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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한국의 대학 강사들은 유례없이 수탈당하는 집단이자 21세기 현대판 지식 노예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들은 고급의 지식 노동자이면서도 가장 저급한 대우를 받고 있다. 그들은 지난 수 십 년 간 대학들이 양적으로 질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전임 교수들 못지않은 기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공과를 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대학 강사들은 실질적으로 대학 교육의 40% 이상을 담당하면서도 법적으로는 무자격자이다. 똑같이 학위를 받고 똑같이 연구를 하고 똑 같이 논문을 쓰면서도 시급 알바보다 못한 대우를 받으면서 부당한 대우에 대해 전혀 항의도 못하고 있다.

문제는 강사 문제가 이처럼 불합리하고 부정의함에도 전혀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다는 데 있다. 그래서 필자는 작금의 부당한 강사제도의 개선을 위해 제안을 하나 하고자 한다.

다름 아니라 '강의 실라버스'에 직급 실명제를 도입하여 학생들이 교수의 강의를 들을 때와 강사의 강의를 들을 때 등록금을 차등 지불하자는 것이다. 소비자 입장에서 값싼 물건과 값비싼 물건에 대해 똑 같은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은 시장 논리에 맞지 않는다.

이러한 제안의 이면에 놓인 논리는 현재와 같은 대학의 기만적이고 부도덕한 수탈 정책을 폭로함으로써 교수와 강사 간의 정의와 형평을 찾자는 것이고, 대학교육에 기여한 강사들의 법적·경제적 지위를 인정받자는 것이다. 대학생들도 자신들의 비싼 등록금이 어떻게 쓰이는지를 알아야 하고, 정당한 수업권과 공정한 등록금의 보장을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 대학은 현재의 부도덕하고 부정의한 강사 제도가 합법적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법 이전에 정의와 형평의 문제이고 도덕적 정당성의 문제이다.

현재 대학교수 1명을 채용할 때 들어가는 비용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강사 10명 이상의 비용이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7000만 원의 연봉을 받는 대학 교수와 시간당 5만 원의 강사가 주당 9시간을 강의하는 경우를 단순 비교해보자. 강사의 경우는 180만 원(45만*4)이고, 1년을 똑같이 강의한다고 할 경우 강사들은 한 학기 4개월이므로 1년이면 8개월이다. 따라서 1440만 원이 된다.

매학기 강의 확보의 불안에 시달리는 강사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정도의 강사는 거의 'A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님을 알 것이다. 그런데 교수의 경우 7000만 원 연봉 외에도 연구실 운영비용, 6년 강의 후 7년째 주어지는 안식년 비용, 연금과 퇴직금 정립, 방학 중 연수비용, 4대 보험 그리고 입시철마다 떨어지는 특별 수당 등까지 합친다면 거의 1억4000만 원 정도로 계산해도 많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강사 1인을 고용할 때 들어가는 비용에 비해 거의 10배 수준이 되는 것으로 계산할 수 있다. 현재 강사들은 대학 강의의 40% 이상을 차지하면서도 임금 총액은 전체 교직원의 1~2%도 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게다가 그들의 격차는 경제적인 것뿐이 아니다. 오히려 비경제적인 차이, 봉건시대도 아닌 21세기의 대학에서의 신분적 차별도 말할 수 없이 심각하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연봉 차이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회사의 평사원과 CEO의 연봉이 같을 수 없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연봉 격차가 커서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자 동일 노동에 동일 임금을 적용하자는 비정규직의 노동자들의 한 맺힌 구호가 나오지 않나.

이런 격차도 사회에서는 평균적으로 70%이고, 더 크게 잡아도 50% 수준을 넘지 않는다. 만약 특별한 사유가 없이 그 이상이 된다면 그것은 착취이자 수탈로 간주된다. 그런데 지성의 전당인 대학 사회에서는 똑같은 학생들을 데리고 한 학기, 1년을 강의하면서 그리고 똑 같은 강의 평가 기준을 적용하면서도 무려 10배 이상의 임금 차별과 신분 차별을 받고 있다.

대학교수들과 강사들의 임금 산정 방식이 다르고, 또 교수들은 과 행정, 학교 행정 등의 일도 담당한다고 강변할 수 있다. 물론 그 점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런 행정과 관련된 일이 현재의 임금과 신분의 차별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학생들을 상대로 이루어지는 강의 및 평가와 관련해서 교·강사 간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 오히려 그 기준은 강사들에게 더 엄격하게 적용되고 있으며, 대단위 교양 강좌를 운영하는 강사들의 수업 분위기가 더 열악한 실정이다.

그럼에도 교수와 강사 간에 왜 이렇게 임금과 신분상에서, 경제적으로나 법적으로 큰 차이와 차별이 존재할까? 동일 노동에 대해 어떻게 이런 엄청난 차별, 부당하고 불공정한 차별이 있을 수 있을까? 비싼 등록금을 내는 학생들 입장에서도 자신들을 가르치는 선생들이 부당하게 대우받는 사실을 안다고 하면 놀랍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할 것이다.

학생들이 구매한 교육 상품 중 하나는 정상적인 통로를 통해 정상 가격으로 책정된 상품이지만, 다른 하나는 전혀 비상적인 방식으로 (법적인 교원 자격도 부여하지 않고 달랑 4개월짜리 계약서 하나를 가지고), 전혀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매집한 상품에다가 자신들의 브랜드를 붙여 판매한 상품인 것이다.

대학 당국은 도처에 널려 있는 이처럼 싸구려 덤핑 물건들을 값싸게 사들여 자신들의 매장의 거의 40% 이상을, 더 심한 곳은 70%까지 진열해놓고 있다. 강사 문제가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자 교육부는 점차적으로 강사 비율을 줄이고 교수 비중을 늘리겠다고 한다. 교원 비율에 따라 대학 평가와 지원을 달리하겠다고 압박도 가하고 있다.

소위 '편법의 달인'인 한국의 대학들은 비정년 트랙, 강의 전담  계약직 전임들을 대거 뽑아 이전에 강사가 담당하는 강의를 비슷하거나 낮은 비용으로 훨씬 많은 강의를 떠넘기고 있다. 사실상 대학들은 시간 강사들에 들어가는 정도의 비용으로 무늬만 전임들을 고용해서 교육부 평가도 높이고 지원책도 높이고 있다.

유달리 한국의 대학에는 시간, 초빙, 외래, 대우, 강의 전담, 비정년 트랙 등 당사자들도 헷갈리는 직급이 많지만 본질은 하나이다. 그들은 모두가 시간 강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실정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이 취하는 폭리를 그들의 탁월한 장사 솜씨 덕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그것은 대학의 탁월한 솜씨가 아니라 기만일 뿐이다. 지성과 진리의 상아탑이라고 하는 대학에서 이런 행위가 낯뜨겁게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그동안 이처럼 불공정하고 부당한 현실에 대해 몇몇 용감한 강사들이 문제제기도 하고 항의도 해봤지만 그들의 몸짓은 메아리 없는 광야의 외침으로 그쳤을 뿐이다.

대학당국이나 교육부는 그들의 정당한 목소리를 외면하고 묵살해 왔다. 너무 큰 폭리가 그들의 도덕 감정을 막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도덕한 판매업자나 부정의한 관리 감독청의 선처를 구하지 말고, 소비자인 학생들이 알고 결정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시장이 자율적으로 적정 가격을 찾아가도록 하자는 것, 불공정한 대학에서 분배 정의를 찾을 수 있도록 만들자는 것이다. 모두가 짐작하고 있는 불편한 진실을 백일하에 공개하자는 것이다. 모든 상품은 원산지 증명이라는 것이 따라가고, 하다못해 음식점에서 먹는 고기 한 점, 반찬 한 가지에도 호주산인지 중국산인지 밝혀야 한다. 원산지 증명은 소비자들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다.

마찬가지로 비싼 등록금을 지불하는 대학의 강의에서도 강사들 강의인지 교수들 강의인지를 밝힐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래서 아주 저렴하게 고용한 강사들의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당연히 저렴하게 수업료를 지불하고, 교수들의 강의에는 고 비용의 대가에 대해 당연히 높은 수준의 수업권을 요구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끊임없이 예산 타령을 하고 경제 논리를 앞세우는 대학 당국과 교육부의 요구대로 투명하게 시장의 논리에 맡겨보면 어떨까?

그리하여 이 시장에서 부당 거래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착취와 폭리가 어떻게 발생하고, 그 모순이 누구에게 전가되는지를 아주 투명하게 시장 논리대로 밝혀서 해결하자는 것이다. 실라버스 직급 공개는 원산지 증명과 원가 공개를 요구하고, 차등 구매 비용에 따른 차등 지불을 요구하는 소비자들의 당연한 권리와 같다. 그렇다면 이 운동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어떤 파장을 일으킬 수 있을까?

첫째는 '강의 실라버스'에 직급을 공개하고 수업료를 차등화하자고 했을 때 그 혜택은 무엇보다 소비자들인 학생들과 학부모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교육 상품의 소비자라고 할 수 있는 대학생들이 비싼 수업료를 지불하고 구매한 상품이 떨이 덤핑으로 구입한 상품이고, 도덕적으로도 불공정하게 구입한 상품이라는 현실을 알게 된다면 어떨까? 대학들은 법적으로 하자가 없다고 할지 몰라도 말하자면, 법 이전에 상 도덕적으로 불공정하고 부당하다는 비판을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현재의 대학 구조상 강사들이 수탈당하는 고통은 고스란히 학생들에게 이전되고 있다. 현재 자녀 1인을 4년제 대학 졸업시키기 위해서는 최소한 1억 이상이 소요된다. OECD 국가들 중 두 번째로 높은 한국 대학의 등록금은 가계 부채의 가장 큰 이유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이 비싼 등록금은 앞서 이야기했듯 대단히 불공정하게 책정된 것이다. 대학생들과 그 학부모들의 등골이 휘고 가계부채가 국가 경제를 위협하는 현실에서도 적립금을 산처럼 쌓아 놓고 곳곳에서 부동산 투자를 일삼는 대학들의 이 기형적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실라버스 직급 공개와 수업료 차등 지불 운동은 반값 등록금 운동이 정당하고도 합리적인 요구임을 드러내줄 것이다.

둘째, 이 운동은 무엇보다 대학들의 부도덕한 정책에 큰 타격을 입힐 것이다. 그들은 자기 대학의 학생들을 가르치는 강사들에게 법적 교원의 자격조차 부여하는 것조차 거부하고 있다. 아무런 법적 자격도 없는 사람들한테 어떻게 학생들을 가르치게 할 수 있을까? 강사들의 강의 역량이나 학문적 능력이 미덥지 못해서 그럴까?

아니다. 오늘 날 대부분의 대학들은 넘치는 박사 인력으로 인해 박사학위 소지자를 강사 자격의 기본 요건으로 삼고 있다. 게다가 강사 문제가 개인의 학문적 역량과 별 상관없이 하나의 구조적인 문제가 되고 있어 이제는 강사로 정년퇴임 한다는 이야기가 낯설지 않을 정도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법적 자격 부여를 거부하는 것은 오로지 1/10도 안 되는 저렴한 비용으로 고용하기 위해서, 강의 외에 어떤 비용도 지불하지 않기 위해서, 아무 때나 저들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해고를 쉽게 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셋째, 강사들의 허위의식을 깨뜨릴 수 있다. 강사들은 머리는 하늘의 별을 향해 있지만 몸은 시궁창 속에 빠져 있는, 이 시대의 가장 분열된 존재이다. 그들은 속으로 끊임없이 "이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냐, 나에게는 꿈이 있어. 전임만 되면 이 모든 굴욕을 한꺼번에 벗어던질 수 있어"라고 자위한다.

하지만 그 꿈이 현실 속에서 무너질 때 그들은 또 다시 좌절하다가 삶을 포기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때로는 이 시궁창 같은 구조를 벗어나기 위해 교수들의 수족 같은 노예 역할을 하고, 또 때로는 교수나 재단이 채용을 이유로 비정상적인 금품을 요구하는 것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도 한다.

생계를 위해 지식 보따리를 들고 이 대학 저 대학을 떠돌면서도 최소한의 경제적 삶을 보장받기가 힘들고, 그런 세월이 반복되다 보면 연구할 시간도 확보하지 못해 나중에는 학자로서 자긍심마저 잃게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미 수많은 강사들이 그런 전철을 밟아가면서 상아탑을 쌓는 무덤들이 되었다. 사실 오늘날 강사 문제는 개인의 역량과 크게 상관없는 구조적인 문제인데, 한국의 대학들은 그들을 사회적 루저(Loser)로만 취급하고 굴욕감을 강요하고 있다. 그럼에도 정작 피해 당사자인 대학 강사들은 이런 현실이 드러나는 것에 대해 불편해 하고 있다.

하지만 대학 사회에서 가장 착취 받는 그들이 자신들의 불편한 진실을 인식하고 비판하고 개혁하려 들지 않는 한 누구도 이 시궁 창 같은 현실을 벗어나게 해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오늘날 한국의 대학 교수들은 대학에서 부당 차별을 받고 있는 동료 학자이자 강사들에 대해 분명한 책임이 있다. 한정된 파이에서 한 쪽이 다른 쪽에 비해 현저하게 많이 가져간다면 결과의 부정의를 야기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지금처럼 강사들의 비참하고 불공정한 현실이 대학의 왜곡된 착취구조에 기인한 바가 크다고 한다면, 이 구조의 수혜집단인 대학교수들도 책임이 있을 수밖에 없다.

물론 지금의 상황을 비판하고 개선하고자 노력하는 양심적인 소수의 대학교수들도 있다. 하지만 이는 개개인들의 양심과는 별도의 문제다. 대다수의 교수들은 그들이 누리는 향유와 특권이 그들 자신의 개인적 역량 때문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다. 때문에 그들은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현재 대학들에서 자행되고 있는 부도덕과 불공정의 하수인이고 협력자들이다.

그들 역시 동료 학자들의 비참한 상황을 유지·존속한 것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면할 수 없다. 때문에 교수들 역시 이런 현실을 분명하게 깨닫고 작금의 강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강사들은 법적 지위를 개선하고 강사료 문제를 현실화시켜 달라고 부단히 요구해왔다. 강사 문제는 결코 시혜의 문제가 아니라 대학 교육의 정상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이런 파행적이고 불공정한 현실이 온존할 경우 그 피해는 고스란히 대학생들에게 갈 것이고, 대학의 미래, 사회의 미래, 나아가서는 국가의 미래에 그대로 악영향을 줄 것이다.

더는 이런 현실을 관행으로 덮어서는 안 된다. 이런 부정의와 부도덕이 온존해 있는 한 대학은 결코 자유를 외칠 수 없고, 진리와 양심의 상아탑을 자처할 수 없다. 대학사회는 이제 비판의 화살을 자신들의 심장으로 돌려야 할 것이다. 대학 사회의 힘 있는 주체들은 분명하게 자신들이 행한 부도덕하고 불공정한 현실을 부끄러워하고 개선해야 한다.

지난 수십 년간 대학들은 이 땅의 경제 발전과 사회 민주화를 위해 큰 역할을 해왔다. 그런데 대학이 지금은 사회 어느 곳보다 극심한 차별을 당연시하고, 발전이라는 명목으로 온갖 편법과 불법을 감행하는, 가장 부도덕하고 부 정의한 집단이 되어가고 있다. 이제 이런 부끄러운 고리를 끊기 위해 결단하고 행동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당장 그것이 불가능해 보이겠지만, "강의 실라버스 직급 공개와 수업료 차등 지불하자!"는 운동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첫 걸음이 될 것이다.

하나, 강의 실라버스에 직급(강사냐 교수냐) 실명제를 도입하자!
하나, 직급에 따라 수업료를 차등 지불하자!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이종철 님은 연세대학교 철학과 강사입니다.



태그:#대학, #대학강사, #부정의, #부도덕, #실라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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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사회 비판, 예술 등에 관심있습니다. 전 몽골 Huree ICT University 한국어과 교수를 역임했고, 현재는 연세대학교 인문학 연구소 상임연구원으로 재직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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