구원을 비롯해 일반시민, 역사교사, 책방 주인, 단체 활동가 등등. 다양한 사람이 모여서 답사를 갔다. 동학혁명 전적지인 고창 읍성을 비롯해 모악산을 넘으면서 피흘려 죽어간 농민들의 함성을 다시 듣는 것만 같았다.

1박 2일로 진행된 답사가 끝나고 서울로 돌아와서 어김없이 뒤풀이를 했다. 그런데 뒤풀이가 끝나가는데도 사람들은 집에 갈 생각들을 안한다. 무엇이 그리 허전했으며 무엇이 그토록 아쉬웠길래 그들의 발길을 잡는 것이었을까. 동학혁명 전적지 답사를 하고 왔다고 동학혁명에 참가했던 전사가 되는 것은 아닐텐데 말이다.

안되겠다 싶었는지 몇몇 사람이 "우리가 이렇게 뜻 깊은 기회로 만난 사람들인데 그냥 헤어지기에는 너무 아쉽다. 그러지 말고 한 달에 한 번씩 모여서 산에라도 가자!"라는 제안을 했다. 단 한명도 이 제안에 토를 다는 사람은 없었고 바로 다음 달인 7월에 북한산으로 첫 산행을 가기로 약속했다. 그제서야 아쉽고 허전한 마음을 달랠 수 있었는지 안심하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더운날 이었지만 20년전의 그 날을 기억하며 오른 산. 날씨가 더워서 많은 인원이 참가하지는 않았다.
▲ 20주년 기념 산행, 북한산 더운날 이었지만 20년전의 그 날을 기억하며 오른 산. 날씨가 더워서 많은 인원이 참가하지는 않았다.
ⓒ 김영발(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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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에 한번씩 꼭 산행, 아팠던 지난 4월은 결행

그때부터 올해까지 한 달에 한 번씩 무슨일이 있어도 산행이 이어졌다. 딱 한 번 결행 한 적이 있는데 그게 바로 올 해 4월 세월호 참사 때이다. 대표님을 비롯해 고문님까지 아이들이 눈에 밟히고 너무 가슴이 아파서 못가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주로 무박 일정으로 주말에 산에 가기 때문에 중요한 집회와 겹치는 날도 많았다.

그때마다 집행부는 고민 속에서 산행을 결정하곤 돌아오는 길에 시청광장에서 하고 있는 마무리 집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산행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뜻이 모아지는 진보성향의 사람들이었기에 망정이지 안그랬으면 과격한 운동권 집행부들이 다니는 산악회로 오해할 소지가 충분했다.

1994년 7월부터 2014년 7월까지 20년 1개월 동안 딱 한 번을 빼고 240회의 산행을 했다. 우여곡절이 참 많았다. 그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산행은 1995년 지리산에 갔을 때와 1997년 설악산 공룡능선에 갔을 때이다. 지리산 백무동 코스로 예정된 그 산행은 얼마나 길고 험했는지 새벽부터 올라가기 시작해 다음날 새벽이 되어서야 끝났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끔찍한 산행이었다.

무슨 각오를 하고 그렇게 무모한 산행을 한 건지 미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설악산 공룡능선은 초보 산악인이 오르내리기에는 꽤 무리가 있는 산이다. 나는 그 산을 겁도 없이 가겠다고 신청해서 결국은 다리에 쥐가 나 더 걷지 못 할 지경이 되었다. 당시 사무국장 이었던 분이 걷지 못하는 나를 업고 내려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정말 고맙고 미안한 일이었다.

20주년 행사에는 처음 산행을 시작한 초기 멤버부터 중간중간에 오고 간 사람들까지 모여서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되었다. 20년 동안 움직인 산악회이다 보니 그 와중에 눈이 맞아 결혼한 커플들이 자그마치 7쌍이나 된다. 1호 커플의 아이가 어느새 17세로 간디학교 고등과정에 재학중인데 현재 대표를 맡고 있는 아빠와 함께 행사에 참여했다. 나는 그 아이에게 물었다.

"OO야, 나 기억나니? 네가 어렸을 때 아빠 등에 업혀서 산에 온 적도 있는데."
"잘 기억이 안나요. 하지만 산행에 자주 오시던 아주머니 아저씨들은 기억이 나요. 참 재미있었는데...장난쳐도 다 받아주시고 같이 놀고 그랬어요."

이 아이와  대화를 하다 보니 두 번째 역사와 산 대표님 이셨던 양병욱님이 생각난다. 첫 번째 대표님은 예전 구로역사연구소의 연구원 이셨던 박준성님 이셨는데 산행 시작한 지 10년이 될 즈음 간암으로 투병하시게 되어 부득이하게 대표직을 평범한 회원으로 정했다. 양병욱 대표님이 그분 이시다.

양병욱 대표님에 대해서 언젠가 블로그에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옮겨와 본다.

"<역사와 산>의 165번째 산행(해남 땅끝 마을과 달마산)에 다녀오면서 양병욱 대표님은 내가 살아오면서 쉽게 만날 수 없는 '인간미'와 '진솔함'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 분은 사람을 빨아들이는 흡입력이 아주 뛰어난 사람이다. 우선 스스로 나이가 굉장히 많다(한 번도 진짜 나이를 말하지 않아서 정확한 나이를 추정할 수 없다). 누구를 만나도 천진스럽고 개구쟁이 같은 모습으로 모두가 자기 자식인 것처럼 편하게 대한다. 언제나 털털 하게 웃으며 인사하고 낯설지 않게 말을 건넨다.

툭하면 내 뱉는 썰렁한 유머를 포함해서 어디를 가든 사람들을 잘 챙기고 먹을 것을 나누어 준다. 산행에 오는 사람들이 늘 말하는 "역사와 산은 가족 같은 분위기가 참 좋아요"라는 말도 그래서 나온 듯하다. 언젠가 내가 이런 질문을 했다. "저는 산에 올 때 마다 매번 다른 사람이 오기 때문에 누가 누군지도 모르겠어요. 또는 몇 번 봤는데도 이름을 잘 모르겠어요." 라고 말했더니, '세경이는 술을 한 잔 먹어야 사람을 알아보고, 술을 안 먹으면 사람을 못 알아보지. 껄껄껄~" 하면서 웃는다. 관용이 넘치고 권위가 없고 사람을 챙기고 편안한 웃음을 선사 하는 그 분, 오늘도 우리의 집결지인 시청 앞 그 곳에서 "우리 세경이 오랜만에 왔구나. 1년에 두어번씩 오지 말고 좀 더 자주와."하면서 반겨줄 것만 같다."

지금은 광주에서 대안학교를 만들어 교장직에 계시다가 얼마 전에 퇴직 하시고 무화가 농사를 짓고 있다고 한다. 이번 행사에 올라오려고 했는데 하필 비가 많이 와서 수확철인 과수가 물에 잠겨 오시지 못했다고 한다. 정말 보고 싶은 분이었는데….

이번 20주년 행사의 백미는 작년 총회에서 새로 뽑은 사무국장이 준비한 PPT자료였다. 산행 기록이며 참여인원 수, 최다 참여인, 최저 참여자 수 등등을 퀴즈 놀이로 진행했는데 예상하지 못한 프로그램이라 깜짝 놀랐다. 이 친구의 특기는 산에만 가면 온갖 꽃이름과 나무이름을 줄줄이 알려줄 뿐만 아니라 힘든 산행을 유쾌하게 해주는 재주를 가지고 있다.

그 중에서 정말 웃겼던 일은 지난 5월에 선운산을 등반 할 때 인데, 새벽 산행을 하는지라 산속은 말할 것도 없이 고요하기 때문에 어떤 새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맑은 새소리가 들리길래 무슨 새냐고 물었더니 새소리를 그대로 흉내내면서 입으로는 "홀딱벗고~"라고 말하는게 아닌가. 그리고 "저게 바로 '홀딱벗고'라는 새 입니다"라고 했다. 듣던 사람들이 모두 까르르 웃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새의 정식 명칭은 검은등뻐꾸기라고 한다. 집에 와서 식구들에게 그 얘기를 해주며 한동안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이 친구 덕분에 이번 20주년 행사를 무척 알차게 치룰수 있었다. 재주가 많은 친구다.
▲ 현재 역사와 산 사무국장인 김영발씨 이 친구 덕분에 이번 20주년 행사를 무척 알차게 치룰수 있었다. 재주가 많은 친구다.
ⓒ 최상천(역사와 산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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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산을 만들었고 동학혁명 100주년 답사를 추진하신 분이다.
▲ 박준성 고문님 역사와 산을 만들었고 동학혁명 100주년 답사를 추진하신 분이다.
ⓒ 김영발(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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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흐름과 함께 저 산처럼 꿋꿋하게"

20년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다녀갔나를 계산해 보니 한 달에 평균 25명 정도로 잡고 1년이면 300명이니 20년이면 6000명이나 된다. 많이 갈 때는 관광버스 한 대를 꽉 채우고도 모자라 바닥에 앉아서 갈 때도 있었으니까 그보다 훨씬 많은 인원이 왔다 갔으리라. 생각해보니 한 조직(아무런 조건이 없어도 우린 엄연한 조직이다. 그것도 20년이나 된 뿌리깊은 조직^^)에 이렇게 많은 인원이 들고 났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한 사람의 열 걸음 보다 열사람의 한 걸음이 얼마나 더 갚어치 있는지를 말해 주는 듯하다. 

행사를 마치고 2차 뒤풀이까지 끝내고 알딸딸하게 취해 택시를 타고 오면서 생각해 보았다.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이 무조건 산에만 가는 모임인데 이렇게 오래 지탱할 수 있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첫 번째 대표님 이셨던 박준성 선생님의 역사에 대한 무한한 관심과 사람에 대한 애정 그리고 뒷받침 했던 집행부를 말 할 수 있겠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지속될 수 없는 게 있었다. 나는 그걸 '우직함'이라고 말하고 싶다. 뒤풀이에서 꼭 선창하는 우리의 구호가 있다.

"역사의 흐름과 함께 저 산처럼 꿋꿋하게~!"

아무도 강요하지 않고 산에 갈 때 빈손으로 가더라도 먹거리 만큼은 넉넉하게 준비해 와서 나눠 먹을 줄 아는 인정들, 작은 경조사에도 달려가서 같이 기뻐해 주고 슬퍼할 줄 아는 마음들이 모여서 여기까지 올 수 있지 않았을까. 마지막으로 최근 3년간의 산행에 제일 많이 참여한 분으로 뽑힌 분이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이 아이가 우리 역사와 산의 1호 커플의 아들이다. 어느새 이렇게 컸는지 모르겠다.
▲ 17세 고딩 회원 이 아이가 우리 역사와 산의 1호 커플의 아들이다. 어느새 이렇게 컸는지 모르겠다.
ⓒ 문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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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큰아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산에 오게 되었는데 지금은 고등학교 2학년입니다. 작은 아이는 7살 때부터 왔는데 6학년이고요. 큰 아이가 사춘기 때 개성이 좀 강해서 따돌림을 당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역사와 산에 같이 오면서 좋아졌고 무엇보다 아이들이 밝고 씩씩하고 예의 바르게 컸어요. 여러분들 덕분입니다. 고맙습니다."

그러고 보니 <역사와 산>은 산에만 간 게 아니라 여기서 맺은 인연들이 결혼해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모두가 같이 키웠다. 또한 잘못된 역사를 바로 알기도 했고 공동체적 삶이 무엇인지를 배우기도 한 훌륭한 교육기관의 역할을 한 셈이다.

그래서 우리는 누가 뭐래도 간다. 배낭 한 켠에는 달콤 쌉싸름한 과실주 한 병 넣고서. 특히, 노총각 노처녀들은 언제든지 환영이다. 얼마 전에도 한 커플이 탄생해서 산에 올 때마다 손 꼭 잡고 온다. 눈꼴이 시지만 참는다. 자꾸 커플이 탄생해야 예쁜 아이들을 많이 볼 수 있으니까.


태그:#역사와 산, #20주년, #북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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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받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다. 인터뷰집,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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