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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율형 사립고가 기로에 섰다. 서울시교육청은 내달 13일까지 서울시 자사고 25곳 중에서 2009년에 설립된 14개 고교에 대한 재지정 평가 결과를 내놓는다. 결과에 따라 14곳 모두 일반고로 전환해야 한다. '일반고 슬럼화' 등을 야기한 자사고의 폐해가 심각하다는 인식이 공감대를 얻고 있고, 조희연 서울시교육감도 곧 칼을 빼들 것으로 보인다. 자사고 들어선 뒤 교육환경이 뒤틀린 지역 사회를 취재한 현장 기사와 일반고·자사고 교장 인터뷰를 통해 자사고 현 상황을 점검해본다. [편집자말]
자립형 사립고(자사고) 재지정을 앞두고 자사고 폐지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사진은 지난 18일 서울 동작구 동작동에 있는 자사고인 경문고 교문의 모습이다.
 자립형 사립고(자사고) 재지정을 앞두고 자사고 폐지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사진은 지난 18일 서울 동작구 동작동에 있는 자사고인 경문고 교문의 모습이다.
ⓒ 선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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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일 오전 서울 동작구 동작동 경문고. 학교 입구에서부터 '자율형 사립고'(아래 자사고) 표지판이 방문객을 맞는다. 교내에 들어서면, 푸른 인조잔디가 깔린 넓은 운동장이 한눈에 들어온다. 건물 입구에는 대학교수들의 강의 일정이 담긴 '진로진학탐색 멘토링 스쿨' 행사 안내문이 눈에 띈다.

이곳의 학교시설은 인근의 일반 공립고에 비해 좋다. 학생들도 학교에 만족한다. 이 학교의 1학년생은 "중학교 성적 상위 50% 이내의 학생만 자사고에 지원할 수 있다 보니, 중상위권 학생들이 많이 온다, 공부하는 분위기가 조성돼 있다"라고 말했다. "부모님 역시 연 600만 원이 넘는 학비를 크게 부담스러워하지 않는다"라고 덧붙였다.

자녀를 좋은 대학에 보내는 데 힘을 쏟는 학부모들에게 경문고는 만족스러운 곳이다. 이 학교의 한 교사는 "학교는 자사고를 신청할 때 인성 교육 등의 차별화된 교육과정을 강조했다"라면서 "하지만 자사고 전환 이후 주로 영어·수학 등 입시 과목 수업이 늘어나고 강화됐다, 학교는 입시명문을 추구하고 있고, 학생·학부모들이 알고 (학교에) 온다"고 전했다.

문제는 경문고 학생·학부모의 만족감이 일반고 학생·학부모들의 상대적 박탈감 위에서 만들어졌다는 데 있다. 경문고에 우수한 학생들이 몰리다 보니, 인근 일반고는 소위 '공부 못하는' 학생들의 집합소가 됐다. 이른바 '일반고 슬럼화' 현상이다. 경문고에 다니는 또 다른 1학년생의 말이다.

"중3 때 친했던 친구들은 일반고에 많이 갔어요. 친구들은 공부 못하는 학교에 갔다면서 자책해요. 사실상 1부 학교인 자사고와 2부 학교인 일반고로 나뉘는 분위기예요. 경문고에 오는 학생들 역시 길 건너 서초구의 자사고에 지원했다 떨어진 친구들이 와요. 결국 다들 박탈감을 느끼고…. 좋지만은 않은 것 같아요. 자사고를 왜 유지하는지 모르겠어요."

무너진 일반고... "한 반에 공부하려는 학생은 5명뿐"

같은 날 낮 서울 동작고를 찾았다. 동작구 내에서 경문고와 가장 가까운 일반 공립고다. 경문고가 있는 동작동·사당2동에 사는 학생이 경문고에 진학하지 못할 경우 20분가량 마을버스를 타고 등교해야 한다.

한 학부모는 "바로 옆에 있는 학교를 놔두고 왜 멀리 떨어진 학교로 가는 불편을 겪어야 하느냐"라고 비판했다. 언덕에 위치한 동작고의 운동장은 경문고에 비하면 비좁았다. 좁은 운동장 한쪽에 농구코트를 설치한 탓에, 학생들은 축구를 제대로 즐길 수 없었다.

점심시간에 등교하는 학생들이 눈에 띄었다. 한 학생은 "늦잠을 자고 지금 나왔다"라면서 "대학에 갈 생각은 없고, 직업교육을 받으려고 한다"라고 밝혔다. 이미 대입 수시전형에 합격했다는 또 다른 학생은 "35~40명가량 되는 한 반에 대학을 가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하려는 학생들은 5명 정도에 불과하다"라면서 "나머지는 공부에 큰 뜻을 두지 않고 있다"라고 전했다.

관악구 대학동에 있는 삼성고 역시 경문고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다. 인근 중학교 졸업생 중 상위권 학생들은 경문고나 인근의 미림여고 등 자사고로 진학하는 경우가 많다. 이 학교의 교사는 "자사고가 있기 전에 신입생 중에는 중학교 성적 상위 4% 안에 드는 최상위권 학생들이 더러 있었고, 중위권이 두터웠다"라면서 "지금은 최상위권 학생은 거의 없고, 하위 80% 학생들이 많다"라고 전했다.

그는 "이마저도 학기 초 자사고에서 깡패처럼 상위권 학생을 빼가고, 이후 자사고에 적응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일반고로 보내는 탓에 자사고와 일반고의 격차는 더욱 크다"라고 전했다. 이어 "공부 못하는 아이들은 부족한 실업고 정원 탓에 일반고에 온다, 각 학교들이 이런 학생들을 분담해야 하는데 일반고가 모두 받아 안고 있어 이 학생들을 가르칠 여력이 되지 않는다, 사실상 이 학생들은 방치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삼성고 1학년 학부모 회장인 장희정(51)씨는 자사고 인한 고교 서열화 강화를 우려했다. 장씨는 "최상위권 아이들은 특목고를 가고, 상위권 학생이나 비싼 등록금을 낼 수 있는 학생은 자사고로 빠진다"라면서 "사립고나 각각 남·여학생만 다니는 공립고에 대한 선호가 일부 있다, 결국 이도저도 아닌 학생들이 남녀공학 일반고에 간다, 슬럼화될 수밖에 없다"라고 밝혔다.

"자사고 혹은 위장전입해 강남 학교에 자녀 보낸다"

경문고가 있는 서울 동작구와 관악구 일대에서는 일반고 슬럼화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사진은 지난 18일 동작구 사당3동에 위치한 사당중학교 전경이다. 사당중학교 졸업생 다수는 인근의 동작고·인헌고 등 일반고가 아닌, 경문고와 같은 자사고나 강남의 고등학교로 진학한다.
 경문고가 있는 서울 동작구와 관악구 일대에서는 일반고 슬럼화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사진은 지난 18일 동작구 사당3동에 위치한 사당중학교 전경이다. 사당중학교 졸업생 다수는 인근의 동작고·인헌고 등 일반고가 아닌, 경문고와 같은 자사고나 강남의 고등학교로 진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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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사회에서 일반고 슬럼화는 고착화된 지 오래다. 중학교 3학년생 사이에서는 자사고 선호현상이 강하다. 동작고 인근에 있는 사당중학교의 한 학부모는 "동작고는 안 좋은 학교로 통한다, 학부모들은 경문고와 같은 자사고에 보내거나 위장전입을 해서라도 강남구·서초구 학교로 아이를 보낸다"면서 "동작고로 진학하는 사당중 학생은 전체의 10%밖에 되지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

사당중에서 근무하는 교사는 자사고를 폐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일반고에 가면 공부를 할 수 없다는 인식이 퍼졌다, 공부를 잘하면서 일반고에 가는 학생이 있는데 공부 못하는 학생들 사이에서 내신 성적을 잘 받기 위한 것"이라면서 "교사들도 자신의 자녀를 일반고에 보내는 걸 꺼려한다, 자사고 탓에 일반고가 붕괴됐다"라고 비판했다.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유기홍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서울시교육청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4년 경문고 입학생 중에서 중학교 내신 성적 상위 20% 이내 학생의 비율은 38%였다. 반면, 인근의 일반고인 삼성고·당곡고·신림고의 중학교 내신 성적 상위 20% 이내 학생의 비율은 각각 13.9%, 12.0%, 11.5%에 불과했다.

반면, 경문고에 적응하지 못하는 학생들은 인근 일반고로 전학을 간다. 2013년 경문고에서 인근 일반고로 전학을 간 학생은 32명에 달한다. 또한 부적응 등의 이유로 자퇴한 학생 수도 12명이었다.

경문고 인근 삼성고의 한 교사는 "같은 지역에서의 전학은 안 되지만, 자사고에 적응하지 못하는 학생은 인근 일반고로 전학할 수 있다는 예외규정이 있다"라면서 "이 학생들은 자사고에서 실패했다는 생각에 일반고에서도 잘 적응하지 못한다"라고 전했다.

2013년 폭력 행위 등으로 징계를 받은 학생의 비율도 경문고와 주변 일반고의 격차를 보여준다. 경문고에서 1년 동안 단 한 명의 학생도 징계를 받지 않은 동안, 신림고에서는 전체 학생의 22.9%인 222명이 징계를 받았다. 삼성고와 당곡고에서도 징계를 받은 학생의 비율이 각각 5%, 5.3%였다.

경문고, 4년 연속 정원 미달... "급여 못 받을까 걱정"

일반고를 딛고 올라선 경문고 역시 위태로운 상황에 놓여있다. 매년 모집 정원 미달로 인해 재정 압박을 받고 있다. 경문고는 2009년 자사고 전환 신청서를 제출하면서 교육의 질을 높이겠다고 밝혔다. 그 방법은 재단의 돈이 아닌 학생의 학비를 통해서였다. 학생 1인당 한 학기 수업료·입학금·학교운영지원 회비(옛 육성회비) 등 납입금을 178만5900원에서 395만6000원으로 올리겠다고 계획을 내놓았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경문고가 자사고로 전환한 첫해인 2011년 420명의 신입생을 모집하려고 했지만, 지원자 수는 모집정원을 밑돌았다. 경쟁률은 0.77 대 1이었다. 2012년 모집인원을 350명으로 줄였지만, 미달 사태를 피할 수 없었다. 2014년에는 신입생 모집정원의 74.9%만 채웠다. 그 사이 지원자가 적었던 동양고와 용문고는 일반고로 전환했다.

학교 재단(학교법인 경문학원)의 부담이 커졌다. 경문고가 2009년 자사고 신청서를 제출할 당시 연간 법인 전입금 예상액을 최대 4억5200만 원(2012년)으로 잡았다. 하지만 2013년 법인의 전입금은 11억3407만 원에 달했다.

경문고의 한 교사는 "학생들로부터 받는 돈이 부족하니, 재단에서 부족분의 상당부분을 채워주고 있다, 하지만 언제까지 '깨진 독에 물 붓기'를 할 수 있겠느냐"라면서 "2015학년도에도 신입생 모집이 어려워지면 급여가 나오지 않을 수 있다는 불안감이 있다, 교사 대부분 일반고로 돌아가기를 원하고 있다"라고 전했다.

조대형 경문고 교장은 지난 21일 오후 기자와 만나 "(학교 구성원 중에는) 개별적으로는 다른 생각(일반고 전환)을 가진 분도 있겠지만 다수는 (자사고) 유지를 원한다"라면서 "또한 재단 기본 자산이 튼튼하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다"라고 밝혔다. 또한 "경문고 인근에 사는 학생이 멀리 떨어진 학교로 가야 하는 경우 불편할 수 있겠지만,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


태그:#경문고가 자사고로 전환했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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