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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날 찐빵 축제로 흥청일 때의 안흥마을
 지나날 찐빵 축제로 흥청일 때의 안흥마을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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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흥으로 가다

나는 생활근거지였던 서울을 2004년 3월 하순에 떠나 생면부지의 강원도 횡성 안흥마을로 갔다. 거기서 꼭 5년 8개월을 살고 2009년 11월에 이웃 원주로 이사를 왔다. 그래서 강원도 횡성군 안흥4리 말무더미 마을은 나의 제2고향으로 그곳에서의 추억은 아련하다. 아마도 내 평생 가장 열심히 글을 썼던 추억의 고장으로 남을 것이다.

나와 아내는 그 마을에서 남의 집을 거저 얹어 얼치기 농사꾼으로 살았다. 내 평생 거기 살면서 주경야독으로 공부도 가장 열심히 많이 했고 <안흥 산골에서 띄우는 편지>, <길 위에서 길을 묻다>, <그 마을에서 살고 싶다> 등의 산문집과 <지울 수 없는 이미지>,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사> 등 사진집을 펴냈고, 장편소설 <제비꽃>도 썼다. 이래저래 세어보니 10권이 넘었다.

안흥찐빵마을을 개척한 심순녀 여사
 안흥찐빵마을을 개척한 심순녀 여사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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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흥마을에 살아보니 산도 물도 좋고, 인심도 좋았다. 마을 이름대로 평안하고 흥겨운 고장이었다.

그 마을에 한 10년 살고자 하였으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눈물을 머금고 그 고장을 떠나왔다.

사실 내가 그 마을에 살 때는 정말 그 고장을 사랑했다. 특히 그 마을이 찐빵명물 마을로 이름난데 대하여, 나는 우리 농촌마을의 성공사례라고 가능한 홍보에 전력을 기울였다.

안흥찐빵 홍보자문위원이 되다

어쩌다 초대받은 TV 대담에서도,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여러 번 자랑을 겸하여 소개했다. 그래서 한때 안흥찐빵 축제위원회로부터 홍보자문위원으로 위촉을 받기도 했고, 한광수 안흥면장과 함종국 찐빵추진위원회장으로부터 찐빵 축제 때에 안흥의 작가로 도서전시회 및 사인회를 부탁하여 그 청에 응하기도 한 바, 예상 외 호응으로 책도 많이 팔아 그 이익금을 연말불우이웃성금으로 전액 기부하기도 했다.

그때 안흥찐빵 마을은 활기가 있었다. 주말이나 피서 철에는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찐빵을 사려고 일부러 이 마을을 들러 찐빵가게 앞은 50~60명이 줄서기 마련이고, 그분들은 두세 시간 기다리다가 한두 박스 사들고 돌아가기 일쑤였다. 나도 집으로 찾아오는 지인들에게는 찐빵 한 박스씩 사서 자동차에 실어 보냈고, 먼 곳에 사는 지인들에게는 택배로 숱하게 보냈다.

안흥 찐빵 축제 때 필자의 사인회 부스
 안흥 찐빵 축제 때 필자의 사인회 부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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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소문이 들리다

그런데 그 마을에서 살다보니 이상한 좋지 않은 소문이 들리기 시작했다. 중국 팥을 쓴다느니, 어느 점포는 맛이 없고 크기가 작다든지…. 어느 하루, 찐빵자문위원으로 초대받았기에 그 자리에서 몇 마디했다. 나는 이웃나라 일본을 방문하여 본 우동가게와 다자이후 텐만구 앞 매화무늬 찹쌀떡 이야기를 하면서, 아무튼 고집스럽게 옛 전통을 묵묵히 지켜가는 게 중요하다고 매우 강조하면서 몇 가지 제안도 했다.

'안흥찐빵은 국민의 찐빵'이라고 펼침 막을 내건 지난날 안흥면사무소
 '안흥찐빵은 국민의 찐빵'이라고 펼침 막을 내건 지난날 안흥면사무소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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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첫째, 찐빵을 만드는 아주머니들에게 대우도 잘 할 뿐 아니라 소정의 제빵사 자격증을 부여하고 그분들에게 제복을 입혀 한 기술자로서 긍지를 심어주라고 했다.

그리하여 그분들이 용돈 벌기 위해, 농한기에 심심해서 찐빵가게에 나와 만든다는 의식을 불식시켜 "나는 내 고장 명품 찐빵을 만든다'는 자부심을 갖게 하라고 주문했다.

그 둘째, 찐빵협회에서 품질유지를 위해 자체적으로 위원회를 만들어 감시지도하며 우후죽순처럼 제멋대로 생겨나는 찐빵가게가 나오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사실 그 당시 안흥마을에만 18~19개 찐빵가게 저마다 '원조'를 내세우고 있었다. 정작 심순녀 찐빵 원조는 원조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나의 당부는 '쇠귀에 경 읽기'였다. 타지에서 굴러온 너는 글이나 쓰고 찐빵마을 선전이나 해 줄 거지 뭔 참견이냐고 아무도 듣지 않았다.

곧 몇 해 후 이상한 소문이 나돌고, 찐빵 가게 앞에는 "우리 집 찐빵은 손으로만 빚습니다" 해괴한 펼침막이 나붙었다. 그 사연을 알아보니 3개 업소가 찐빵 만드는 기계를 들여놓고 대량으로 찐빵을 생산한 모양이었다.

그때 그 모든 걸 기사화할까 하려다가 자체적으로 수습할 텐데 자칫하면 안흥찐빵 전체에 누가 될 것 같아 참고, 원주로 이사 왔다. 그 뒤 안흥에 갔을 때 우연히 한 기계찐빵 업자를 만났다. 그는 이전 나에게 '선배님'하고 따르던 이이기에 어떻게 기계로 찐빵을 만들면서 '안흥찐빵'으로 행세하느냐 나무라자 나에게 대들었다. 기계찐빵이 더 위생적이고, 인력난에다가 고임금으로 아줌마들을 구할 수 없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항변했다. 또, 한 기계찐빵 업자는 최고급차를 타고 씽 지나갔다.

손으로 빚은 안흥찐빵
 손으로 빚은 안흥찐빵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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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의 상도를 가져라

얼마 전, 나는 옛 생각이 나서 안흥마을에 갔다. 그날이 토요일이었는데 안흥마을은 이전과는 달리 아주 조용했다. 거리에도 찐빵가게도 사람이 없었고 활기도 없었다. 내 단골이었던 가게로 갔다. 주인은 나를 반겨 맞으며 하소연을 했다.

"손님이 팍 줄었어요. 특히 세월호 침몰 이후로는…."

나는 그 얘기를 듣고 안흥찐빵 침몰 원인은 당신네 찐빵업자들에게 있고, 이런 사태를 해결치 못하고 방치한 안흥면장, 횡성군수, 강원도지사에게 있다는 것을 인지했다.

안흥찐빵업소 업주들이여! 최소한의 상도(商道)를 지키세요. 제발 일확천금 노리지 말고 두고두고 안흥찐빵 명물마을로 대를 잇게 하세요. 그게 선진국이 되는 길이요, 모두가 잘 사는 길입니다. 그리고 관계공무원 여러분! 그것 하나 해결치 못하고 무슨 주민의 대표로 녹을 먹고 있소.

어디 이런 일이 안흥마을뿐이겠는가? 온 나라가 천박하고 부도덕한 자본주의로 세월호처럼 침몰하고 있다.


태그:#안흥찐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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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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