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멧돼지가 고구마밭을 습격하여 순을 모조리 뽑아 놓고, 겨우 맺은 고구마를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먹어버렸다.
▲ 멧돼지의 습격 멧돼지가 고구마밭을 습격하여 순을 모조리 뽑아 놓고, 겨우 맺은 고구마를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먹어버렸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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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의심했다.

감자는 캘 때가 됐다지만, 아직은 이른 고구마순이 다 뽑혀있었다. 저 정도면 고작해야 어른 엄지손가락만 한 크기 정도로 고구마가 맺혔을 터인데 뭐가 그리 급했을까? 얼마 전에는 고라니가 새순을 모조리 따먹어 고구마 농사에 먹구름을 몰고 오더니만 이번엔 도대체 누구의 소행일까?

취미로 가꾸는 밭을 망쳐놔도 이렇게 속상한데...

범인은 이내 밝혀졌다.

멧돼지였다. 고라니는 새순을 따먹고, 두더지는 뿌리 근처에 여기저기 구멍을 내면서 고구마를 갉아 먹고, 멧돼지는 아예 고구마순을 거둬냈다. 마치 사람이 고구마를 캔 듯 깔끔하게 싹쓸이를 했다. 코로 밭을 저 지경으로 만들었다는 게 실감 나지 않지만, 멧돼지의 능력을 인정해야만 해야 할 상황이다.

고라니나 두더지는 농사를 아예 망칠 정도로까지 피해를 주진 않지만, 멧돼지는 그야말로 밭을 초토화한다. 허, 이걸 어쩌나?

팔려고 심은 것은 아니지만, 속이 여간 상하는 게 아니다. 고구마 순을 심고, 뙤약볕에 말라버릴까 노심초사하며 새순이 나오길 얼마나 고대했던가? 가뭄에도 삐죽거리며 힘겹게 올라오는 새순을 보며 또 얼마나 감격스러워 했는가? 다른 밭에 비하면 밭이라고 할 수 없는 땅이었지만, 고구마순보다 잘 자라는 잡초들을 뽑느라 또 얼마나 뙤약볕에서 구슬땀을 흘렸던가?

지난번 잡초를 뽑을 때만 해도 고라니가 새순을 따먹은 걸 보고 은근히 '그래도 고라니를 유혹할 만큼 농사는 지었네!' 하는 묘한 쾌감이 있었는데, 이번엔 아니다. 아직 수확하기에는 이른 시기라 상실감이 그나마 덜하지만, 수확을 앞두고 이런 일을 당하면 얼마나 황망할까 싶다.

"몇 년 전에 수확을 앞두고 일꾼까지 샀는데, 그날 밤 멧돼지 가족이 밭을 아예 헤집어 버렸어요. 그 이후로는 고구마 농사 안 해요."
"그나저나 재미로 농사짓는 나 같은 사람도 마음이 이런데, 그걸로 먹고사시는 분들은 큰일 나겠어요."
"고라니나 멧돼지가 못 내려오게 망도 치고 하지만, 개체 수가 너무 많다 보니까 역부족이에요."

멧돼지와 고라니에게 시달렸던 경험이 있는 분과 대화를 나누다 자연스레 요즘 농산물 가격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요즘 잘 익은 매실이 글쎄 10kg에 5천 원이래요. 판로도 없고, 인건비도 안 나오니까 울며 겨자 먹기로 매실을 담그는데 설탕 장사만 돈을 번다네요?"
"요즘 산성도 많이 생겼다면서요. 양파산성이니 감자산성이니… 인건비도 안 나오니 농민들은 죽을 맛이죠."
"추곡수매(농산물 가격 안정과 농가 소득 보장을 위해 정부가 일정량의 벼를 사들이는 것)가 매길 때는 또 어떻고요? 도대체 이 나라가 농사 짓는 농민이 먹고살 방안을 보장해 줘야지, FTA다 뭐다 대기업들만 생각한다니까요."
"먹는 것이 기본인데, 지금이야 식량값이 싸지만 계속 이럴 것 같아요? 나중에 농사짓는 사람도 없어지고, 논밭도 다 없어져서 자급자족할 수 없는 시점에 식량값이 확 오르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게 말이에요. 미래의 전쟁은 식량전쟁이라는데……."

자식 같은 농산물 폐기처분하게 한 범인은 따로 있다

가만 생각해 보니 고라니나 두더지나, 멧돼지보다 더 무서운 게 있다. 심고 수확할 때까지는 가만히 기다렸다가 순식간에 결정타를 날리는 거다. 농가별로 적절하게 농작물을 배분하여 가격조절을 해야 할 기관이 있을 터인데, 매년 농민들은 복권을 긁는 심정으로 농사를 짓게 한다.

결국, 그 무서움의 존재는 우리 농업 지키기에는 별반 관심도 없이 대기업 프렌들리나 주창하는 정부 정책과 산하기관의 탁상행정이다.

흉년에도, 풍년에도 농민들이 돈을 만지는 건 쉽지 않다. 이럴 때마다 언론에는 소위 성공한 사례를 소개된다. 당신들도 저렇게 하면 성공할 수 있었는데 구태의연하게 농사를 지으니 맨날 그 모양 그 꼴이라고 나무란다.

이미 이런 각본은 박정희 시절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일환인 수출주도형 정책을 펴면서부터 사용됐다. 수출주도형 정책이 성공하려면 저임금정책이 필요했고, 저임금정책을 유지하려면 농산물가격을 낮추는 방법밖에 없었다. 말로는 새마을운동 어쩌고 해도 농촌 피폐화를 정책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실시한 것이다.

농민들은 농사를 지어도 생산비도 못 뽑아냈고, 농사를 지어서는 먹고 살기 힘들다는 현실인식을 일상에서 느끼도록 했다. 결국, 농민들의 희생을 담보로 한강의 기적이 가능했다. 그러나 그 기적으로 말미암은 이윤은 골고루 분배되지 않았다. 지금도 그런 식의 일들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이어지고 있다. 이 나라가 정말 건강한 나라가 되려면, 농어촌이 살아야 한다.

어찌 될지 장담할 수는 없지만, 멧돼지가 뽑아놓은 고구마순을 다시 심을 거다. 기적처럼 다시 고구마순이 활기를 얻어 뻗어 가고, 고구마 몇 개라도 거둔다면 감사한 일이다. 감사한 일이 생기지 않아도, 이미 산짐승의 간식거리라도 되었으니 감사할 일이다. 이렇게라도 위안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

고라니, 두더지, 멧돼지보다도 더 무서운 건 소위 농민들의 피땀 어린 혈세로 먹고사는 이들의 농업정책이 아닌가? 텃밭농사의 흥망(?)에도 이렇게 마음이 타들어 가는데, 그것을 업으로 삼고 사는 이들에게 마음은 어떠할까 가늠이 되지 않는다. 제 자식 같은 농산물이 생산 원가에도 못 미쳐서 거둘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그대로 폐기처분 하는 마음을 말이다.


태그:#멧돼지, #고라니, #두더지, #농업정책, #양파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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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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