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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범한 엄마입니다… 촛불집회 참석하러 갔다가… '서명했어요'라고 말하고 돌아가면서 많이 울었습니다. '서명했다'는 말을 한 게 너무 미안했어요. 그냥 또 할 걸. 백번이라도 할 걸. 힘내시라고 손이라도 잡아드릴 걸… 그 이후로 저는 서명운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37년을 살아오면서 세상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악을 방관하며 살지 않겠다고 약속하겠습니다."

대구에 사는 도원이·려원이 엄마가 1만 명이 서명한 용지와 함께 유가족에게 건넨 손편지에 누구보다 공감한 이들은 바로 '엄마'들일 것이다. '내 자식'만 알았던 엄마들은 세월호 침몰사고 이후 세상일에 눈을 떴다. 누구보다 많이 울고 가슴 아파하며 분노한 엄마들이 만든 대표적 '사건'이 바로 <뉴욕타임스>(NYT)와 <워싱턴포스트>(WP) 광고일 것이다.

베일에 가려있던 그 광고팀이 처음 그동안의 사정에 대해 입을 열었다. 세월호에 대한 관심이 식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광고팀의 일원으로 디자인을 맡았던 닉네임 '디자인 미씨'가 그 주인공이다. 인터뷰는 서면으로 진행됐다.

세월호 광고 1차 시안. 무산될 찰나에 마음을 담아 올린 시안이 공감을 얻었고 다시 팀을 꾸릴 수 있었다.
 세월호 광고 1차 시안. 무산될 찰나에 마음을 담아 올린 시안이 공감을 얻었고 다시 팀을 꾸릴 수 있었다.
ⓒ Indiego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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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줌마들에겐 '디자인 미씨'로 유명합니다. 먼저 자기소개 부탁합니다.
"현재 미국 남부에 살고 있고 만으로 두 살짜리 아이를 둔 엄마입니다. 시각디자인을 전공했고 현재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습니다."

- 세월호 참사 이후 '앵그리 맘'을 대표한 사건이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의 광고였지요. 당시 어떻게 광고팀을 꾸리게 됐나요?
"'앵그리 맘'은 단순히 화가 난 엄마가 아닙니다. 자식이 수장되는 모습을 지켜봤던 엄마의 고통을 함께한다는 의미이지요. 세월호가 잠기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가슴이 찢어졌고 우울했고 화가 났습니다. 정부의 구조 발표에 '다 거짓말'이라고 울며 항의하는 가족들을 보면서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지요. 에어포켓에 대한 희망이 사라질 즈음엔 너무 울어서 무기력 상태가 될 정도였어요.

엄마들 사이에서 한국 정부의 구조 의지를 의심하는 얘기들이 오갔고 우리가 나서서 뭔가 해보자는 움직임이 일었어요. 그때 한 주부가 외국 신문에 광고를 내자는 의견을 내면서 카피라이터와 광고 디자이너를 모집했어요. 어차피 밤잠도 못 자고 울기만 하느니 뭐라도 돕는 것이 좋겠단 생각에서 자원했지요.

물론 모임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처음 제안하셨던 분께서 계속 참여하실 수 없다는 의사를 밝히는 등 무산될 위기가 있었거든요. 개인적으로 안타까운 마음에 준비한 1차 디자인 시안을 커뮤니티 사이트에 올리면서 제 마음을 담은 글을 남겼습니다. 다행히 수많은 분들이 격려와 호응을 보내 줬어요. 유럽, 일본, 독일... 세계 각지의 재외동포들까지 말이죠. 안타깝게 생각하신 한 분이 나서서 광고 펀딩을 시작해 주셨어요. 거기에 광고 경험이 있으신 두 분의 주부가 더 자원해주셔서 극적으로 광고 모금을 재개할 수 있었습니다.

매일 밤 9시 채팅 회의 뒤 새벽까지 작업

- 모금 전부터 워낙 관심이 집중돼 있어서 광고 디자인에 대한 고민도 컸을 것 같습니다. 모금 시 올린 시안과 실제 광고 디자인은 차이가 있지요?
"일이 구체화되고 보도가 되자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시겠다고 했어요. 특히 미국에서 활동한다는 전문가 팀이 합류의사를 밝히기도 해 고민을 했지요. 아무래도 전문가의 손을 거치면 훨씬 세련된 광고가 될 테니까요. 하지만 회의를 통해 우리 엄마들의 진심을 담은 광고가 더 힘이 세다는 의견을 모았고 처음 계획대로 밀고 갔습니다.

당시 우리의 일정을 설명하자면, 각자 하루 일을 마치고 매일 저녁 동부시간 9시쯤 채팅창 앞에 모여 치열한 회의를 시작합니다. 서로의 아이디어를 공유하면서요. 그 결과를 갖고 각자 자기작업을 시작하는데 보통새벽 3~4시, 늦은 경우 6시에 끝나기도 했어요. 다음날 아침, 작업한 파일을 공유하고 다시 밤 9시에 모이는 방법이었습니다.

저희 팀 누구나 그랬겠지만 특히 제가 맡은 디자인 부분은 더 고민이 컸고 부담됐습니다. 한국 사정을 잘 모르는 외국인들을 한 눈에 설득시켜야 하는 거잖아요. 더군다나 한국 정부의 문제에 대한 비판을 싣는 것이니까 사실에 의존해야 하고 실수하지 않아야 했죠. 이미 1차 광고 시안이 보도를 통해 알려진 상태라, 더 나은 이미지를 만들어야 한다는 중압감이 컸습니다. 

제 디자인 모티브는 침몰하는 세월호였습니다. 전 세계인이 세월호 침몰을 지켜보았으니 침몰하는 배의 이미지만한 소재는 없었지요. 1차 시안이 감성에 호소한 광고였다면 신문에 올릴 광고의 콘셉트는 사실을 기반으로 하는 정보 전달로 잡았습니다. 그림의 비율을 30%로 한 텍스트 위주의 심플하면서도 강한 이미지가 필요했거든요. 실사 사진은 기사 같은 느낌을 줄 수 있어 블랙의 단순한 이미지를 만들었습니다.

보통 디자인을 하면 나오는 순간까지 고치고 싶은데 의견을 충분히 나눠서 그런지 만족스러웠어요. 오히려 카피를 담당하시는 세 분이 매일 새벽마다 팀 미팅을 하며 고생하셨죠. 서로 카피를 공유하고 수정하고 영문 작업을 하느라 마감 바로 직전까지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셨거든요. 문장 하나, 어감 하나 신중을 기해야 했으니까요. 돈을 받고 일하는 회사라면 절대 이렇게 못 했을 거예요. 매일 이렇게 날밤을 함께 새니까 서로에 대한 믿음이 저절로 쌓이더군요. 그 믿음이 끝까지 서로 의지하며 일을 마칠 수 있는 힘이 됐습니다."

- 무엇보다 뛰어난 팀워크와 추진력을 보여준 '광고팀'의 구성에 대해서 많은 분들이 궁금해 합니다. 어떤 분들이셨나요?
"광고팀은 광고 카피 시안을 맡아주신 분, 영문 카피와 모금, 신문사와의 협상과 진행을 맡으시는 분, 광고 전략과 온라인 사이트(thetruthofsewolferry.com)를 관리해주시는 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저는 디자인을 맡았고요. 하지만 회사 작업과는 달리 팀원의 역할이 명확히 구분되어 있지 않았는데요. 한 사람이 주도적으로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팀원 모두 의견을 제시하고 조율했어요. 매우 민주적으로요. 세월호 참사에 분노한 아줌마들이 모여서 그런지 상대방을 배려하고 서로의 말을 경청하는 등 조화롭게 팀이 운영되더군요.

회사 일을 하다보면 내 말이 더 옳다고 억지를 부리는 사람이 있는데, 우린 항상 '이렇게 하면 어때요?'라고 시작했습니다. 각자 커리어가 있고 각 분야에서 어느 정도 위치를 잡은 분들이라 자신의 주장을 고집할 수 있었을 텐데도 아무도 그렇지 않았어요. 다들 멀티 플레이어들이라 실수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일 마칠 때까지 '환상의 팀워크'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분들과 일하게 된 것을 내내 감사할 정도로요."

<뉴욕타임스>에 실린 세월호 광고 시안
 <뉴욕타임스>에 실린 세월호 광고 시안
ⓒ The Truth of Sewol Fer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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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에선 광고도 사실 확인을 꼼꼼히 한다고요?
"유력 신문에 올리는 광고는 내용이 모두 사실임을 증명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희는 자료를 찾고 증명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습니다. 광고가 실렸다는 건, 그 신문사가 광고 내용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했다는 얘기도 되지요. 여기저기서 '망신'이라며 '그만두라'고 하는 상황에서 망신스럽지 않은 수준 높은 광고를 만들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열심히 했어요. 다행히 저희 팀원 분들이 각 분야에서 인정받는 전문가들이라 그 역량을 최대한 발휘했고 결과적으로  좋은 평가를 얻을 수 있었지요."

- 두 번에 걸친 광고를 무사히 마치고 잔금으로 국내 양심 언론 후원까지 하셨어요. 많은 분들이 광고팀의 똑 부러지는 일 처리에 감탄했는데요. 그 비결이 뭘까요?
"저도 굉장히 특별한 경험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다들 미국동부와 서부 등 다른 지역에 살고,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들이 팀을 이루었는데 어떻게 일이 이렇게 잘 진행되었나 싶어요. <오마이뉴스>에서는 저희 작업을 '007작전'이었다고 했는데, 정말 그랬지요.

후원자들이 모두 똘똘 뭉쳐 광고팀을 보호해주고, 광고가 실리기 전까지 우릴 믿고 지켜봐 주시는 모습에 감명 받았어요. 광고팀을 그대로 옮겨서 회사를 차리면 아주 성공할 거라는 생각까지 했네요. 자신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는 훌륭한 엄마들이 세월호라는 이름으로 모였고 그간의 역량을 발휘한 결과라 볼 수 있겠습니다."

- 광고 진행과정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이 컸을 것으로 짐작만 하고 있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이 있었나요?
"광고팀의 투명성을 의심하는 글에서부터 우리가 구원파 같은 단체의 일원이라는 등등 많았지요. 대부분은 비공개인 저희 신분을 의심하며 이간질하는 거였어요. 하지만 우리 팀 신분이 처음부터 비공개였던 것은 아니었어요. 펀딩 시작 당시엔 모두 실명을 공개했고 이를 보고 연락해오는 기자도 있었지요. 그런데 자꾸 이상한 접촉들이 발생하고 개인정보가 유출되더라고요. 펀딩 사이트인 INDIEGOGO측에서도 민감한 사항이니 실무자들이 이니셜을 사용하면 좋겠다고 권하더군요.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우리에 대한 음해와 오해들을 보면서 속상해 울기도하고, 화내기도 했어요. 우리들 모두 엄마로, 한국 사람으로 나선 건데, 우리에게 '사기꾼', '빨갱이'라니요. 그 소리에 밤새 울다가 다음날 아침이 밝으면 다시 툭툭 털고 일을 시작했어요. 우리가 힘이 든다고 해서 자식을 잃은 유가족보다 더하겠냐고 생각했거든요. 자식을 눈앞에서 잃으신 분들도 우리랑 똑같이 '빨갱이' '협잡꾼' 소리를 들으셔야 했잖아요. 그렇게 위기를 넘겼지요."

- 게시판 글이나 댓글이 아니라 언론에서도 그런 모함을 들으셨잖아요..?
"솔직히 한국 언론이 우리에게 '종북', '빨갱이', '구원파'라고 했을 땐 좀 웃겼어요. 우리는 모두 한국 사람이지만 어렸을 때 미국에 온 이들도 있어서 빨갱이가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분들도 있었거든요. '정부 비판했다고 빨갱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정말 믿을까?' 하며 우리끼리 웃기도 했지요. 생각이 다르면 다른 말을 할 수 있는 것이 민주주의잖아요. 이런 교육을 받은 우리였기에 그런 여론에 휘둘리지 않고 끝까지 진상규명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요즘 '구원파'란 소리도 하던데, 이건 '종북'의 다른 말 같아요. 이참에 저희도 알았네요. 내 생각과 다르면 '빨갱이', 나쁜 집단으로 몰고 싶으며 '구원파'인 거지요? 이런 이름 짓기는 정치가 아니라 선동일 뿐입니다. 권력을 이용해 국민들을 조롱하는 거라 생각해요."

"NYT 광고팀이 종북·빨갱이?... 미국 교민사회도 걱정"

디자인 미씨님이 더 많은 이들과 오랫동안 세월호를 공유하고 싶어 만든 컴퓨터 바탕화면.
 디자인 미씨님이 더 많은 이들과 오랫동안 세월호를 공유하고 싶어 만든 컴퓨터 바탕화면.
ⓒ 디자인미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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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고 진행과정에서 선의건 악의건 여러 곳에서 접촉하려고 노력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NYT 광고팀'은 기관이나 언론사의 접촉을 모두 거부하셨어요. 왜 그러셨나요?
"솔직히 말하면… 한국 언론에 대한 불신 때문이었습니다. 광고팀이 이렇게 모인 게 세월호 때문인데 세월호가 '참사'가 된 것은 정부만큼이나 언론의 잘못이 크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NYT광고에서 정부의 무능뿐 아니라 한국 언론에 대해 신랄히 비판했던 겁니다. 진실 보도는 외면한 채 사건을 축소하고 관심을 돌리려고 하는 한국 언론을 믿을 수 없어 저희는 어느 언론 인터뷰에도 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한국에 언론의 자유가 있다고 느꼈다면 한국 신문에 광고를 했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둘째 이유는 우리 광고팀은 모금해주신 4000여 분의 뜻을 구체화시키는 진행팀일 뿐이지 결코 주동자도 대표자도 아니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냥 보통 주부들일 뿐인데 언론을 통해 정치범, 선동꾼으로 몰리면 '다시 평범한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걱정되기도 했고요. 괜한 신상공개로 우리를 마녀사냥 하려는 사람들, 흠 잡으려는 언론들에게 먹잇감을 던져줄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 지면을 통해 할 말은 다 했다 생각합니다. 광고에 담긴 말이 널리 전해지기를 원했지 저희에 대한 이야기는 중요하지 않다 생각했으니까요. 이 모든 것이 새벽 회의를 통한 결과였습니다."

- 광고 이후 한국 정부와 언론에 어떤 변화가 있었다고 평가하나요?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KBS 기자들의 자기반성이 나오기 시작했어요. CBS 같은 언론사들도  당당히 제 목소리를 내는 게 보였고요. 나라밖에서 강한 정부비판이 나오자 정부옹호 일변도의 언론들도 일제히 우리 광고전문을 실어주었지요. 덕분에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이 번역되어 한국에 그대로 전달되었습니다. 정부가 외국 여론의 동향에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더군요. <뉴욕타임스> 광고 후에는 대부분의 미디어에서 우리 광고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는데, 정부도 부담을 느끼고 대책을 마련하고 있는 듯이 보이더군요. 물론 지방선거가 끝나자 다시 다 덮으려는 것 같이 보여 씁쓸하지만요..."

- 외국 신문에 광고가 나간 후 비난도 거셌잖아요?
"솔직히 우리팀은 광고가 나가면 모두가 신문 들고 펑펑 울 거라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럴시간이 없더라고. 그 후 쏟아진 비난에 대처해야 했으니까요. 우리 광고에 반대하는 미국 내 한인단체들이 미국 내 한국 신문에 저희를 '종북·빨갱이'로 모는 광고들을 게재했잖아요, 미국에 몇 십 년 사신 분들도 몰랐던 수많은 단체가 연합해서 비슷한 문구로 광고를 냈더라고요. '<뉴욕타임스> 광고는 사실이 아니다', '광고팀은 종북이다', '연합단체 광고가 진짜다, 우리를 믿어라' 하는데, 그게 한국에서 하는 비난과 내용이 똑같더라고요.

우리가 종북단체의 지원을 받았다고 하는데, 우리 모금내역은 실시간으로 INDIEGOGO 사이트에서 확인할 수 있는 투명한 운동이었습니다. 반박 광고를 한 단체들이 어떻게 그렇게 빨리 돈을 모으고 디자인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주장을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게 아니라 그냥 '종북'이라 몰아서 매도하더군요. 모든 미주한인 매체에요. 미국 각지에 한인단체가 이렇게 많은지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다행인 건, 뜻 있는 많은 교민들이 '이참에 이런 단체들을 적극 감시하자'고 이야기했다는 점입니다. 진짜 학부모는 우리 안에 있는데 학부모 모임 대표라는 분이 우리 엄마들을 빨갱이로 몰고, 한인단체 임원이란 노인이 아이 손잡고 세월호 추모 시위에 나간 엄마에게 심한 욕설을 퍼붓는 등의 일을 겪으면서요. 한국 사회만 걱정할 게 아니라 그 축소판이 된 미국 교민 사회도 걱정해야 한다고 다들 입을 모았지요."

- 프로젝트가 기획됐던 사이트는 광고 진행 과정에서 지속적인 해킹으로 인한 게시물 삭제와 디도스로 추정되는 트래픽 증가, 그리고 광고팀을 모략하는 댓글들로 몸살을 앓았습니다. 겁나지 않으셨나요?
"일 시작하는 초반부터 이메일 해킹을 경험했습니다. 처음에는 무서웠는데 나중엔 덤덤해지더라고요. 미국 내 커뮤니티 사이트를 이렇게 공격하는 것은 중범죄인데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나 싶어요. 미국 사이트에도 이러는 것을 보면 한국에서는 더 하겠죠? 근데, 그런 행동이 왜 문제인지 모르는 것 같더라고요. 판단력과 도덕성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지금 한국 사회를 이끌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우린 이 일을 하면서 생전 처음 당하는 모욕에 욕도 먹었습니다. 초기엔 겁이 났지만 나중엔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어느 한 순간, 겁을 주며 위협할 순 있어도 사람의 삶 전부를 지배할 수는 없다 믿습니다. 아이를 지키는 엄마의 마음으로 오히려 당당하게 우리 할 일을 했지요. 그런 낡고 오래된 방법은 우리 '화난 엄마들'에겐 통하지 않았던 거죠."

미국의 9·11, 한국의 세월호

- 많은 이들이 미국의 9·11처럼 한국 사회도 세월호 참사 전후로 크게 나뉘게 될 거라고 합니다. 본인의 삶도 달라졌다고 느끼시나요?
"이미 너무 많이 달라졌어요. 저는 창의력이 요구되는 일을 하고 있는데 세월호 이후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더군요. 유족들처럼 저도 세월호 사고에 대한 진상이 규명되어야 제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더는 세상을 순진하게 바라볼 수 없게 된 듯합니다. 많은 사람이 죽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지켜봤는데 예전처럼 웃고 떠든다면 너무 미안하잖아요. 미국의 9·11이 '분노'가 아닌 '추모'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분노할 시간을 충분하게 주고 같이 반성하고 고치고 함께 상처를 치유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우리 세월호 사고는 어떤가요? 유가족이 슬퍼하는 것도 지나치다 하고 드러나는 진실에 대해 분노하면 '아직까지 그러고 있냐'고 정치적이라고 몹니다. 내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이 사건을 제대로 추모하고 사회를 변화시켰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제2의  세월호를 막을 수 있겠지요. 고리원전 위험이나 롯데월드 주변 지반 붕괴 등의 문제를 해외에서 접할 때마다 한국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 국민들에게 화가 미칠까봐 너무 불안해요. 제2의 세월호 참사를 만들지 않으려면 이번에 제대로 진상규명하고 책임자 처벌해야 합니다. 이런 일들이 진정한 예방의 첫 단계라 믿습니다. 솔직히 이러한 사회인식도 세월호 전엔 갖지 못했는데... 세월호가 저와 같은 엄마들을 똑똑하게 만들어주었다 싶네요."

- 많은 한국인들이 세월호를 비롯한 답답한 현실에 '떠나고 싶다'고 하십니다. 미국에 사는 젊은 교민으로서 어떤 얘기를 해줄 수 있을까요?
"한국을 떠나 이민 가버리고 싶다.' 유가족께서 하신 말씀이기도 하지요. 미국 사는 너희는 한국서 사는 일이 얼마나 각박한지 모를 테니 참견하지 말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한국 밖에 사는 저 같은 교민들이 왜 일도 못 하고 잠도 못 자고 우는지 아세요? 밖에서 보면 더 또렷이 잘 보이거든요. 한국의 현실이 어떤지 정확히 보도해주는 여러 해외언론들과 이번에 알게 된 한국의 '양심언론'들을 통해 다양하게 접하면서 말입니다. 한국 현실이 암담한 것은 맞아요. 저도 '이러다가 우리 대한민국이 망하겠구나' 하는 생각에 두렵기도 해요. 국민들이 그렇게 생각 못하게 한국 언론들이 통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재외교포들이 느끼는 슬픔을 우리 국민들과 교류하고 싶은데 그것마저 통제되는 느낌입니다.

'현실을 떠나고 싶다', '내 나라를 버리고 싶다'고 하지만 떳떳치 못한 나라의 국민은 외국에서도 무시당합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감옥에 가야지 왜 우리 무고한 국민들이 나라를 떠나야 하나요? 남의 아픔에 공감하는 이들이 더 많아지면 대한민국은 바뀌고 더 좋은나라 될 겁니다. 착한 국민이 아니라 이 땅에 살면 안 될 사람을 쫓아내자는 생각을 하면 좋겠어요.  저희들도 힘껏 돕겠습니다.

하루 잠깐씩은 세월호 희생자들을 위해...

세월호사고 희생자·실종자·생존자 가족대책위와 일반인 희생자 유가족대책위 회원들이 지난 12일 오후부터 여의도 국회의사당앞에서 제대로된 '4.16특별법'(4.16 참사 진실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위해 노숙농성에 들어갔다. 13일 오전 세월호참사 희생자 가족들이 국회의사당 주위에 노란 종이배와 피켓을 놓고 있다.
▲ 세월호 가족 국회 농성 이틀째 세월호사고 희생자·실종자·생존자 가족대책위와 일반인 희생자 유가족대책위 회원들이 지난 12일 오후부터 여의도 국회의사당앞에서 제대로된 '4.16특별법'(4.16 참사 진실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위해 노숙농성에 들어갔다. 13일 오전 세월호참사 희생자 가족들이 국회의사당 주위에 노란 종이배와 피켓을 놓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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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신문에 광고를 내 외국인들에게 우리의 현실을 알리고 무엇보다 한국 정부와 언론을 압박하는 일은 이번 일로 마무리가 된 것 같은데... 앞으로 계획은 무엇인가요?
"<워싱턴포스트> 광고까지 게재하고 펀딩의 남은 금액을 양심언론에게 기부하는 일을 마지막으로 광고팀은 공식적으로 해체되었습니다. 그러나 조직만 없앤 것이지 하던 일은 같아요. '온 마음으로 세월호를 추모하기', '가만히 있지 않기'. 우리는 한국 정부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어요. 한국 정부에서 하는 이야기가 외신을 통해 보도됩니다. 그게 다 기록되는데도 말을 막 바꾸더군요.

내세울 인물이 없다고 해임한 총리를 다시 유임시킨 사건을 외신들은 비웃고 있습니다. 구조를 안 했던 것처럼, 진실 규명의 의지도 없어 보입니다. 이게 바로 해외 교민들이 가만히 있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한국을 망신시키는 기사가 어제 아침에도 <뉴스타임스>에 났더군요. 어떤 이웃은 저에게 대놓고 물어요. '너희 나라랑 북한이랑은 뭐가 다르냐고'. 다르다고, 우린 민주주의 국가라고 하루 빨리 얘기해 주고 싶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거창한 일이 아닙니다. 세월호 잊지 말자고 서로 응원하기, 가슴 아팠던 느낌 솔직하게 털어놓으며 마음 나누기, 그리고 김치며 슬리퍼, 딸기잼 같은 걸 만들어서 세월호 후원바자회 같은 데 나가 열심히 마음 나누기 등등. 우리는 정치적인 단체도 아니고 세월호 추모한다고 뭐 하나 이득을 취할 일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린 그냥 유가족들이 원하는 일을 하는 거예요. 그 일이 무엇이 되었든 힘을 모아볼 생각입니다. 그래서 이 나라 주인이 누구인지 정부에 알려줬으면 좋겠어요. 미국에서는 세월호 추모시위 운동이 지속적으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외국 언론의 한국기사를 한국어로 번역 소개하는 작업과 국내 소식을 해외언론에 번역해 소개하는 일도 외국어 능력 있는 주부들끼리 꾸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저는 할 줄 아는 게 디자인이니까, 추모의 포스터나 월페이퍼 디자인을 해서 공유하고 있고 추모시위에 쓰일 자료들을 수집하고 있어요. 다들 일상으로 돌아가서 건강 챙기고 열심히 일하면서도 하루 잠깐씩은 세월호를 위해 투자하면 좋을 것 같아요.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지치지 말고요. 전 우리 엄마들은 그렇게 할 수 있을 거라 믿어요."

그녀가 지난 몇 달간 그런 큰일을 해냈다는 건, 그녀의 남편과 두 명의 미국 친구들 외엔 모르는 일이라고 했다. 친정과 시댁은 물론 한국친구들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평소 정치·사회 문제에 관심이 없던 사람이라 주변사람들의 이런저런 우려와 걱정 때문이었다. 그녀는 세월호를 추모하는 일에 매달리느라 지금 한창 뛰어다니는 아기에게 소홀했다.

하지만 나중에 아이가 자라 2014년 너무나 바빴던 엄마를 이해해주고 더 자랑스러워 해줄 거라 믿는다. 이번에 만난 광고팀 구성원 모두 그녀와 같다. 평범한 주부로 아이 키우고 집안 일 하고 회사 다니는, 그녀들은 우리가 만나는 보통의 한국 아줌마들이다. 세월호가 그녀들을 성장하게 했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반문하게 한 것이다. 그녀는 그녀의 이번 인터뷰로 세월호 사건이 다시 한 번이라도 사람들 사이에 오르내리길 바랐다.

"세월호 사고의 진상이 규명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정부와 나쁜 언론, 못된 정치꾼들에게  상처받고 있는 유가족분들에게 우리가 힘이 되어 주자고요."

그녀의 마지막 메시지다.

덧붙이는 글 | 디자인 미씨가 만든 세월호 월 페이퍼, 원본은 http://www.thetruthofsewolferry.com/에서 다운 받을 수 있습니다.



태그:#세월호, #NYT 광고, #디자인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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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부터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뉴욕 거주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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