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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과섬을잇다>
 <섬과섬을잇다>
ⓒ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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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여름, 사무실 근처에 해고 노동자를 돕는 '희망식당'이 문을 열어 직원들끼리 점심을 먹으러 간 적이 있다. 검게 그을린 얼굴의 해고 노동자들이 앞치마를 두르고 음식을 날랐다. 쑥스러운 얼굴로 후식이라면서 드립 커피를 가져다 주셨는데, 한 모금 마셔보니 놀랄 정도로 썼다.

"커피를 처음 내려보신 게 아닐까?" 우리는 미소 띤 얼굴로 속삭였다. 차마 남기기 미안해 그걸 겨우겨우 다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무실로 돌아오면서 점심 한 끼지만 바른 일을 했다는 뿌듯함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그 뒤 얼마 되지 않아 회사를 그만뒀다. 지난주, 오랜만에 직원들이 한 자리에 모였는데 놀랍게도 모두 실직자가 돼 있었다. 일부는 회사 사정이 어렵다는 이유였고, 나머지는 그에 반발해 사직서를 썼다고 했다. 해고가 이뤄진 게 회사 사정이 이유가 아니라는 정황들 때문이었다. 이들은 "이대로 넘어가서는 안 된다, 대응해야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는다"는 주변의 권유를 받고 있었다.

그들과 헤어진 뒤 집으로 돌아와 어수선한 마음으로 책을 펼쳤다. 장기투쟁사업장을 다룬 <섬과 섬을 잇다>라는 책이다. 첫 번째 챕터인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2년 전 희망식당을 방문했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 '쌍용차 문제'가 우리에게 그렇게나 가까이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아주 가까운 미래,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생각에 미치자 새삼 소름이 끼쳤다.

지난 주 그 날도 우린 이런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희망식당 이야기가 얼핏 나왔다 하더라도 피식 웃고 넘겼을 것이다. 쌍용차, 콜트콜텍, 코오롱 투쟁은 여전히 너무나 멀고, 나와는 동떨어진 일로 여긴다. 왜일까? 이 간격은 어디서 오는 걸까?

2년 전 마주한 쌍용차 문제, 남의 일이라 생각했다

책 <섬과 섬을 잇다>는 전국의 투쟁 현장 이야기들을 모아 기록한 책이다. 쌍용자동차부터 밀양 송전탑, 재능교육, 콜트·콜텍, 제주 강정마을, 현대차 비정규직, 코오롱까지 총 8곳의 이야기를 담았다.

현장마다 만화가와 르포 작가들이 2인 1조를 이뤄 작업했다. 짤막한 만화 뒤에 르포가 나오는 형식이다. 만화가 먼저 흥미를 유발하며 자연스럽게 이야기 속으로 끌어당기는 역할을 하고, 거기서 품게 된 궁금증을 르포가 해소해준다. 르포를 읽고 나면 이 싸움이 언제 어떻게 시작됐고 어떤 과정을 거쳤으며, 핵심 문제는 무엇인지, 현재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싸우고 있는지 등등 그동안의 단편적으로만 알고 있던 이슈를 체계적이고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수 있다.

이 책은 작가들이 조직한 '섬섬 프로젝트'에서 출발했다.  이들은 '마음 아파하지만 말고 뭐라도 해보자'고 의기투합한 끝에 2013년, 심리치유센터 와락에서 첫 모임을 갖고 활동을 시작했다. 섬처럼 고립돼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그림과 글을 통해 세상과 이어주기 위해서였다.

이들이 공통으로 겪고 있는 큰 고통은 '외로움'입니다. 아무 일 없이 돌아가는 세상에서, 바로 곁의 이웃조차 그 사실을 모른 채 싸우고 있는 작은 섬들. '섬섬 프로젝트'는 이 외로운 섬들을 이어보려는 시도입니다. 철탑 위의 노동자와 밀양의 산을 지키는 노인의 삶이 둘이 아니며, 부평 기타공장의 노동자와 강정마을을 지키는 아이의 삶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이 땅에 함께 살고 있는 한 우리는 모두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연결점을 놓쳐 고립된 이 작은 섬들을 다시 '우리' 안으로 이어보려 합니다. -<섬과 섬을 잇다> 머리말에서 

이 책은 각 투쟁 현장을 취재하고 기록해 병렬적으로 묶어 놓았기 때문에 각 투쟁이 어떻게 연결돼 있는지, 연결점이 어딘지 명확하게 보여주진 않는다. 장기투쟁사업장 간 연대를 중점적으로 조명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각각의 이야기를 다 읽고 나면 마치 당연하게도, 이 모든 개별적인 이야기들이 하나의 공통된 움직임에서 비롯됐음을 알 수 있다.

이윤과 효율을 절대적 가치로 여기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사람이든 자연이든 마구잡이로 짓밟는 힘. 자본과 국가가 결탁한 거대한 권력. 가진 자가 가지지 못한 자를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다는 사회적 분위기. 사회라는 해수면 아래, 물살의 방향은 그렇게 움직이고, 우리 모두 그 물결 위에 섬처럼 떠 있는 셈이다. 우리는 같은 바다 안에서 확실히 연결돼 있다고 할 수 있다. 같은 사회에 살고 있다는 건 바로 그런 의미일 것이다.

찜찜함은 남는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말에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현실에서 얼마나 그런 실감을 하느냐는 다른 문제다. 부당 해고를 당했다고 해서 곧바로 쌍용차를 떠올리고 연대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내가 해고를 당한다해도 쌍용차 노조들과 동떨어져 있다고 느끼는 게, 현실이다. '나는 대규모 공장 노동자가 아니고, 노조 소속도 아니고,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는 게 그리 어렵지 않으니까'라는 생각을 먼저 떠올리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이런 생각을 해야지" 라는 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비슷한 처지가 되도 자기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저들을 덮친 파도와 나를 덮친 파도는 성격이 다른 파도라고 여긴다. 

2012년 10월 방문했던 밀양 바드리마을의 농성장
▲ 바드리마을 농성장 2012년 10월 방문했던 밀양 바드리마을의 농성장
ⓒ 김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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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전탑 충돌, 80대 할머니 실신", "밀양 송전탑 갈등... 목줄 걸고 '살려달라'"...그동안 밀양은 숱한 폭행, 욕설, 모욕에 시달렸다. 한전이 고용한 용역들은 노인들을 밀쳤다. 감금했다. 욕과 반말은 예사였다. 고립된 산에서 싸움이 벌어지고 대부분 여성인 탓에 성적인 폭력도 만연했다. 여성의 몸을 장정 여럿이 깔고 눌렀다. 비구니 스님의 음부를 주먹으로 내리치는 일도 벌어졌다. 한전 직원들에게 둘러싸인 팔십 먹은 노모가 그들의 코앞에서 옷을 내리고 소변을 봐야 했다. 밀양서 경찰은 불러도 오지 않았다. 외지에서 온 의경들만 가득했다. -<섬과 섬을 잇다> 본문 69~70쪽 일부

폭력 사범의 벌금이 두 배 이상 높아진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시비가 붙어 뺨을 한 대 때리면 벌금 100만 원 이상이라고 했다. 누가 함부로 내 뺨을 때리지는 않겠구나 괜히 안심이 되기도 했고, 짧은 시간이나마 자의적인 폭력이 용인되지 않는 선진 사회에 살고 있다는 만족감도 느꼈다. 동시에 "같은 날 밀양에서 벌어지는 일들은?"을 생각하니 말문이 막혔다. 발가벗은 채 질질 끌려가는 노인들의 처참한 사진을 보면 어떻게 이런 폭력이 2014년 한국에서 그것도 대낮에 카메라 앞에서 일어날 수 있는지, 믿기 어려웠다. 용역 집단과 그들을 고용한 이들은 아무 처벌도 받지 않고, 짓밟히고 폭행당한 이들만 불법 시위와 공무집행 방해 죄목으로 엄청난 금액의 벌금을 물게 된다는 사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었다.

무슨 세상이, 무슨 나라가 이런가? 국가와 자본이란 본래 이런 것이라고 생각하면 서서히 체념하게 된다. 좋든 싫든 이런 세상에서 살고 있고 이 거대한 흐름을 막거나 되돌릴 순 없을 것이다. 이런 기사들을 접할 때마다 분노와 함께 강한 무기력함을 느꼈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어떤 것도 듣고 싶지 않았다.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우리가 연결돼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도 있지만 알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다. 알지만 외면하고 싶을 때도 있다. 책 속의 주인공들은 어떨까? 이들이라고 그런 체념이 없었을까? 처음부터 모든 걸 아는 의식화된 사람들이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 없는 이유

책이 다루고 있는 내용이 그간 나온 기사나 기록물들과 큰 차이가 있진 않다. 하지만 책은 개별 사안에 집중하는 동시에 그 당사자들, 투쟁 과정에서 고뇌하고 슬퍼하고 분노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데 주의를 기울였다.

특히 만화의 역할이 빛난다. 실제 인물의 외모와 특징을 잡아내 그렸다. 투쟁에 참여하는 노동자, 할머니, 시민들이 어떤 사람인지 훤히 보인다. '이런 사람이 있었구나, 이런 일을 겪었구나' 생각하며 감정 이입하게 되고, 그 뒤로 어떻게 됐을까 궁금해진다. 쌍용자동차, 밀양 송전탑, 재능교육, 콜트·콜텍, 제주 강정마을, 현대차 비정규직, 코오롱이라는 완강한 대명사. 그 이름 속에 가라앉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람 냄새나는 만화 그림이 다시 떠오르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습니다."

책을 다 읽고나면, 이 말은 바로 책 속에 등장하는 현장 속의 그들이 하는 말이구나, 생각하게 된다. 모두가 서로 연결돼 있다는 걸 깨닫고, 거대한 힘 앞에서 느낄 수밖에 없는 체념도 껴안은 사람들. 바로 이 책이 다루는 주인공들이다. 서로서로 연결돼 있다는 것을 알며, 그것을 외면하지 않고 싸우는 사람들. 더불어 자신들의 싸움이 중요하다는 걸 아는 사람들. 섬과 섬을 잇는 법이 무엇일까. 그 대답은 어쩌면 그들의 목소리 속에 있는지도 모른다. 책 속 쌍용차 노동자의 말이 귓 속에 맴돈다.

'혼자 살 순 없지 않느냐.' 우리가 77일 동안 공장 안에서 단호하게 버린 건 혼자만 잘사는 방법이었다. 우리는 혼자 살고자 동료를 버리는 모습을 수도 없이 봐왔다. 홀로 견뎌야 하는 스트레스와 괴로움이 어떤 것인가를 우리는 죽음을 통해 똑똑히 목격했다. 결국 살기 위해서는 함께 사는 방법밖에 없음을 우리는 알았다.-<섬과 섬을 잇다> 본문 35쪽 중에서

덧붙이는 글 | <섬과 섬을 잇다: 여전히 싸우고 있는 우리 이웃 이야기>(이경석 외 113인 함께 지음, 한겨레출판,2 014. 5. 21, 279쪽, 15,000원)



섬과 섬을 잇다 - 여전히 싸우고 있는 우리 이웃 이야기

하종강 외 지음, 한겨레출판(2014)


태그:#섬과 섬을 잇다, #쌍용자동차, #콜트콜택, #밀양 송전탑, #재능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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