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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펠탑 근처로 가면 갈수록 불현듯 나타나는 에펠탑의 모습은 나의 기대를 증폭시키기에 충분했다.
▲ 오르세 미술관 뒤로 보이는 에펠탑의 모습 에펠탑 근처로 가면 갈수록 불현듯 나타나는 에펠탑의 모습은 나의 기대를 증폭시키기에 충분했다.
ⓒ 김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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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 속에는 여러 개의 방이 있다. 그중 하나가 에펠탑(Tour Eiffel)을 위한 방이다. 언제부터인가 에펠탑은 그저 탑이 아니라 나에게 막연한 기대감과 설렘을 주는 존재였다. 반짝이는 에펠탑 사진을 보고 눈길을 주지 않을 여성이 누가 있을까?

지난 6월 20일부터 8일간 다녀온 파리 여행의 주목적도 에펠탑에 가는 것이었다. 어쩌면 소박할 수도, 당연할 수도 있는 여행의 이유가 나를 파리로 데려다 줬다. 그곳에서 나는 기대와 실망을 한꺼번에 경험했다.

여행에서 맛본 현실과 이상 사이의 괴리감

무심코 지나가다 만난 파리 시청은 엄청난 규모와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었다.
▲ 파리 시청 모습 무심코 지나가다 만난 파리 시청은 엄청난 규모와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었다.
ⓒ 김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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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기대했던 이상과 현실이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래도 나는 에펠탑을 보기 전 몇 가지 기대를 품고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에펠탑이 가장 잘 보이는 샤요 궁전 앞에서 멋진 가족사진을 찍고, 에펠탑 잔디밭에 앉아 가져온 간식을 나눠 먹으며 책을 읽는다. 남편은 내 옆에서 낮잠을 자고, 아이는 푸른 잔디밭을 뛰어논다. 운이 좋으면 잔디밭 근처에서 하는 문화공연도 볼 수 있으리라. 마지막으로 온 가족이 에펠탑 전망대에 올라가 파리의 아름다운 전경을 눈과 마음에 담는다.

파리에 가기 전, 나는 에펠탑이 파리의 아름다움을 대표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도착해 보니 파리라는 도시 자체가 아름다움의 대명사였다. 숙소 근처의 퐁피두 센터는 주변의 건물들의 위엄을 잠재울 수 있을 만큼 재치 있었다. 수천 개의 자물쇠가 달려 있는 예술의 다리에서는 그들의 사랑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연인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꽉 막힌 자동차들 옆으로 유유히 지나가는 자전거를 탄 남자는 파리의 낭만과 여유를 제대로 즐기고 있는 모습이었다.
▲ 도심 속의 여유 꽉 막힌 자동차들 옆으로 유유히 지나가는 자전거를 탄 남자는 파리의 낭만과 여유를 제대로 즐기고 있는 모습이었다.
ⓒ 김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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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 강 주변에는 산책하는 사람, 운동하는 사람들, 유람선을 타는 사람 등 저마다 자신의 오후를 여유롭게 즐기는 이들이 보였다. 처음으로 걸어 보는 파리는 도시 전체가 잘 꾸며진 세트장처럼 아름다웠다. 숙소에서 오르세 미술관까지 가는 길을 걸어서 30분이나 걸렸지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바뀌는 파리의 풍경 때문에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오히려 파리의 곳곳을 눈에 담을 수 있어 기뻤다.

원래 우리의 계획은 이랬다. 남편과 아이가 공원에서 쉬는 동안 나 혼자 오르세 미술관을 관람한 후 샹젤리제 거리 근처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이었다. 식사를 마친 후 에펠탑 잔디밭에서 쉬다가 오후 10시 30분께 미리 예약해 둔 에펠탑 전망대에 올라가기로 했다.

미술관 관람까지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남편 덕분에 나는 인상파 작가들의 작품을 홀로 여유롭게 감상하는 호사를 누렸다. 관람을 마친 뒤 남편과 아이를 만나 맛있는 밥을 먹고, 꿈에 그리던 에펠탑에 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기대와 다르게 흘러갔다.

여행은 예기치 못한 상황을 동반한다

각자의 방식대로 저마다의 휴식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름답다.
▲ 센 강 주변의 모습 각자의 방식대로 저마다의 휴식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름답다.
ⓒ 김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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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지금 바토무슈(Bateaux-mouches)를 타는 건 어때?"
남편이 갑자기 센 강을 따라 운행하는 유람선을 타자고 제안했다. "내일 또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니 시간이 될 때 할 수 있는 것들을 미리 다 해 놓자"라는 논리였다. 에펠탑에서 보내는 시간이 줄어들 것 같았지만, 내가 미술관을 관람하는 동안 아이를 맡아준 남편이 고맙기도 하고, 미안도 했던 터라 남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우리는 오후 7시께 바토무슈 유람선에 몸을 실었다. 파리는 야경이 제맛이라고 하지만 햇살이 내리쬐는 파리의 풍경도 매력적이었다. 편하게 앉아서 바라보는 센 강 주변의 경치와 유적지는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멋있었다. 오디오 가이드에는 한국어 안내도 포함돼 있었다. 다른 언어 가이드가 다 끝난 뒤에야 한국어 방송이 나오는 바람에 해당 건물을 거의 다 지나치고 듣는 안내이긴 했지만, 프랑스에서 듣는 한국어는 참 정겨웠다.

유람선 투어 중 뜻하지 않게 봤던 에펠탑의 모습은 모든 이들의 환호성을 불러일으킬 만큼 아름다웠다. 에펠탑을 향한 내 마음은 설렘으로 절정에 치달았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부터 발생했다.

센 강을 가로지르는 유람선을 타고 파리를 여행하다보면 강가에서 오후를 즐기는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 도심의 여유 센 강을 가로지르는 유람선을 타고 파리를 여행하다보면 강가에서 오후를 즐기는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 김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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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람선 투어가 끝났을 때는 오후 8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우리는 저녁을 먹기 위해 샹젤리제 거리로 향했다. 파리의 거리는 주변의 볼거리가 정말 많아서 걷는 시간 동안 눈이 호강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시간 개념을 상실할 수 있다는 점은 까맣게 잊어 버렸다. 유명한 홍합 요릿집에 도착했을 때, 시계는 이미 오후 9시를 가리켰다. 생각보다 거리에서 시간을 너무 많이 써버렸다. 부지런히 밥을 먹고 에펠탑 쪽으로 이동해도 오후 10시가 넘어서야 도착할 지경이었다.

그때부터 불안해졌다. 의도했던 것과 달리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파리에 온 가장 중요한 목적이 에펠탑이었는데, 자칫 물거품이 돼 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서서히 인지하기 시작했다. 남편도 내 표정을 읽었는지 최대한 빨리 음식을 입으로 가져갔다. 세트 메뉴를 시켜 디저트까지 먹는 호사를 누렸지만, 느긋하게 즐길 여유도 없이 우리는 모든 음식을 후루룩 해치워 버렸다.

시간에 쫓겨 부랴부랴 찾은 에펠탑

유람선 안에서 에펠탑을 만났던 순간이 어쩌면 가장 아름답고 황홀했던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 유람선 안에서 만난 에펠탑 유람선 안에서 에펠탑을 만났던 순간이 어쩌면 가장 아름답고 황홀했던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 김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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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둘러 식사를 마쳤지만 벌써 오후 10시였다. 샹젤리제에서 에펠탑까지는 걸어서 15분 정도 소요되는 거리였지만 남편은 지하철을 선택했다. 지하철을 타고 샤요 궁전 앞 출구로 서둘러 나왔다.

샤요 궁전 앞 광장에서 만난 에펠탑은 생각보다 훨씬 크고 선명했다. 해가 늦게 지는 파리의 석양이 에펠탑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에펠탑의 은은한 불빛과 철골 조명은 해질녘 하늘의 아름다운 그라데이션과 적절하게 어울리면서 멋진 풍경을 자아냈다.

하지만 나는 그 멋진 풍경을 제대로 즐길 수가 없었다. 가장 아름다운 자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사진을 찍고 있는 사람들이 되레 나를 슬프게 만들었다. 가족 사진은커녕 독사진도 찍을 겨를이 없었던 우리는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와 전망대 쪽으로 향했다.

이 철골 덩어리가 무엇이건대 나의 마음을 쥐었다 폈다 했던걸까?
▲ 에펠탑 아래에서 바라본 모습 이 철골 덩어리가 무엇이건대 나의 마음을 쥐었다 폈다 했던걸까?
ⓒ 김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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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펠탑 잔디밭에 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 함께 노래를 부르며 반짝이는 에펠탑의 낭만을 즐기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반짝이는 에펠탑과 함께 아름다운 순간을 즐기는 다른 사람들의 모습에 오히려 모욕감마저 들었다. 풍경이 매혹적일수록 나는 점점 더 고통스러워졌다.

아름다운 광경 앞이면 행복도 자연스레 따라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날 에펠탑에서 바라본 파리의 전망은 무척 아름다웠지만 나는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그때 알았다. 아름다운 대상으로부터 내 행복을 찾으려면, 그 전에 우선 좀 더 중요한 감정적·심리적 요구가 충족돼야 한다는 것을. 예컨대 아름다운 풍경을 즐길 수 있을 만한 마음의 여유 같은 것 말이다.

오후 11시 정각이 되자 갑자기 샤요 궁전 쪽에서 큰 함성 소리가 들렸다. 에펠탑 레이저쇼가 시작된 것이다. 샤요 궁전에서 레이저 쇼를 기다리던 사람들의 카메라가 번쩍이는 모습이 전망대에서도 보였다. 멀리서 넓게 감상해야 할 레이저 쇼를 전망대에서 보고 있다니! 나는 이때 정말 울고 싶었다. 유람선을 타자고 제안했던 남편에게 모든 원망이 돌아갔다.

내게 모욕감 줬던 에펠탑, 지금은 위로의 손길로

사이요궁의 모습과 저멀리 라데팡스의 모습이 보인다. 사진에 담긴 풍경은 나의 감정과 상관 없이 파리의 아름다운 모습을 담고 있다.
▲ 에펠탑 전망대에서 본 파리의 야경 사이요궁의 모습과 저멀리 라데팡스의 모습이 보인다. 사진에 담긴 풍경은 나의 감정과 상관 없이 파리의 아름다운 모습을 담고 있다.
ⓒ 김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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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고대하던 에펠탑 투어는 이렇게 허망하게 끝났다. 우리는 지하철 막차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전망대에 올라간 지 30분도 채 되지 않아 서둘러 내려와야 했다. 에펠탑을 뒤로 한 채 아픈 발을 부지런히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정말 오랫동안 기다렸던 순간이었다. 결혼 5주년을 맞이하는 날을 에펠탑에서 보내고 싶었다. 아주 비싸고 맛있는 음식을 천천히 음미하지 못하고, 5분 만에 후다닥 해치워 버린 느낌이었다.

나는 이렇게 파리를 떠날 수 없다는 생각에 그 다음날 다시 한 번 에펠탑을 방문했다. 하지만 이미 기대감이 사라져버린 샤요 궁전과 에펠탑은 더 이상 낭만적이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장소가 돼 있었다.

현재 아일랜드에 사는 나는 집에서 우울할 때 언제나 그곳의 우중충한 날씨와 특별히 볼 것이 없는 시골 풍경을 탓했다. 하지만 파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더욱이 내 인생에서 가장 가고 싶었던 에펠탑에 왔다는 사실 자체가 기쁨을 보장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아름다운 장소가 나를 절망적인 상황으로 내몰 수도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여행지에서 돌아온 지금, 그때의 실망스러웠던 기억보다는 아름다웠던 추억이 더 많이 남아있다. 그때 제대로 즐기지 못했던 에펠탑의 반짝이는 모습이 생생하다. 당시에는 나를 슬프게 했지만, 지금의 내게는 위로의 손길이 돼주기도 한다. 그 사실이 사뭇 고맙기까지 하다. 다음 기회에 여행을 떠난다면 어그러지는 계획 속에서도 상황을 즐기는 여유를 가지리라 다짐해 본다.

나의 감정과는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있을 그때.
▲ 에펠탑 야경 나의 감정과는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있을 그때.
ⓒ 김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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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유럽여행, #프랑스, #파리, #에펠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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