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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볶음탕'이라고 적힌 길거리 표지판
 '닭볶음탕'이라고 적힌 길거리 표지판
ⓒ 송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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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와 삼겹살 없이 도대체 어떻게 살았을까 싶다. 요즘처럼 하루하루 사는 게 고단하고, 허탈하고, 짜증나고, 가끔 분노까지 치밀 때는 더 그렇다. 소주와 삼겹살이 없었더라면 그걸 풀 데를 찾지 못해서 폭동이 났을지도 모른다는 농담도 그래서 생겼을 것이다. 요긴하기로는 삼겹살 이상 가는 게 하나 더 있다. 바로 닭이다.

닭은 인류 역사와 함께해 온 가축이다. 옛날 우리네 시골 어머니들은 씨암탉이 낳은 따끈따끈한 계란을 짚 꾸러미에 담아 들고 자식이 공부하는 서당이나 학교를 찾아갔다. 닭 한 마리로 닭개장을 끓이면 대가족이 오랜만에 고깃국을 풍성하게 먹을 수 있었다. 백년손님에게 장모들은 씨암탉을 잡아서 인삼과 대추 등을 넣고 푹 고아낸 백숙을 대접했다.

요즘에 닭고기를 먹는 방식의 주류는 '치킨'일 것이다. '치킨(chicken)'은 본디 '닭'을 이르는 영어 단어다. 이게 토막 낸 닭고기에 양념을 발라서 기름에 튀겨낸 음식의 대명사가 된 지 오래다. 월드컵 경기가 있는 날은 하루에 무려 닭 150만 마리가 튀겨진다고 한다. 평상시에도 그 어름이 될 게 분명하다. 물론 '치킨'은 전통 음식이 아니다.

백숙과 더불어 우리의 전통적이고 대표적인 닭요리 중 하나가 닭도리탕이다. '닭도리탕'은 '토막 낸 닭고기에 파, 마늘, 간장, 설탕 따위의 양념과 물을 넣고 끓인 음식'이다.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면 '닭볶음탕'도 글자 하나 다르지 않게 설명되어 있다.

그 '닭도리탕'이라는 이름이 점점 천대와 탄압을 받고 있다. 근본도 뼈대도 없는 '닭볶음탕'이 대접받는 추세다. 컴퓨터로 문서를 작성할 때 가장 널리 쓰는 '한컴오피스 한글' 프로그램에서도 '닭도리탕'을 쓰면 붉은 밑줄이 그어진다. 표준말이 아니니 당장 '닭볶음탕'으로 바꿔 쓰라는 뜻이다. 물론 '닭볶음탕'에는 붉은 줄이 없다.

고스톱 판 용어로 '고도리'라는 게 있다. 물경 5점짜리로 오광과 동급이다. 점당 천 원짜리 판이면 일거에 만 원이 들어온다. 물론 양피박이면 거금 이만 원이다. 그 '고도리'는 일본말이라는 게 정설이다. 뜻 그대로 '다섯 마리 새'다. 새가 그려진 십 끗짜리 화투 석 장에 그려진 새의 숫자를 합치면 모두 다섯 마리다.

새삼스럽게 고스톱 얘기를 꺼냈다. '닭도리탕'이 괄시받는 이유 중 하나가 엉뚱하게도 '고도리'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핵심은 그거다. 아무리 오랫동안 친숙하게 불러온 음식 이름이라 해도 '닭도리탕'에 들어 있는 '도리'가 '새'를 뜻하는 일본말인 것 같으니 쓰기가 께름칙하다, 이참에 아예 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고도리'가 일본말이라고 해서 '닭도리탕'의 '도리'도 일본말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가. 혹시 억지소리는 아닐까. 더구나 음식 이름의 경우 문헌에 명백히 제시된 어원을 밝힐 수 없으면 관련 학자들조차 가설로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고 한다. 그런데도 오랫동안 써 왔던 '닭도리탕'이 마치 AI에 감염된 닭이나 오리 취급을 받고 있다. 

'닭도리탕'을 함부로 살처분할 이유가 없다. '도리'를 순 우리말 '도리다'에서 따온 것으로도 얼마든지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닭도리탕'을 '닭의 살을 도려서 끓인 탕'으로 보면 되는 것이다. 물론 '도리다'는 어떤 것을 '둥글게 잘라내다'라는 뜻이기 때문에 닭고기를 '토막내서' 조리하는 것하고 같은 뜻으로 보기 어려운 측면도 있긴 하다.

왜 애꿎은 닭도리탕만 가지고...

백 번을 양보해서 '닭도리탕'의 '도리'가 일본말이라고 치자. 그렇다면 그게 일본말이니까 민족적 자존심을 살려나가기 위해서라도 절대 써서는 안 된다는 건가. 일부의 의견대로 뜻풀이를 하면 '닭새탕'이 되니 이상해서인가. '닭도리탕'의 '닭'과 '새'가 충돌되어서 잘못이라면 '처갓집'은 '처가'의 '가(家)'하고 순우리말 '집'이 겹치는데 왜 표준말로 인정하는가.

그런 점에서라면 '닭볶음탕'도 오십 보 백 보다. '볶음'과 '탕'은 조리 방법이 크게 다르다. 감자나 양파 같은 식재료를 볶을 때는 기름 외에는 물을 쓰지 않는다. 소뼈를 고아서 우려내는 '곰탕', 제사상에 올리는 '탕국', 한약을 달여서 만드는 '탕약'처럼 '탕'은 물을 주로 쓰는 조리법이고 음식이다.

'볶음'과 '탕'은 하나의 음식 이름으로 나란히 어울려 쓸 수 없는 말이라는 뜻이다. 물론 이 두 말에는 일본말의 흔적이 없다. 순우리말(볶음)이거나 한자말(탕)이다. 그러니까 '닭볶음탕'의 경우는 예외로 인정해서 말의 조합이 아무리 어색해도 겹쳐 쓸 수 있다는 건가.

오랜 식민지 시절을 겪은 탓에 우리 생활 속에 일본말의 흔적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 건 사실이다. 그걸 우리말로 순화시켜 쓰자는 데 반대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그것도 지나치면 밴댕이 속처럼 옹졸해 보일 수도 있는 법이다.

'우동'을 쓰고 있는 거리 간판
 '우동'을 쓰고 있는 거리 간판
ⓒ 송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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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나 '택시'는 본디 영어지만 우리말로 쓰고 있다. 바꿔 쓸 우리말도 없다. 마찬가지다. 일본말이라고 해서 무조건 색안경을 끼고 보는 건 요즘 애들 말로 좀 그렇지 않은가 싶다. '오뎅'을 '어묵'으로 순화 시킨 건 물론 잘 한 일이다. 그런데 '가락국수'라는 좋은 우리말이 있는데 일본말인 '우동'에 대해서는 어째서 누구도 시비를 걸지 않는지 모르겠다.

모두에게 익숙한 '닥도리탕'을 두고, 발음하기도 복잡한 '닥뽀끔탕'을 굳이 써야 하겠는가. 고스톱 판에서 '고돌이'는 잘도 외쳐대면서 음식은 '닥뽀끔탕'을 시켜서 '와리바시'로 집어먹는 심사는 또 뭐란 말인가. 말이든 사람이든 정작 없애야 할 친일의 잔재가 수도 없이 많은데 애꿎은 '닭도리탕'만 갖고 왜들 그러는지 모르겠다.


태그:#닭도리탕, #닭볶음탕, #친일 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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