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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사는 친구로부터 오랜만에 전화가 왔다. 족히 5~6년은 된 듯 서먹하기까지 한데, 잘 지냈냐는 안부를 건네기가 무섭게 다짜고짜 '괜찮은지'부터 물었다. '웬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되물었더니, 대뜸 '교육부 공문도 못 봤느냐'며 나무랐다. 내용인즉슨, 어떻게 버젓이 학교 이름을 내걸고 세월호 희생자 추모 행사를 할 수 있느냐는 거다. 그것도 학교를 벗어나 마을 주민들을 불러다 모아놓고. 겁도 없이.

그도 교직에 있는데, 며칠 전 동료 교사가 '광주니까 이런 일도 가능한 것'이라면서, 읽어보라며 기사 하나를 카톡으로 보내주더란다. 얼마 전 <오마이뉴스> 소중한 기자가 쓴 '월드컵·올림픽 지나도... 세월호 3년 상 치릅니다'라는 글이었다. 관심 있게 읽어 내려가다 기사 내용과 첨부된 사진에 내가 근무하고 있는 학교 이름이 적힌 걸 보고 놀라, 부러 전화를 걸었다는 거다.

"너희 학교 어떤 '간 큰' 교사가 그런 일을 계획했다니? 학교장이 순순히 허락했을 리도 만무한데. 교사들이 자발적으로 동참했을 리도 없고. 너는 별 탈 없는 거지? 대통령을 비판했다고 교육부가 앞장서 고발까지 하는 요즘 같은 때는 조심, 또 조심해야지. 아무튼 광주는 대단한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솔직히 조금 부럽기도 하고."

"네가 말한 '간 큰' 교사가 바로 나야. 계획안을 반려하기는커녕 학교장이 무대에 올라 기꺼이 격려사를 해주었고. 동료 교사들 역시 무대에 올라 추모 노래를 부르고, 무대를 세팅하는 등 자발적으로 손을 보탰는걸. 참여하지는 못할망정 이런 추모 행사조차 당국의 눈치를 보고 두려워 한다는 게, 솔직히 난 잘 이해가 안 돼."

모든 어른들이 그렇지 않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6월 7일 오후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회의 주최 4차 범국민촛불행동에서 참가자들이 "특별법 제정" "박근혜 조사" 등을 촉구하고 있다.
▲ '세월호 특별법 제정' 청계광장 노란 물결 6월 7일 오후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회의 주최 4차 범국민촛불행동에서 참가자들이 "특별법 제정" "박근혜 조사" 등을 촉구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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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기 너머 그의 목소리엔 주눅이 들어 있었다. 몸을 사리는 게 역력했다. 그도 그럴 것이, 교육부는 한 달 전쯤 세월호 관련 추모 집회에 참가하지 말라더니, 며칠 전에는 세월호 관련 계기수업을 자제하라는 공문을 학교에 내려보낸 터다. 거기에 최근 대통령 퇴진을 들먹였다며 284명의 교사를 검찰에 고발까지 했으니, 납작 엎드린 것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당장 '학교 교직원회'라는 주최명을 너무 낯설어 했다. 교직원 모두가 공감했다는 의미로 쓴 거지만, 사실 교직원회가 공식적인 명칭은 아니다. 주최를 학교라고 하면 아이들이 포함된 개념이므로 의도적으로 그걸 피하기 위해 '급조한' 이름이다. 추모 행사에 학교가 아이들을 '동원했다'는 의심을 사는 게 싫기도 했지만, 이번만큼은 우선 기성세대가 '죄인'으로서 아이들 앞에 무릎 꿇고 용서를 구하자는 취지라는 걸 내보이고 싶었다.

그를 진정 놀라게 한 건 따로 있었다. 혹 대안 학교라면 모를까, 일제고사 점수에 일희일비하며 대학입시에 '올인'해야 할 인문계 고등학교가 어떻게 마을 주민들과 함께 행사를 꾸릴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연이은 질문 세례에 숫제 상관에게 보고라도 하듯, 그에게 행사 기획 단계부터 마무리되기까지의 전 과정을 상세히 설명해야 했다. '바통'을 서울에 있는 그의 학교에서도 넘겨받길 바라는 심정으로.

시작은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에서였다. 세월호 참사 이후 충격과 분노로 쓴 몇 꼭지의 기사가 독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적잖은 좋은기사 원고료(독자가 주는 원고료)가 쌓인 것이다. 달랑 서너 편의 글에 40여 만 원을 훌쩍 넘긴 좋은기사 원고료가 쌓였다. 좋은 곳에 써야 한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처음엔 그냥 유가족 모임 등에 기부를 할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고3 아이의 냉소 섞인 이 말에, 이 땅의 어른들이 모두 그런 건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의 생각이 틀렸다는 걸 증명해야 한다는 오기마저 생겼다.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삐딱한 시선과 무기력함을 바로잡기 위해서, 아무튼 교사로서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됐다.

"선생님은 이런 추모 분위기가 얼마나 갈 것 같아요? 우리나라 사람들의 '냄비 근성', 이번에도 예외는 아닐 걸요. 변두리 우리 학교에서만 노란 리본이 펄럭이면 뭐 해요. 인근 학교 다니는 친구들이 그러는데, 걔네 학교는 이미 세월호고 뭐고 다 옛날 이야기가 됐다고 하더라고요. 솔직히 우리 학교도 별반 달라진 게 없잖아요. 생각하면 할수록, 죽은 단원고 아이들만 불쌍하죠."

비단 그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이번 참사로 인한 아이들의 기성세대를 향한 분노가 자칫 우리 사회에 대한 냉소와 혐오로 번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그에게는 기성세대가 확 끓어올랐다가 이내 식고 마는 '냄비'가 아니라는 걸 증명해야 했다. 그러자면 '절대 잊지 않겠다'는 다짐과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실천을 약속하는, 기성세대의 '진심'들을 그러모아야 했다. 용처가 생긴 것이다.

학교는 닫힌 교문을 열었고, 마을은 학교를 품었다

교사, 생협 조합원, 시민단체 회원, 목사님, 신부님, 수녀님, 일반 주민들이 함께 만든 작지만 소중한 자리였다. 음악회가 있은 후 매주 수요일마다 무대에서는 작은 추모 무대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 학교와 마을이 함께 만든 세월호 추모음악회 교사, 생협 조합원, 시민단체 회원, 목사님, 신부님, 수녀님, 일반 주민들이 함께 만든 작지만 소중한 자리였다. 음악회가 있은 후 매주 수요일마다 무대에서는 작은 추모 무대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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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때 학교가 자리한 마을에서 참사 이후 매주 수요일 저녁마다 촛불 모임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비록 큰 규모는 아니라 해도, 생면부지의 유가족들과 기꺼이 고통을 나누려는 마음 따뜻한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었던 거다. 그들과 이웃에 산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학교 교직원회라는 이름을 걸고 힘을 보태기로 마음먹었다.

우선 학교 내에서 이뤄지고 있는 교사들과 아이들의 추모 노력을 그들에게 알리고자 했다. 노란 리본의 추모 띠가 교정을 덮고, 단원고 아이들에게 편지를 보내며, 심지어 대통령에게 탄원서까지 쓰는 아이들의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위로와 희망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학교와 마을의 '진심'들이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장이 필요했고, 추모 음악회는 그렇게 기획되었다.

마을의 한복판 근린공원에다 학교가 보유한 음향 장비와 악기들로 추모 무대를 마련했다. 관할 구청에 공원과 전기 사용 허가를 받고, 인근 아파트 단지를 일일이 찾아가 소음 발생에 대한 양해를 구했다. 주변 학교에 공문을 띄워 교사들의 참여를 독려하고, 촛불 모임을 이어가던 마을 자치회에 행사 계획을 알리고 협조를 구했다.

학교의 연간 학사일정에도 없는, 그야말로 즉흥적인 행사였으므로 예산이 잡혀있을 리 없었다. 바로 이때 사막의 오아시스가 돼 준 것이 곧 좋은기사 원고료였다. 어차피 내 몫이 아니라는 생각에 아깝기는커녕 외려 뿌듯하고 우쭐한 마음마저 들었다. 독자 원고료는 그렇듯 학교가 울타리를 넘어 마을 주민들과 함께하는 추모 음악회의 '종잣돈'이 됐다.

학교는 굳게 닫힌 교문을 열었고, 마을은 학교를 품었다. 시작은 학교였지만, 무대는 온전히 주민들 몫이었다. 토박이 주민들과 생활협동조합 사람들, 한새봉 두레, 참교육학부모회 등 지역 시민단체 회원들도 힘을 보탰고, 신부님들과 인근 수녀님들까지도 무대 위에 올라 추모의 마음을 나눴다. 하나같이 '세월호에 대한 기억이 가뭇없이 사라질까 두려워' 자발적으로 참여한 것이다.

기실 세월호 참사는 내게 학교와 지역공동체 사이의 관계에 대한 고민을 던져주었다. '우리 아이들의 미래'라는 화두를 걸고, 학교가 교문을 벗어나 지역사회와 함께 호흡하는 마당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교육이라는 광범위한 영역을 온전히 학교에 일임해버리는 가정과 지역사회도 문제지만, 마치 아이들에 대한 교육권을 독점적으로 행사하려는 학교도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문제의식에서다.

세월호 추모 불씨를 꺼뜨리면 안된다는 절박함

아프리카 속담에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나만 잘 살면 된다'는 각자도생의 가치관을 내면화한 채 철저히 파편화한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려주는 속담이다. 당장 이번 참사의 위로와 치유를 위해서도 온 마을, 온 사회가 필요하다. 이는 학교가 굳게 닫힌 문을 열고 울타리를 넓혀 마을 안으로 들어가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공교롭게도 추모 행사가 치러진 날은 우리나라 축구 대표팀이 러시아와 첫 경기를 가졌던 6월 18일(수)이었다. 월드컵이 끝나고 여름이 지나면 곧장 인천 아시안게임이 이어지고, 내년엔 광주 유니버시아드 대회까지 열리는 국제 스포츠 행사의 도미노 속에, 행사에 참여한 200여 명의 주민들은 추모의 불씨를 어떻게든 꺼뜨리지 말아야 한다는 절박함을 공유하고 있었다.

모두 세월호 참사로 자신의 삶과 학교, 사회, 나아가 대한민국이 근본적으로 변화되기를 바라는 한결같은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다. 한 시간 반 동안 우리는 희생자들을 떠올리며 추모의 노래를 불렀고 편지를 읽고 추모시를 낭송하며 함께 울었다. '절대 잊지 않겠다'고,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서로 굳게 다짐하면서.

추모 음악회에 대한 '자초지종'을 전화기 너머로 가만히 듣고만 있던 친구는 전화를 끊기 전 푸념처럼 이렇게 답했다.

"아직도 이삼십 대처럼 겁 없이 살아가는 네가 부럽긴 하다만, 광주가 아니었다면 꿈조차 꾸지 못했을 거다. 취지야 어떻든 교사들이 학교 밖에 나가 자기 목소리를 낸다는 것 자체가 '종북 세력'으로 낙인찍히는 일이니까. 안 가봐서 모르지만, 적어도 광주에는 '세월호 참사 이용하는 종북 세력 물러가라'는 식의 현수막은 없을 것 아니냐.

애먼 수백 명 아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세월호 참사를 잊는다는 건 유가족의 고통과 슬픔을 나 몰라라 하는 짓이라는 걸 안다. 이 비극적인 사건을 겪고도 돈에 미쳐버린 우리 사회를 성찰하지 못하고, 지금의 정의가 물구나무선 가치관의 혼돈을 바로잡지 못한다면, 그건 우리 아이들과 역사에 죄를 짓는 일이라는 것도 모르지 않는다. 그것이 학교가 앞장서야 할 충분한 이유라는 것 역시도. 그러나..."

그의 말에 '종종 연락하며 지내자'는 시답잖은 말 외엔 아무런 대꾸도 하질 못했다. 그의 말대로 '대단한' 광주에 살아서, 여전히 세월호 희생자들과 유가족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는 이웃들이 곁에 많아서, 나는 '복 받은' 교사인가. 서울이나 다른 곳에서였다면 과연 나는 '무사하지' 못했을까.


태그:#세월호 참사, #추모 음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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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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