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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준 작. 이소선 여사 추모 그림
▲ 위대한 어머니 김봉준 작. 이소선 여사 추모 그림
ⓒ 김봉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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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성대회를 마치고 12월 1일 집행부에서 일 할 부서부장을 뽑았다. 총무 부장 신기호, 조직부장 이승철, 조사통계부장 김태원, 교육선전부장 최종인, 법규부장 서윤석, 부녀부장 김명례 등 이로써 집행체계가 잡혔다.

그런데 노동조합을 결성해놨지만, 삼동회와 그밖에 전태일 사건에 영향을 받아 참여하는 소수의 노동자들밖에 노동조합 활동을 하지 않아 노조의 생명인 조직이 매우 취약했다. 그 원인은 사용주와 정부 당국에 있었다. 이들은 '노동조합에 깡패들만 모여있다'느니, '전태일이 개인문제 때문에 비관해서 자살을 했다'느니 하는 온갖 악의적인 거짓 선전을 퍼뜨렸다. 이것 때문에 일반 노동자들이 노조 가입을 꺼렸다.

이에 노조에서 최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조합원을 많이 가입시키고, 나아가 조합원을 조직화하는 작업으로 정했다 조합 간부들은 노동조합 가입을 권유하는 내용을 녹음해 날마다 각 공장을 순회했다. 평화시장을 중심으로 피복제품 공장은 청계천 일대와 을지로 일대에 수백 개가 산재해 있어 한 공장씩 일일이 찾아다녀야 했다.

업주들이 하도 악선전을 해대서 노동자들의 호응이 신통치 않자 조합 간부들은 아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노조에 대한 교육과 설득을 해 공장마다 무더기로 가입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차츰차츰 노동자들의 호응이 높아지자 사업주들은 노골적으로 노조가입을 방해했다. 거짓 악선전은 물론 노동자들의 출입을 통제해 작업 중 화장실에 가는 것도 제한하고, 심지어는 점심시간에 바깥 출입하는 것까지 감시했다.

이소선은 우선 20대 초의 한창 팔팔한 나이의 조합간부들한테 복장이며 조합원과 사용주를 만날 때 지켜야 할 예의 같은 것을 일러줬다. 그리고 전태일의 친구들과 창동(행정구역상 이소선의 집은 쌍문 2동이었지만 이들은 흔히 창동이라 불렀다) 집에서 함께 먹고 자면서 문제를 풀어나가기로 했다.

노동청 직원의 비아냥... 열불이 났다

노조를 하려면 우선 돈이 필요했다. 한두 식구도 아니고 조합간부들이 이소선의 집에서 함께 생활을 하는 데도 적잖은 돈이 필요했다. 다행히 전태일의 장례 때 각계각층에서 들어온 조의금이 상당히 남아 있었다. 그 돈을 우선 급한 대로 노조운영자금으로 썼다.

이소선은 생활비며 조합ㅍ간부들을 단정히 보이기 위해서 이것저것 사주다 보니 얼마 못 가서 돈이 바닥나버렸다. 난감했다. 노조사무실에 출근하면 최소한 밥은 먹어야 하는데 끼니 때울 돈이 없었다.

며칠간은 종로5가에 있는 김성길 지부장 집에서 밥을 해서 들통에 담아와서 낮에는 그것을 먹고 저녁에는 그 들통에 조금 남아 있는 걸로 죽을 끓여 먹었다. 이 노릇도 하루 이틀이지 오래 할 수는 없었다. 돈도, 먹을 것도 다 떨어지고 간부들은 힘이 빠져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이때 노동청 직원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노조 간부들이 허기진 모습으로 의자에 기대어 있는 모습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허! 역 대합실처럼 축 처져서 앉아 있구먼. 노동운동은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간부들이 나가서 열심히 일을 하고 돈을 벌어 와서 노동조합을 운영해야지 이렇게 밥이나 먹고 풀어져 있으면 노동운동 한다고 볼 수 없지요."

뒤따라 들어온 형사들도 빈정거리며 덩달아 놀렸다. 이소선과 노조 간부들은 속으로는 열불이 나지만 자존심은 남아 있어 굶고 있다는 표시를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의 말을 감정적으로 받아넘길 수가 없었다. 간부들이 현장을 돌면서 작업을 해야지 배가 고파서 넋이 빠져 있으면 어떻게 노동조합을 꾸려나갈 수 있을 것인가. 이들은 스스로 심각하게 반성하고 새롭게 계획을 짰다.

노조의 결단 "현장으로 돌아가자"

우선 손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상근자를 줄이는 것이었다. 비상근 간부들은 현장에서 일을 해서 운영비로 쓸 돈을 벌기로 했다. 청계노조는 사실 활동 범위가 워낙 넓고, 수많은 사업장이 흩어져 있어서 상근간부가 많이 필요했다.

더군다나 이제 막 걸음마를 한 처지에서 보더라도 하루 빨리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상근자가 많아야 했다. 그래도 상근자를 대폭 줄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현장에 취직하기로 했다. 그러나 사업주가 조합간부들을 받아주지 않아 현장으로 돌아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추운 겨울에는 돈이 없으니 난로도 제대로 피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동대문시장에 가서 생선 궤짝을 주워 왔다. 그것으로 난로에 불을 지피면 생선 타는 냄새가 심하게 코를 찔렀다.

"앗따, 고기 먹는 기분이다! 콧구멍이라도 기뻐서 사는 것 같구만."

간부들은 난로에 빙 둘러앉아 코를 쥐어 막으며 우스갯소리를 늘어놨다. 어떤 때는 24명이 점심을 먹으려고 라면 여덟 개를 사왔다. 라면 여덟 개를 24명이 먹으려면 물을 많이 넣고 오래 끓여야 했다. 라면이 퍼져서 양이 많아져야지 한 입이라도 더 먹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태그:#이소선, #전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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