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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의 국부로 추앙받던 노로돔 시하누크 국왕의 유골안치식이 열린 프놈펜 왕궁의 전경
 캄보디아의 국부로 추앙받던 노로돔 시하누크 국왕의 유골안치식이 열린 프놈펜 왕궁의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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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일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 왕궁. 장엄한 분위기의 전통음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시하누크 왕의 유골이 담긴 다이아몬드 박힌 황금유골함과 에메랄드빛 대리석 사리함이 실린 운구차량이 왕궁 문을 서서히 빠져나왔다. 이어 101발의 예포가 울려 퍼졌다. 화려한 운구차량의 뒤를 이어 왕실가족이 탄 차가 왕궁 앞을 지나갔고, 약 2만 명에 이르는 행렬이 그 뒤를 따랐다.

캄보디아 국민들의 추앙과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노로돔 시하누크 국왕의 유골 안치행사가 거행된 이날, 수만 명의 국민들이 노변에서 연꽃을 든 채 국왕에게 마지막 인사를 고했다. 국왕의 유골을 실은 운구행렬은 역대 왕들의 이름을 딴 대로를 따라 독립기념탑 주변을 한 바퀴 돈 뒤 사원 문 앞에 도착했다. 그의 영혼은 왕비와 그의 아들이자 현 국왕인 시하모니의 마지막 배웅을 받으며, 영원한 안식처인 실버파고다 사원 안으로 들어갔다. 

동남아 '정치 풍운아'였던 노로돔 시하누크 국왕은 지난 2012년 10월 15일 90세의 나이로 중국 베이징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그러나 장례식은 3개월 후인 지난 2013년 2월 초 왕궁 옆 메루 정원에서 치러졌다. 장례는 불교국가답게 다비식으로 치러졌다. 전 세계에서 급파된 300여명이 넘는 외신 기자들이 열띤 취재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20세기 동남아 정치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그는 오랜 프랑스 식민통치를 종식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캄보디아 황금기인 1950~60년대를 이끌기도 했던 시하누크 국왕은 1970년대 악명 높은 크메르루주 정권으로 인해 벌어진 수난의 역사를 겪기도 했다. 그는 또 오랜 내전을 종식시키고, 1990년대 평화의 시대를 이끈 인물이기도 한다.

왕실 관례 거부하고 딸 옆에 잠든 국왕

지난 10일(현지시각) 국왕유골아치식에 참석하기 위해 전국 각처에서 불교승려들이 왕궁앞으로 향하고 있는 모습.
▲ 노로돔 시하누크 국왕 유골안치식날 아침 풍경 지난 10일(현지시각) 국왕유골아치식에 참석하기 위해 전국 각처에서 불교승려들이 왕궁앞으로 향하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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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센정부는 지난 10일~12일까지를 국왕 공식 애도기간으로 선포했고 선왕의 유골안치행사가 열린 11일을 임시국경일로 정했다. 첫째 날엔 8000명에 이르는 승려들의 기도회가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시간까지 왕궁 앞에서 열렸다. 행사 둘째 날엔 성대한 유골안치행사가 열렸다. 마지막날엔 왕실가족과 고위관료들만 참여한 가운데 왕의 유골을 왕실사원인 실버파고다 스투파에 안치했다.

캄보디아 왕실 관례에 따르면, 국왕의 화장된 유골은 과거 이 나라의 옛수도인 우동 산자락 스투파와 왕궁, 실버파고다 사원 등 3곳에 나누어 안치해야 한다. 그러나 시하누크 국왕은 자신이 애지중지 아꼈지만, 4살 때 풍진으로 세상을 떠난 막내딸 칸타 보파공주와 함께 있기를 바랐다. 결국 그의 유언에 따라 지난 12일 시하누크 유골은 실버파고다 사원 내 보파공주의 유골이 안치된 스투파에 합장되었다.

1941년 18살의 어린 나이에 국왕 자리에 오른 그는 진중하지 못한 성격에 여자와 승마, 영화를 좋아하는 장난기 많은 소년이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당시 캄보디아를 식민통치하던 프랑스는 그를 최고의 왕위계승 적임자(?)로 판단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판단은 완전히 빗나갔다. 그가 프랑스의 기대를 저버리고 국가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기 시작했기 때문. 물론 변덕스런 성격 탓에 독립의 과정이 순탄치 않았지만, 독립을 향한 그의 끈질긴 노력과 열정 덕에 1863년부터 시작된 90년간의 기나긴 식민시대는 마침내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1953년 독립과 함께 국민들의 존경과 인기를 한 몸에 받기 시작한 그는 자주국가 건설과 조국 근대화에도 힘을 기울였다. 수도 프놈펜을 '동양의 파리'라고 불릴 만큼 아름다운 도시로 만들었고, 도시지역의 번영과 경제성장에 주력했다. 하지만 권력을 향한 불타는 야심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국민적 지지와 인기를 발판삼아 자신의 왕위를 아버지에게 거꾸로 되돌려 주고, 직접 정치무대에 나섰다. 직접 총리 후보로 나선 총선에서 90%대의 지지율을 얻는 등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베트남전쟁 시작과 함께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던 그의 화려한 전성시대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의 변덕스런 성격에서 비롯된 좌충우돌식 정치가 화를 자초한 것이다. 당시 미국의 공습으로 50만 명의 무고한 국민이 목숨을 잃었는데, 공산베트남군의 역내 진입을 묵인하고 지원한 그의 선택이 원인으로 작용했다. 결국 그는 1970년 우익쿠데타로  권좌에서 물러나 정처 없는 망명생활을 시작했다.

시하누크 국왕과 평생을 함께한 모니크 왕비

세상을 떠난 남편 시하누크 국왕의 영혼을 기리며 기도하고 있는 모니크 왕비의 모습.
 세상을 떠난 남편 시하누크 국왕의 영혼을 기리며 기도하고 있는 모니크 왕비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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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는 소문난 파티광이자 예술과 음악에도 소질이 많았던 특이한 인물이었다. 심지어 망명시절에도 그의 밤샘 파티연회는 줄어들지 않았다. 직접 작사 작곡을 할 만큼의 음악적 재능도 있었고 영화감독과 연출을 한 것도 모자라 주연으로 나선 적도 있었다. 그는 여성편력가로도 유명했다. 공식적으로 무려 7명의 아내를 두었다. 지금의 왕비는 그의 7번째이자  마지막 왕비인 모니크(Monique)다.

시하누크 국왕은 살아생전 늘 입버릇처럼 모니크 왕비를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가장 아름다운 왕비'라고 말하곤 했다. 출중한 미모와 교양을 겸비하고, 불어, 영어 등 외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세련된 아내는 그에게 늘 '트로피(?)'와 같은 존재였다.

왕좌에서 스스로 물러나 권력을 쥐락펴락 하던 50~60년대부터 갑작스런 우익쿠데타로 망명시절을 보냈던 70년대에도, 폴포트가 이끄는 크메르루주 정권 당시 수년간 가택연금을 당하면서 죽음의 공포 속에서 살 때도, 1993년 평화협정을 통해 캄보디아로의 화려한 귀환을 준비할 때도, 2012년 중국 베이징에서 세상과 작별할 때도 늘 그의 곁엔 지금의 왕비가 있었다. 그의 유별난 취미생활들은 죽을 때까지 여전했지만, 적어도 모니크 왕비와 결혼 후로는 더 이상 여자문제 만큼은 터져 나오지 않았다.

캄보디아 근대사를 깊이 알지 못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1970년대 중후반 200만 명 양민 대학살을 일으킨 킬링필드 시대가 '폴포트'라고 불리던 오직 한 인물의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캄보디아 대다수 평범한 국민들만큼은 시하누크 국왕이 '킬링필드'의 원인 제공자라는 역사적인 사실을 아무도 믿거나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사실 1960년대 후반 당시 폴포트가 이끄는 크메르루주군은 정부군과는 비교가 안 되는 수천여 명의 비정규 공산게릴라들이었다. 그런 작은 소규모 군 조직이 수십만 명의 군대조직으로 발전할 수 있게 만든 장본인은 놀랍게도 바로 노로돔 시하누크 국왕이다.

그는 망명생활을 하던 1970년대, 자신을 지원해준 중국과 전 세계 여러 나라를 전전하면서 단파라디오 방송을 통해 자신을 배신하고 생긴 친미성향의 론놀정부를 무너뜨리라고 독려했다. 미국의 무차별 비행기 폭격에 하루 아침에 고아가 된 소년들이 시하누크 국왕의 이 말 한마디에 AK소총을 들고 폴포트가 이끄는 반정부 게릴라군에 속속 합류했다. 그리고 이념이나 정치신념도 없는 그저 어린 10대 군인들은 오직 '왕의 군대'라는 자부심만으로 뭉쳤다. 시하누크 국왕 자신도 이들이 자신의 군대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1975년 4월 17일 프놈펜 함락 직후 시하누크 국왕은 정권의 꼭두각시를 내세우려는 폴포트 정권의 계략에 의해 결국 배신을 당했다. 수년간 자신이 키운 크메르루주 어린 병사들에 의해 왕궁 내 가택연금을 당한 채 죽음의 위기를 맞았다가 간신히 살아남았다.

무고한 양심이 학살당하던 3년여 동안의 킬링필드 시절, 그도 모르는 사이 그의 자식들과 손주들도 15명이나 목숨을 잃었고 왕비의 언니 나네트 공주와 남편도 폴포트 정권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굳이 따지자면, 그도 피해자인 셈이지만 그가 역사의 죄인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다. 이 때문에 1998년부터 시작된 크메르루주 특별재판 명부에 그의 이름도 올라가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냉정한 국제사회 평가, 하지만 캄보디아인들은...

노로돔 시하누크 국왕의 유골이 담긴 사리함. 국왕의 유언에 따라 이 사리함은 가장 사랑했던 막내딸 칸타 보파공주의 실버 파고다 내 스투파에 함께 묻혔다.
 노로돔 시하누크 국왕의 유골이 담긴 사리함. 국왕의 유언에 따라 이 사리함은 가장 사랑했던 막내딸 칸타 보파공주의 실버 파고다 내 스투파에 함께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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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대한 국제사회의 역사적 평가는 매우 냉정하다. 갈팡질팡한 그의 정치행보 탓에 캄보디아가 반세기 넘게 참으로 암울한 시대를 겪어야만 했다는 게 주된 이유다. 대다수의 정치평론가, 역사학자들은 그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많은 역사가들은 시하누크 국왕의 실정과 오판이 캄보디아를 세계 최빈국 중 하나로 전락시켰다고 주장하고 있다. 국제사회 언론들의 평가도 옹색하기는 마찬가지다. 그와 직접 만나 인터뷰를 한 기자조차도 '괴짜', '예측불허 인물', '변덕쟁이', '플레이보이', '궤변론자' 같은 부정적인 수식어를 많이 사용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캄보디아 국민들의 시선은 많이 다르다. 그는 여전히 캄보디아 국민들로부터 국가의 아버지, 영웅으로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다. 그의 지난 과오를 지적하는 캄보디아 역사학자, 정치비평가도 극소수에 불과하다. 국왕에 대한 이미지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미화되고 신격화되는 분위기다. 아들인 시하모니 현 국왕의 인기와는 감히 비할 바가 못 된다. 그가 만든 화려했던 과거 시대를 기억하는 기성세대들의 머릿속은 온통 그에 대한 존경심으로 가득 차 있다.

국왕의 유골안치행사를 보기 위해 이른 아침 국왕의 사진을 들고 왕궁 앞을 찾은 소은 나릿(68)씨는 "시하누크 국왕은 세상을 떠났지만, 우리들 가슴속에 남아 있다"면서 "나의 왕은 영원한 우리들의 왕이다, 나는 그가 우리의 왕이었다는 사실이 기쁘다"라고  말했다.

국왕이 세상을 떠난 지 1년 반이란 시간이 흘렀음에도 이날 현장에선 국왕의 황금빛 고색창연한 유골함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40~50대 중년 여성을 여럿 볼 수 있었다. 행사기간 중 현지인 여러 명에게 비슷한 질문을 던졌지만, 대부분 '존경'이라는 단어와 '나의 왕'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다. 그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컴퓨터회사에서 일하는 린 티다(23)씨는 "시하누크 국왕은 우리의 영웅이며 우리 마음속에 있다"고 답했다. 시하누크 국왕이 통치하던 화려한 전성시대는 그녀가 태어나기 한참 전에 있었던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애정과 존경심은 상상을 넘어섰다. 젊은이들이 자주 이용하는 페이스북 같은 SNS에서도 그에 대한 존경심이 묻어나는 글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지난해 공장 직원들 앞에서 국왕의 사진을 무심코 찢었다가 살해위협에 목숨을 잃을 뻔한 중국계 봉제공장 관리자는 경찰의 보호를 받으며 이 나라를 떠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일부 전문가들은 "캄보디아 젊은 세대들이 제대로 된 역사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과거 역사에 대한 정부의 지나친 미화와 더불어 이런 분위기에 편승한 TV와 신문 등 현지 언론 보도, 충분하지 않은 역사교육 때문이라는 것이다.

동남아 역사를 공부하는 이창영(32·석사과정)씨는 "과거 캄보디아가 잘 살았다는 사실에 대해 캄보디아 국민들은 깊은 향수와 자부심이 있는 것 같다"며 "번영시대를 이끈 주역이 시하누크 국왕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그 시대에 살았건 그렇지 않건 그에 대한 존경심은 높을 수밖에 없다,  적어도 당시 정치적으로 핍박받았던 경험을 가진 지식인들이 아니었다면 말이다"라고 말했다.

시하누크 국왕의 화장된 유골이 안치된 왕궁옆 실버파고다 사원의 모습.
▲ 실버 파고다 입구 전경 시하누크 국왕의 화장된 유골이 안치된 왕궁옆 실버파고다 사원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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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인들이 황금시대로 지칭하는 1950~60년대에도 민주화에 대한 욕구는 매우 컸다. 수천 명에 이르는 민주인사들과 반정부성향 정치인들이 시하누크 정권 하에 목숨을 잃거나 실종처리 되었다. 그럼에도 캄보디아 국민들은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거나, 일부 진실을 알고 있는 이들도 함구하고 있다. 어느 누구도 국왕을 비난할 수 없으며, 해서도 안 된다는 집단적 의식이 국민들 머릿속에 깊이 박혀 있는 듯하다.

인간은 누구나 좋았던 과거의 추억이나 향수를 잊지 못하는 법이다. 그러나 과거에 대한 지나친 집착과 미련은 현재를 인식하거나 미래를 성찰하는데 장애가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 국왕을 잊지 못하는 건 오랜 정치투쟁과 부정부패, 내전과 기근에 시달린 이 나라 국민들이 미래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캄보디아 1인당 국민소득은 1000달러가 조금 넘는다. 최저임금 인상을 외치다 지난 1월초 4명의 노동자가 죽고 수십 명이 부상당했다. 캄보디아 최저 임금은 여전히 100달러다. 그들의 삶은 여전히 퍽퍽하고 최빈국의 자리를 다른 나라에 넘겨줄 가능성은 적다. 그런 가운데 빈부격차는 커지고, 화려했던 옛 시절에 대한 가난한 국민들의 향수는 점점 짙어지고 있다.

국왕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기 위해 실버 파고다 사원을 찾은 시민들.
▲ 실버파고다 앞 캄보디아 프놈펜 시민들 국왕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기 위해 실버 파고다 사원을 찾은 시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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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캄보디아, #노로돔 시하누크, #NORODOM SIHANOUK , #실버파고다, #박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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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캄보디아 뉴스 편집인 겸 재외동포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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