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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아직도 그 골동품 들고 다니니?"

때때로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이런 핀잔을 듣는다. 나는 어쩐지 겸연쩍어져서 문제의 그 물건을 슬쩍 가방에 집어넣는다. 내 친구들의 말마따나 나에게는 '골동품'이 하나 있다. 이것은 동그랗다. 뚜껑이 열린다. 몇 개의 구멍도 있다. 바로 '시디 플레이어'(CD Player)다. 나름 전기가 있어야 사용할 수 있는 첨단(?)기기인데도 벌써부터 골동품 취급을 받는다. 시디 플레이어의 처지가 가련해진다.

친구들의 호기심 어린 또는 이상스런 눈길에도 나는 꿋꿋이 시디 플레이어를 애용한다. 사실 나도 워크맨이나 시디 플레이어 세대는 아니다. 내 기억에 초등학생 무렵부터 이미 MP3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시디 플레이어를 좋아하게 됐는지 의아할 때가 있다. 스스로도 궁금해져서 가만가만 기억을 되짚어 보니, 열다섯 살 어느 더운 여름의 교실 풍경이 불현듯 내 눈앞에 펼쳐진다.

친구들이 '골동품'이라고 놀리는 시디 플레이어. 하지만 나는 그의 '도르륵'하는 심장 소리가 좋다.
▲ 시디 플레이어와 CD 친구들이 '골동품'이라고 놀리는 시디 플레이어. 하지만 나는 그의 '도르륵'하는 심장 소리가 좋다.
ⓒ 조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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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의 심장 소리처럼 느껴진 '도르륵' 소리

2004년이었다. 다들 한 차례씩 사춘기의 열병을 앓았을 그 무렵, 우리 반에는 항상 시디 플레이어로 음악을 듣던 남자아이가 있었다. 쉬는 시간이면 왁자지껄한 가운데 조용히 자기자리에 앉아 커다란 헤드폰을 끼고 말없이 CD를 듣고는 했다.

무엇을 듣고 있는지 궁금해서 슬쩍 옆을 지나갔다. 책상을 바라보니 처음 보는 앨범 자켓에 내가 모르는 가수의 이름과 앨범명이 영어로 적혀 있었다. 눈여겨 보았는데도 글씨가 작아서 'Ca...' 정도밖에 알아볼 수 없었다. 나는 그 아이와 말을 해보고 싶었다. 그 애가 듣는 음악을 나도 들어보고 싶었다.

어떻게 할지 며칠을 고민하다가 '이거다!'싶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날 학교에서 집에 돌아오자마자 당장 내 책장을 뒤졌다. 하지만 당시 나는 CD라고는 몇 장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그마저 그 친구가 관심 있어 할 만한 앨범은 한 장도 없었다. 나는 단숨에 음반사로 달려갔다. 팝송이라고는 문외한이었던 내가 직원의 도움을 받아가며 어렵게 CD 한 장을 골랐다. 다음 날 나는 그 아이에게 내 CD를 내밀며 이렇게 외쳤다. "나랑 바꿔 듣자!" 그 친구는 조금 어리둥절해 했지만 순순히 자기 CD와 바꿔주었다. 내가 시디 플레이어가 없는걸 알자 자기는 집에 하나 더 있다며 사분사분하게도 자기 시디 플레이어까지 함께 빌려줬다.

빌린 시디 플레이어를 소중히 품고 독서실에 공부를 하러 갔다. 어두운 독서실의 내 자리에 앉아서 시디 플레이어의 세모 버튼을 떨리는 손으로 꾹 눌렀다. '도르륵'하고 CD 돌아가는 특유의 소리가 나더니 이윽고 기타와 드럼소리가 나지막이 내 귓가에 울렸다. 나는 시디 플레이어를 손에 꼭 쥔 그 자세로 미동조차 하지 않고 마지막 트랙까지 숨죽여 들었다. 가만가만 음악에 섞여 들리는 시디 플레이어의 '도르륵' 소리가 내게는 그 애의 심장 소리처럼 느껴졌다. 도르륵 도르륵... 도르륵 도르륵...

시디 플레이어 속에서 CD가 돌아가듯 내 삶 속에서 그 애에 대한 사랑의 CD도 느린 템포로 오래오래 돌아갔다. 찌릿찌릿했던 사랑의 전기가 떨어져 그 CD가 멈춰 버린 이후로도 나는 한동안 시디 플레이어만을 고집하며 음악을 들었다.

시디 플레이어를 애용하게 되자 자연스레 음반사에 가는 일이 잦아졌다. 어느덧 음반사 벽에 붙어있는 시디 플레이어로 추천음악을 듣는 일이 익숙해졌다. 여러 앨범 자켓을 구경하며 마음에 드는 CD를 발견하는 것은 나의 소소한 취미가 됐다.

MP3를 다운받아 듣는 것보다 돈이 많이 드니까 듣고 싶은 음악 CD를 신중하게 고르고, 더 정성 들여 들었다. 또한 가사집에 적혀 있는 가수의 메시지를 읽을 때의 설렘, 숨어 있는 히든트랙을 들었을 때의 두근거림, 이 모두가 나의 큰 기쁨이었다.

'느린' 나라 프랑스에서 재회한 너 

그러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시디 플레이어에 얽혀 있던 함초롬한 감성은 힘을 잃고 나는 다시 MP3로 돌아왔다. 힘들게 음반사에 갈 것 없이 인터넷에서 파일을 다운받고, 저장하고, 재생했다. 질렸다 싶으면 금방 재생목록을 갈아엎었고 손쉽게 음악을 들었다. 정말 좋아하는 가수가 아니고서야 앨범 전체가 아닌 몇 개 타이틀곡만 들어보고 '이 가수에 대해서는 들을 만큼 들었다'라고 여기는 못된 자만심도 생겨났다.

전자사전이나 핸드폰에 딸려있는 MP3 기능으로 음악을 들을 때면 더더욱 음악 자체에 대한 태도가 가벼워졌다. 음악 전용 기기가 아니라 그런지 음악은 '곁다리'처럼 느껴졌다. 다르게 말하자면 '지금 이 노래를 듣고 싶어!'하는 강렬한 감정이 사라졌다고나 할까? 문자 보내다 심심하면, 인터넷 검색하다 지루하면, '아, 음악이나 들을까?'하는, 심심풀이 땅콩을 찾는 마음이었다.

그런 내가 옛 친구 시디 플레이어와 재회를 한 것은 프랑스로 1년 연수를 갔을 때였다. 한국이 디지털의 나라라면 프랑스는 아날로그의 나라 같았다. 전산망이 잘 구축되고, 뭐든지 빠르게 돌아가는 한국과는 조금 달랐다. 약간은 느릿하고, 조금은 불편하지만 여유가 느껴지는 곳이었다.

그 나라의 노래를 많이 들어보고 싶었지만 기숙사 인터넷은 너무 느렸다. 설상가상으로 입국한 지 얼마 안 되서 노트북마저 고장났다. MP3파일을 구하기도, 기기에 저장하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책이나 읽으러 도서관을 갔는데 놀랍게도 그곳에 음악 CD가 가득 쌓여 있었다! 회원 등록을 하면 파리 어느 도서관에서나 내가 원하는 CD를 한 번에 여러 장 빌려갈 수 있었다.

그 날부터 도서관에 들락거리는 내 발걸음이 부지런해졌다. 7~8여 년 전 그 때와 마찬가지로 수북이 쌓여있는 CD 사이에서 즐겁게 헤매며 '오늘은 무엇을 들을까'하는 행복한 고민을 했다. 정성껏 고른 CD들을 고이 모셔오면 어디서나 간질간질 음악을 들려주는 나의 시디 플레이어가 있었다.

학교 가는 길에, 잔디밭에 누워 하늘을 볼 때, 자기 전 침대 위에서,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우리는 함께했다. 시디 플레이어는 음악밖에 모르는 친구다. 나 역시 시디 플레이어와는 '딴짓'을 할 수 없다. 이렇게 우리는 많은 시간을 함께했다.

프랑스 유학 시절, CD를 들으며 도서관을 오가는 길은 언제나 정겨웠다. 도서관에 그득하게 쌓여 있는 CD들은 큰 즐거움이었다.
▲ 도서관 가는 길 프랑스 유학 시절, CD를 들으며 도서관을 오가는 길은 언제나 정겨웠다. 도서관에 그득하게 쌓여 있는 CD들은 큰 즐거움이었다.
ⓒ 조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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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디 플레이어가 나에게 가르쳐준 것

시디 플레이어는 나에게 '천천히'를 가르친다. 앨범을 고르는 것, 그 앨범에 적지 않은 돈을 지불하는 것, 그것을 집으로 가져오는 것, 타이틀곡과 상관없이 1번 트랙부터 천천히 재생해 귀 기울여 듣는 것, 그리고 CD를 소중하게 보관하는 것까지... 이 모든 것들에 시간과 정성이 필요하다. 절대 클릭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비단 시디와 관련된 일에 관해서만 '천천히'를 배우게 된 것이 아니다. 공부를 할 때도, 산책을 할 때도, 사람을 만나 대화를 할 때도, 난 그 시간들을 여유를 가지고 음미하기 시작했다. 매 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깊게 생각하고 신중하게 행동에 옮겼다. 해가 뜨는 아침의 1번 트랙부터 밤하늘에 별이 보이는 마지막 트랙까지 내 삶의 모든 음악에 주의 깊게 귀 기울였다.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져 당황스러울 때조차 히든 트랙을 찾아내 들은 것 마냥 기뻐하고 깔깔댔다.

그 시간들이 내게 의미 있다. 모든 게 순식간에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대사회에서, 이 약간의 '느린' 시간이 내게 숨 쉴 시간을 함께 부여한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친구들의 핀잔을 뒤로하고 시디 플레이어와 함께한다. 도르륵 도르륵... 또 심장소리가 들린다. 누구 것일까. 음악을 들려주는 너, 아니면 그것을 듣는 나? 아니면... 조금 느리게 살고 싶어진 당신?


태그:#씨디플레이어, #CDP, #골동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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