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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97 인터뷰 도중 이인근 지회장은 동료 중 한 명에게 "저거 2697로 바꿔야지!"라며 농성 기간 숫자를 바꿀 걸 부탁했다.
▲ 2697 인터뷰 도중 이인근 지회장은 동료 중 한 명에게 "저거 2697로 바꿔야지!"라며 농성 기간 숫자를 바꿀 걸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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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 '2697'로 바꿔야지!"

이인근(48) 금속노조 콜텍악기지회 지회장이 함께 농성하는 동료에게 외친다. 농성장 앞 나무에 걸린 목각엔 '2696'이라 적혀 있었다. 동료는 맨 오른쪽 '6'이라 쓰인 목각을 뒤로 넘겨 '7'로 바꿨다. '2697'. 그들이 해고당하고 난 뒤 농성을 시작한 지 2697일이 지났다.(6월 20일 현재)

2007년 4월, 통기타 제조업체 콜트악기는 인천 공장의 노동자 56명을 정리해고했다. 그리고 같은 달 충남 계룡시에 있는 자회사 콜텍악기에도 휴업 조치를 내린다. 그해 7월 콜텍 공장은 폐쇄됐고 노동자 67명은 전원 정리해고 당했다. 노동자들은 인천 콜트 공장에 모여 농성을 시작했다. 그렇게 7년이 흘렀다.

그러나 지난 6월 12일, 콜텍 해고자들의 기대는 다시 무너졌다. 대법원은 해고자들이 회사를 상대로 낸 해고무효확인 청구소송에 대해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사측의 정리해고가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로 인한 것'이라 했다.

지난 6월 20일, 이인근 지회장을 만났다. 인천 부평구 갈산동에 있는 농성장을 방문하니, 기타 연습 중인 이 지회장의 모습이 보였다. 일주일 전의 패소 판결에도 이 지회장의 표정은 어둡지 않았다.

7년 기다린 해고무효 소송 '패소'... "예전과 달라진 건 없다"

기타 연주하는 이인근 지회장 이인근 지회장은 "실력이 늘지 않는다"며 웃었다. 그러나 그는 지나치게 겸손했다. 그의 기타 실력은 수준급이었다.
▲ 기타 연주하는 이인근 지회장 이인근 지회장은 "실력이 늘지 않는다"며 웃었다. 그러나 그는 지나치게 겸손했다. 그의 기타 실력은 수준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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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12일 이후로 어떻게 지내고 있나.
"예전과 달라진 건 없다. 매주 월요일 저녁 밴드(콜트-콜텍 해고자들이 만든 밴드, '콜밴') 연습, 화요일 '야단법석'(시민들을 초대해 매주 화요일 저녁 농성장에서 벌이는 행사), 수요일 서울 지역 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공동투쟁, 목요일 서울 등촌동 콜텍 본사 앞 집회, 금요일엔 격주로 유랑문화제를 연다. 오늘도 유랑문화제 때문에 저녁에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 가야 된다."

- 7년 동안 단식, 1인시위, 고공농성(이 지회장은 2008년 10월 한강 망원지구 철탑에 올라가 고공농성을 했다), 해외 원정투쟁, 문화제 개최 등 안 해본 게 없는 걸로 안다. 가장 힘들었던 때는 언제인가.
"2009년에 조합원들이 생계 문제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투쟁을 포기해야만 했던 때가 가장 힘든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개인적으론 그렇게 힘들진 않았다. 조합원들이 항상 고생했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새벽에 박영호 사장 쫓아다니고…. 그러다가 생계문제로 투쟁을 포기해야 했을 때, 그때가 가장 많이 힘들었다. 그리고 싸움이 장기화되면서 조합원 간에 서로 불협화음이 생길 때도 특히 힘들었다."

- 그래도 떠난 사람들이 다른 일을 하면서 투쟁기금을 마련해 준다는 얘기를 들었다.
"많은 동지들이 투쟁을 포기하고 떠나가면서, 남은 조합원들 중에도 생계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생계를 위한 부분을 좀 열어줬다. 거의 대부분이 돈 벌러 나가고, 그 대신에 월급에서 일정 부분 투쟁기금을 내서, 투쟁만 하는 사람들이 그걸 가지고 조금씩 나눠서 생계비로도 쓰고 활동비로도 쓰고 있다. 그렇게 같이 투쟁하고 있다. 멀리서나마 같이…."

콜트 홍보대사 거절한 록밴드... '기타 레전드' 신대철도 응원

 콜트.콜텍 해고 노동자들이 농성 중인 천막. 인천시 부평구 갈산동에 위치.
 콜트.콜텍 해고 노동자들이 농성 중인 천막. 인천시 부평구 갈산동에 위치.
ⓒ 강선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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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힘든 순간들이 있었음에도 오랜 기간 싸워온 기록들을 보며 감명받았다. 국내외 많은 사람들의 연대도 있었고…. 좋은 기억이나 보람찬 이야기를 들려주면 좋겠다.
"좋은 기억은 많다. 일단 홍대 라이브 클럽을 처음 간 게 기억에 남는다. 사실 노동자들이 라이브 클럽을 간다는 건 극히 어렵다. 홍대 클럽 '빵'이란 데서 콜트-콜텍 노동자들을 위해 인디 뮤지션들이 1주일간 헌정 콘서트를 할 때, 그때 처음으로 라이브 클럽이란 데를 가봤다. 신기했다. 한편으로 많은 인디 뮤지션들이 우리 투쟁을 응원해주고 있단 사실에 놀랐다. 힘을 받기도 했고.

콜트악기 자회사인 기타넷에서 인디 밴드 갤럭시익스프레스한테 홍보대사 요청을 했었다. 밴드가 콜트 기타를 연주해주면 그들이 앨범 내는 걸 도와주는, 일종의 스폰서 역할을 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갤럭시익스프레스가 사측에다가 '노동자들하고 관계가 안 좋은 걸로 아는데 해결했냐'라고 물으면서 홍보대사를 거절했다."

- 미국, 일본, 독일 등 해외 원정투쟁도 갔다 왔는데, 그때 돈이 참 많이 들었겠다.
"처음엔 국내에서 후원해주고 금속노조에서도 약간의 지원을 해줘서 다녀왔다. 일본 후지락페스티벌은 주최 측 NGO 단체에서 초청을 해서 가게 됐다. 미국 철강노조에서 초청해서 미국에 간 적도 있다. 그리고 미국 남쇼(NAMM Show, 세계 최대 규모의 악기 박람회)에 우리가 못 가니까 '교민 중에서 누가 행사장 가서 1인시위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요청을 했는데, 미국 교민들이 '당사자들이 직접 와서 하는 게 효과적이지 않겠냐'며 여비를 마련해줘서 미국에 갔다."

- 갤럭시익스프레스 외에도 국내외 유명 음악인들의 연대가 많지 않았나? 국내의 신대철, 게이트플라워즈, 해외의 RATM 등이 연대의 목소리를 낸 걸로 기억한다.
"지난해 11월 1일 콜텍문화재단에서 기타 레전드'G6'라는 행사를 했다. 그때 콜트-콜텍 문제를 알고 있던 한 분이 신대철씨한테 SNS 멘션을 보내서 신대철씨가 우리 상황을 알게 됐다. 그래서 '난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사정을) 몰랐다. 기회가 된다면 노동자들을 위해 공연을 하고 싶다'고 해서 12월에 공연이 열린 거다(관련기사 : 신대철·한상원의 손놀림... '레전드'란 이런 것).

RATM는 처음 미국 원정투쟁 갔을 때 봤다. (RATM의 기타리스트) 톰 모렐로가 자기 돈으로 뉴욕에서 LA까지 와서 후원공연도 해줬다. 그때가 아이티 지진 났을 때였는데, 공연 수익금을 우리한테 준 걸 우리가 안 받고 아이티 쪽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톰 모렐로가 거기에 감명을 받은 듯하다. 톰 모렐로는 2012년 노동절에 뉴욕 한복판에서 백여 명이 기타 치고 하는 자리(당시 '점령하라' 운동의 일환으로 마련된 행사)에서 콜트-콜텍 노동자들 이야기를 다시 했다고 하더라.

참 특별한 게, 생산자와 소비자가 함께하는 투쟁 방식 아닌가? 기타를 만들던 노동자들과 그 기타를 가지고 공연을 하는 사람들이 같이 연대를 하는 것 아닌가? 그런 부분이 특이한 투쟁이다."

- 외국에 나가서 싸우던 중, 국내에선 얼굴도 안 비치던 박영호 사장을 만나서 쫓아가 싸운 적도 있는 걸로 기억한다. 그때 무슨 얘기를 했나?
"우리가 독일 갔을 때 악기 행사장 앞에서 자꾸 시끄럽게 하니까 행사 주최 측이 박영호 사장과 만남을 주선했다. 별 영양가는 없었다. 우리는 '우리 다 복직시켜라', '국내 공장 정상화 해라' 그랬는데 박영호 사장은 '이미 다 끝난 일이다. 여기서 이야기하지 마라' 이랬다.

정말 사측이 더 이상 한국에서 기타를 만들 생각이 없다면, 그러한 입장을 문서화하자는 게 우리 요구다. 그러면 우리도 미련 없이 투쟁을 정리하겠다는 거다. 그러나 회사에선 계속 피하고 있다. 정말 국내에서 기타를 만들 생각이 없다면 못 써줄 이유가 없지 않나. 그걸 안 써 준다는 건 언젠가는 다시 국내에서 기타를 생산하겠다는 뜻이다. 그들의 가장 큰 목적은 애당초 '노동조합 와해'였던 것 아닐까 의심하는 이유다."

"'콜밴' 활동은 시민들과의 약속... 즐기면서 싸운다"

"콜트-콜텍 기타노동자들의 투쟁에 함께 해주세요" 인천시 부평구 갈산동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농성장 앞에 걸린 현수막
▲ "콜트-콜텍 기타노동자들의 투쟁에 함께 해주세요" 인천시 부평구 갈산동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농성장 앞에 걸린 현수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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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제, 집회 등을 통해 많은 시민 분들을 만나지 않았나? 특별히 기억에 남는 사람들이 있다면?
"원체 연대해주시는 분들이 많다. 다들 너나 할 거 없이 내 일처럼 해주시고 계셔서 딱히 누구라고 말씀 드리긴 힘들다. 유랑문화제 등을 열면 불매 서명운동도 하는데, 자청해서 오셔서 같이 서명도 받아주고 선전물도 나눠주시는 분들이 상당히 많다. 문화연대 같은 단체도 2008년부터 지금까지 쭉 같이 활동해오고 있고."

- 콜밴 활동도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이끌었다. 그동안 기타를 만들기만 하다 직접 밴드를 꾸려 공연을 한 건 처음이지 않았나? 활동 중 기억 나는 일화가 있나?
"첫 공연이 기억에 남는다. 2011년 11월부터 소셜펀딩을 통해 악기를 구입하고 12월부터 연습을 했다. 처음 연습한 곡이 민중가수 연영석씨의 <이씨 니가 시키는 대로 내가 다 할 줄 아냐>라는 곡이다. 가사 내용이 우리가 현장에서 일할 때의 상황과 잘 맞고, 결정적으로 코드가 두 개밖에 안 된다는 이유가 있었다. 그 노래로 12월 마지막 주 수요일 날 클럽 '빵'에서 하는 수요문화제 때 첫 무대에 섰다. 정말 뿌듯했다."

- 처음이다 보니 시행착오도 많았겠다.
"아무래도 연습 과정에서 불협화음들이 많았다. 누구나 그렇듯이, 좀 잘 하고 싶은 마음이 있지 않나? 근데 서로 그런 마음이 있다손 치더라도, 서로의 연습량은 똑같으려야 똑같을 수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그래서 '너는 왜 연습을 안 하니? 넌 그렇게 하면 안 돼' 그러다가 서로 얼굴 붉히고 '아이씨, 난 안 해!' 그런 경우도 있었다."

- 그래도 결과적으로 지금은 잘 되지 않았나?
"그렇다. 사실 다들 일종의 투쟁으로 한 거다 보니, 별로 열의는 없는 상태였다. 음악에 대해서 아는 바도 없고. 그렇다 보니 실력이 늘지가 않았다. 물론 우리가 하기 싫다면 말아버리면 그만이겠지만, 시민들의 후원을 받아서 악기를 구입했던 거지 않나? 후원자들과의 약속이었다. 그래서 하기 싫다고 해서 그만둘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누가 '나 이거 안 해!' 하고 포기한다 하면 그렇게 설득했다. 지금은 우리가 즐겨야 다른 사람도 즐겁고, 그게 우리의 투쟁을 알리는 데도 더 큰 도움이 된다는 걸 알기 때문에 더 즐겁게 하려고 한다."

-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나?
"후원재단 같은 기구를 하나 만들려 한다. 또 라이브 클럽 비슷한 걸 차려서 안정적인 투쟁 거점으로 삼고, 차와 약간의 주류 등을 판매하면서 그곳이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숙식 장소가 되게 하는 것이다. 예전에 쌍용차 해고자들이 '희망식당'을 했듯이, 자원봉사자들 신청을 받아서 '1일 점주' 형식으로 운영하는 계획을 갖고 있다. 기초자금을 약 1억 원 정도로 생각 중이고, 그 다음에 회원제로 매달 회비를 받는 거다. 액수는 5천 원이 될 수도 있고 1만 원이 될 수도 있고, 자율적이다."

인터뷰가 끝나고, 이 지회장에게 사진 찍기 위한 자세를 부탁했다. 이 지회장은 기타를 다시 들었다. 그는 기타로 <어쩌다 마주친 그대> 등 여러 곡을 연주했다. 이 지회장은 "실력이 늘지 않는다"며 쑥스러운 웃음을 지었지만, 그의 연주는 매우 훌륭했다. 가까운 시일 내에 꼭 그들의 '유랑문화제'에 여러 동료들을 데리고 가고 싶단 생각이 간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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