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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시간, 텔레비전에서 하나의 드라마가 끝나자마자 아내는 리모컨을 누른다. 다른 드라마가 시작되고 있다. 난 첫째아들 서동이랑 받아쓰기 연습하고 있다.

"자, 서동아. '무섭지 않아' 써봐."
"아빠! '무섭지' 하고 띄어 써야 하죠?"

"응 그래."

쓰면서 읽는다.

"무섭지 않아."
"다음은, 나는 힘이 세."
"나는 힘이 세."

한참을 받아쓰기하고 있는데, 또 드라마가 끝나나 보다. 예고편을 보여주며 '내일 이 시간에'라고 자막이 나온다. 순간 리모컨이 움직이는 가 싶더니 금세 다른 채널로 바뀐다. 또 드라마다.

티브이는 드라마로 먹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체 티브이 방송 중에 드라마가 차지하는 비중은 얼마나 될까? 나와 비슷하거나 커다란 갭을 지닌 출연자들의 생활방식과, 그들의 성공과 좌절, 갈등에 환호하는 것은 우리 삶이 그리 낭만적이지 만은 않기 때문 아닐까?
▲ 한참 방송중인 티브이 드라마 티브이는 드라마로 먹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체 티브이 방송 중에 드라마가 차지하는 비중은 얼마나 될까? 나와 비슷하거나 커다란 갭을 지닌 출연자들의 생활방식과, 그들의 성공과 좌절, 갈등에 환호하는 것은 우리 삶이 그리 낭만적이지 만은 않기 때문 아닐까?
ⓒ 김승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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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으로 생각했다.

'참 대단하다. 어떻게 저런 걸 다 외우고 있을까? 방송국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나? 아님 친구 중에 탤런트가 있나?'

받아쓰기가 끝났다.

"서동아, 잘 했고 낼도 오늘처럼 하면 돼. 알았지?
"네, 낼 백 점 맞을래요."
"그래 그래."

난 뉴스가 보고 싶어졌다. 월드컵 경기도 궁금하고, 류현진이 어떻게 공을 던졌는지 보고 싶었다. 그래서 아내에게 말했다.

"뉴스 보면 안 될까?"
"조용히 해!"

아내는 단호했다.

내가 시무룩해 하자, 서동이가 카드놀이하자며 나를 졸라댄다. 둘째 효동이는 내 머리 위로 올라왔다. 난 아이들과 한참을 씨름했다. 격투기 선수 '추성훈'과 '밥 샵'이 팔을 조르고 암바를 하듯 우리는 열정적으로 서로를 헛점을 찾아 누르고 꺾고 몸을 뒤집었다. 이내 힘들어서 종목을 바꿨다. 가위 바위 보하며 꿀밤도 때렸다. 서동이 이마가 벌겋게 올라왔다. 금방이라도 울 것 마냥 눈물을 글썽인다.

이때 아내를 보았다. 빨래를 개고 있다. 난 기회다 싶어 리모컨을 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축구선수 '메시'랑 코리안 메이저리거 '류현진'을 보기 위해서였다. 티브이에서 아나운서의 안타까운 목소리가 들린다.

"네, 오늘 류현진이 3회를 넘기지 못하고……. " 순간 날카로운 목소리.
"채널 돌리지 마! 나 지금 보고 있단 말이야."

빨래 개면서 무슨 텔레비전을 본단 말인가. 아내를 졸랐다.

"이거만 볼게. 응?"
"잠깐이야, 알았지?"

겨우 허락을 받아서 스포츠 뉴스를 보고 리모컨을 넘겨주었다.

아내의 티브이를 향한 사랑과 애정은 정말 무한에 가깝다. 텔레비전을 틀어놓으면 안방에서도, 화장실에서도, 설거지 하면서도, 화장하면서도 다 듣고 있나보다. 옷 정리하러 안방에 들어간 사이 난 조용히 채널을 돌렸다.

"채널 돌리지 말라니까!"

아내의 신공은 거의 초능력에 가깝다. 군대 면제받은 사람을 '신의 아들'이라 했던가? 아내는 신의 어머니일 수도 있다. 언제 어디서나 실시간으로 모든 드라마의 방송시간과 채널번호, 내용까지 모두 섭렵하고 있다. 어찌 신이 아니면 가능할까?

아이들 재워놓고 잠이 오지 않아 거실로 나와서 무심코 아내와 같이 텔레비전을 보았다. 드라마 내용을 잘 몰라서 난 물었다.

"쟤 왜 저러는 거야?"
"응, 아빠가 교통사고로 죽었대."

"저 아줌마는 왜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안달이지?"
"20년 전에 살인 사건이 있었어."

나는 아내에게 물었다.

"우리 집 아줌마는 왜 이렇게 모르는 게 없어요?"라고 묻자, 아내는 웃으며 "그냥, 그냥 아는 거야"라고 말한다.

요즘 티브이 리모컨은 지역 유선방송과 함께 종편채널 모두를 검색할 수 있다. 요금제에 따라서 300채널이 넘으니 집에서 티브이 한 대만 있으면 1주일도 심심치 않게 보낼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 티브이 리모컨 요즘 티브이 리모컨은 지역 유선방송과 함께 종편채널 모두를 검색할 수 있다. 요금제에 따라서 300채널이 넘으니 집에서 티브이 한 대만 있으면 1주일도 심심치 않게 보낼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 김승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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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시가 넘어 드라마가 끝나자마자 아내는 기다렸다는 듯 채널을 돌린다. 역시 한국의 3대방송과 종편채널의 드라마 찾기는 아내에게 식은 죽 먹기였다. 프로그램의 시작 시간과 끝나는 시간을 적절히 계산하여 최대한 많은 드라마를 섭렵한다.

아내의 텔레비전 리모컨 숫자를 누르는 솜씨는 마치 '허준이 환자의 진맥을 짚어 내듯이 정확하고, 그 누르는 강도 및 손끝의 움직임은 뭉친 근육에 침을 놓듯 한 치의 오차도 없다. 눈으로 확인도 하지 않는다. 마치 원래 그런 것처럼, 바람이 동으로부터 내려와 서로 흘러가듯이 아주 자연스럽다. 혹시 장모님은 허준의 스승 '유의태'가 아닐까? 난 이 광경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한다.

"오, 우리 마누라 대단한데? 방송국에 취직시켜줄까?"
"이 정도 가지고 뭐. 별거 아냐."

아니다. 나한테는 '별거'다. 정말 세기의 천재 뉴턴이나 아인슈타인이 와도 이런 건 못할 거다. 아니, 멀리 갈 필요도 없다. 평생을 휠체어에 앉아 계신 스티븐 호킹박사도 아마 놀라서 벌떡 일어날 거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다. 결혼 후 남편을 따라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친구 한 명 제대로 사귀지 못했다. 한 지역에 적응할 만하면 이사 가고, 또 그곳에서 앞 집 사람들과 친해질 만 하면 회사 때문에 또 이사를 해야 하니, 주위 사람들과 교류가 거의 없었고, 한 곳에 제대로 자리 잡을 시간이 없었다. 아내가 전국을 돌아다니며 할 수 있는 것은 남편이 힘들까봐 맞벌이 하는 것, 나보다 먼저 퇴근해서 아이들 돌보는 것, 그리고 남편 기다리는 것뿐이다. 아내의 현란한 리모컨 신공은 그냥 생긴 것이 아니었다.

리모컨 만지작거리는 아내의 뒷모습이 오늘따라 참 안쓰럽다. 2년 전에 발령받아 온 이곳에서 우리는 좀 더 오래있고 싶다. 우리 동네라는 생각이 들도록 말이다. 출근하고 퇴근하며 동네 사람들과 인사도 나누고 싶다. 저녁에 이웃집에 들러서 식사도 함께 하고 싶고.

그래도(?) 오늘 난 새삼스럽게 아내의 능력에 감동받고 또 감탄하며 아이들과 함께 이불을 덮었다. 아이들이 엄마를 닮으면 공부를 좀 더 잘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면서 말이다.


태그:#리모컨, #허준, #유의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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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음악, 종교학 쪽에 관심이 많은 그저그런 사람입니다. '인간은 악한 모습 그대로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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