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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관악구 신림동의 한 헌책방.
 서울 관악구 신림동의 한 헌책방.
ⓒ 홍성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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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긴 지는 오래됐는데 발길이 쉬이 가닿지 않았다. 인터넷을 통해 클릭 몇 번으로 책을 구할 수 있는 시대. 서점에서 책을 사본 건 내게도 먼 기억이다.

10여 년 전 한 인터넷신문에서 세칭 '문학-출판기자'를 맡기 시작한 시절부터는 내 돈을 주고 책을 사는 일 자체가 드물어졌다. 출판사에서 홍보를 부탁하며 보내오는 책도 다 읽어내기가 벅찼으니까,

그 일을 그만두고 문예잡지 편집장을 할 때도 마찬가지. 주위에 책은 널려 있는데 시간이 없었다. 정치인들의 '책 관련 대담 프로그램' 대본을 쓰는 요새도 마찬가지. 일 주일에 한두 권, 정치인이 추천하는 책을 읽어내기에도 이래저래 시간이 모자란다.

지금이야 책에서 멀어진 중년이 됐지만, 열여덟부터 '문학청년'이었던 내가 책과 서점에 얽힌 일화가 없을 리 없다. 공저와 대필을 포함 모두 9권 책의 저자가 된 내게도 '집필시대'가 아닌 '독서시대'가 있었다.

아래는 서울 관악구 신림동 헌책방에 서서 옛날 책을 읽으며, 떠올린 서점과 책에 관한 기억, 그 편린 세 조각이다.

신림동 알라딘 중고서적 벽면에 그려진 시인 고은.
 신림동 알라딘 중고서적 벽면에 그려진 시인 고은.
ⓒ 홍성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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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학문당] 철없는 고교생, 시인을 꿈꾸다

1988년은 내게 서울올림픽이 있었던 해가 아니라 시인 김남주와 아르튀르 랭보를 만난 해로 기억된다. 마산의 번화가인 창동 중심에 자리 잡은 학문당 서점. 고등학교 2학년 시절의 여름방학. 당시 1만5000원의 한 달 용돈 중 큰 부분을 허물어 김남주 시집 <나의 칼 나의 피>와 불문학자 김현이 번역한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랭보의 시집을 샀다.

그 두 책을 아까워 야금야금 읽으며 결심했다. '대통령이 아니라 시인이 되리라'고. 시가 세계의 변혁에 어떻게 관여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 김남주의 시들과 예민한 영혼으로 상처 받은 심장을 안고 문명의 절정 파리를 떠나 북아프리카를 향한 랭보의 '방랑벽'은 뒤늦게 닥친 사춘기에 무엇에도 열망을 느끼지 못했던 '한 소년'을 사로잡았다.

전집류의 세계명작동화와 위인전에서 벗어나 단행본이 주는 매력에 흠뻑 빠진 나는 이후로도 용돈의 70%를 '창작과비평' '문학과지성' '세계사'에서 출간된 국내외 작가의 시집을 사는데 사용했다. 그때부터 당구와 군것질을 끊었다.

그랬는데, 그 추억의 공간 '학문당 서점'이 경영난으로 폐업 위기라는 기사를 지난 1월에 읽었다. 슬펐다.

신림동 알라딘 중고서적 벽면에 그려진 소설가 황석영.
 신림동 알라딘 중고서적 벽면에 그려진 소설가 황석영.
ⓒ 홍성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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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동보서적] 혁명의 지도는 책에 그려져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부터 스무 살 초반까지는 부산 동보서적을 자주 들락거렸다. 이 서점 역시 부산 서면 한복판에 있었다. 놀랍게도 그때는 유흥주점이나 비싼 외국계 커피전문점이 아닌 서점을 해서 '살인적인 임대료'를 낼 수 있었던 모양이다.

세칭 '운동권'이었던 사촌형들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 그때 동보서적에서 사 모았던 책은 <루드비히 포이에르 바하와 독일고전철학의 종말> <프랑스혁명사 3부작>, '즉자적 민중'과 '대자적 민중'을 이야기하던, 지금은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 한완상의 책 등이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칼 마르크스. 그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폼'이 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책을 산 지 30년이 넘도록 나는 아직 두 권 모두를 완독하지 못했다. 버리지 않고 엄마 집에 있으니 언젠가는 읽겠지라고 낙관해 본다.

그랬다. 그 시절 혁명을 꿈꾸는 청년들의 기본은 '낙관주의'였다. '우리의 싸움을 통해 언젠가는 좋은 세상이 오겠지'라는. 그런데... 그 '좋은 세상'은 아직 오지 않은 것 같으니, 낙관도 이젠 힘이 빠진 것인지.

그랬는데, 그 추억의 공간 '동보서적'이 경영난으로 2010년 가을에 폐업했단다. 슬펐다.

신림동 알라딘 중고서적 벽면에 그려진 소설가 이문구.
 신림동 알라딘 중고서적 벽면에 그려진 소설가 이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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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삼복서점] 한꺼번에 책 10권 사던 행복

20대의 몇 년을 '빛고을' 광주에서 보냈다. 1995년 24살, 일생 처음으로 '원고료'라는 걸 받았다. 글을 써서 돈을 받은 최초의 경험. 지금 기억으론 8만 원쯤이었던 것 같다. 술값으로 절반을 떼놓고 금남로 한복판 삼복서점을 찾았다. 일 주일이면 한두 번은 가던 곳.

한꺼번에 10권 가까운 책을 샀다. 열화당에서 출간된 <캐테 콜비츠와 노신> 보들레르의 <화가와 시인> 문예사조를 문고판으로 정리한 <초현실주의>와 <상징주의>, <다시 문제는 리얼리즘이다> 등.

묵직한 책의 양감이 느껴지는 가방을 메고 친구들과 싸구려 고깃집으로 몰려가 고추장 양념을 바른 돼지고기를 우걱우걱 먹으며 보배소주를 마시던 기억이 아직도 선연하다. 그랬다. 당시의 나는 '책을 읽고 시를 쓰는 사람만이 행복할 수 있다'는 미망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랬는데, 그 추억의 공간 '삼복서점'이 경영난으로 2008년 가을에 폐업했단다. 슬펐다.

신림동 알라딘 중고서적 벽면에 그려진 소설가 김승옥.
 신림동 알라딘 중고서적 벽면에 그려진 소설가 김승옥.
ⓒ 홍성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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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이 사라진 시대... 참혹하구나

동네마다 조그만 책방이 있던 1970~80년대는 이미 '구석기의 기억'이고, 헌책방에 서서 몇 시간이고 '훔쳐' 책을 읽던 학생들의 시대는 갔다. 이제 몇몇 대형서점만이 살아남아 '한국에도 책방이 있었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21세기. 그것도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것에 그치고 있는 2014년.

더 이상 책을 읽지 않는 것이 부끄러움이 될 수 없는 오늘. 더위 탓만은 아닌데, 자꾸만 미열이 온다. 참혹하다. 나만 그런가?

여름, 신림동 헌책방에서 오래된 책의 냄새를 맡으며 '유년의 기억' 속을 유영하다 문득 든 생각. 아, 이제 사람들은 어디에서 세상과 인간을 배우지? 책이 아닌 어떤 것에서?


태그:#헌책방, #동보서적, #삼복서점, #학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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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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