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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리에서 사흘 동안 머물면서 한국 돈으로 따지자면 큰 돈이라 할수 없지만 마하트마 간디가 새겨진 인도 화폐 루피를 펑펑 써댔다.
 델리에서 사흘 동안 머물면서 한국 돈으로 따지자면 큰 돈이라 할수 없지만 마하트마 간디가 새겨진 인도 화폐 루피를 펑펑 써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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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혹이 되려 했는데 오히려 내게 혹처럼 붙어 왔던 세 명의 카카오톡(아래 카톡) 친구들. 숙소를 잡는 순간부터 더 이상 그들을 위해 할 일은 없었다. 식사를 비롯해 인도에서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는 일까지 그들이 하는 대로 따라 했다. 비로소 며칠 동안 누군가의 혹이 되어 인도 적응기를 갖고자 했던 본래 생각을 되찾았다 싶었다.

숙소를 예약하자마자 그들은 네 명이 백 루피씩 나누자며 델리에서 빠하르간지(아래 빠간) 까지의 오토릭샤 비용을 건네준다. 괜찮다고 해도 막무가내로 돈을 건넨다. 이동하고 먹을 때 각자 비용을 해결하는 게 해외여행자들의 불문율이라 한다.

살아오면서 더치페이를 얼마나 했을까? 자식뻘 되는 여자 아이들과 택시비를 나눠 부담하다니. 비로소 낯선 땅 인도의 여행자가 됐다는 것이 실감난다. 그들은 내가 혼자 비싼 방세를 감당하는 것을 미안해하며 그 또한 똑같이 나누려 한다. 

"혼자서 쓰는 방인디 당연히 혼자 감당해야지."
"그래도 선생님 혼자서 부담이 너무 크잖아요."
"됐어 이 사람들아, 택시비 나눠 낸 것도 거시기한디. 시간이 늦었으니께, 인저 다들 씻고 자자고."

전대 두르고, 물가 파악하고... 완벽한 여행자로 거듭난 나

착하디착한 세 카톡 친구들과 헤어져 내 방으로 건너왔다. 배낭을 풀어 놓기도 전에 목이 탄다. 쌀쌀한 한국의 봄 날씨에 큰 아이가 입고 있던 패딩 잠바를 걸치고 왔는데 인도의 델리는 후덥지근한 여름 날씨였다. 비행기 좌석 앞 스크린으로 델리 온도를 대략 체크할 수 있었다. 비행기는 델리에 근접해 오자 조금씩 하강을 시작했다. 만여 미터가 넘는 상공에서 기내 밖 날씨는 영하 47도, 천 미터씩 하강하면서 점차 1도씩 올라갔고 비행기 바퀴가 델리 공항 활주로에 닿을 무렵엔 영상 24도가 됐던 기억이 난다.

숙소 천장에 매단 선풍기가 힘없이 돌아간다. 공항을 빠져나와 숙소를 잡기까지 얼마나 긴장을 했으면 무더운 여름 날씨를 까마득히 잊고 있었을까.

인도 여행의 첫 번째 경고, 마실 물을 꼭 '사서' 마셔라. 인도여행에선 마실 물을 구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인도의 물은 석회질이 많아 체질이 다른 우리가 마셨을 때 십중팔구 배탈이 난다. 새벽 두시가 넘은 이 늦은 시간에 열려 있는 상점이 있을 리 만무. 다행히 게스트하우스에서 물을 팔고 있었다.

1리터 한 병에 20루피, 물을 사면서 큰아이 인효에게 무사도착을 알리는 메시지를 날리기 위해 와이파이 상태를 알아봤다. 인도 물가를 전혀 모르는 나는 방세는 보통 몇 루피 정도 인지, 물건 값은 얼마며, 또 몇 루피를 깎아야 하는지 첫 날부터 지긋지긋한 루피와의 전쟁을 시작했다. 인도 화폐인 루피는 1루피당 한화로 17원 정도다.

인도에서의 첫날 아침. 새벽 세 시 즈음에 잠들어 눈을 떠보니 새벽 여섯 시였다. 잠 없는 독거노인이 따로 없다. 눈을 뜨자마자 꾸륵꾸륵 비둘기 소리가 창문을 두들겼고 간간히 까악까악 까마귀도 동참했다. 이어서 자동차 소리와 오토바이 소리가 심란하게 들려왔다.

눈을 더 붙이기 위해 다시 누웠지만 수학여행 온 사춘기 촌놈처럼 도무지 잠이 오지 않는다. 7시쯤 되자 진원지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의 말이 끊임없이 귓속으로 파고들어 왔다. 창문을 열어 보니 비좁은 골목길을 청소하는 사람들과 이제 막 상점 문을 연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언어로 두런두런 거리고 있었다. 비로소 인도에 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밖으로 나서기 전 제일 먼저 전대를 챙겼다. 전대엔 현금인출기를 통해 돈을 뽑아 쓸 수 있는 은행 카드와 여권이 들어있다. 둘 중 하나라도 잃어 버리면 큰 낭패를 보게 된다고 한국에서 동생이 챙겨줬다.

이름을 알수 없는 인도 음식을 처음으로 먹어봤다.
 이름을 알수 없는 인도 음식을 처음으로 먹어봤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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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전대를 두르고 다니는 여행자들을 꼴사납게 여겼는데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제일 먼저 전대부터 챙기는 나를 발견했다. 인도 여행을 준비하면서 전대뿐만 아니라 그동안 거부해왔던 것들이 코앞으로 바싹 다가와 내게 받아들이기를 요구했다.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왔는데, 한 푼 두 푼 여행경비를 헤아려야만 했다. 5개월의 장기 여행은 내 주머니 사정으론 버티기가 버거울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돈 떨어지면 연락하라"는 선후배들이 있지만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이겠는가? 인도현지에서 원고를 써야만 그나마 5개월을 버틸 수 있기에 똑딱 카메라부터 렌즈 달린 카메라까지, 거기다 동생이 쓰다 물려준 무거운 쇠 덩어리 노트북을 준비해 왔다.

보험이라고는 자동차 보험과 의료보험, 오래전 동네 이장이 의무사항이라고 해서 별 생각 없이 가입한 국민연금이 전부인데 인도 여행을 준비하면서부턴 생명보험에 눈길이 갔다. 천방지축 인도를 떠돌다가 혹시 모를 불의의 사고가 나면 아이들에게 남길 뭔가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인천공항에서 여행자 보험을 알아봤다. 하지만 6개월짜리 여행자 보험은 없었다. 1개월과 1년짜리가 전부였다. 결국 단순 여행자 비자로 1년짜리 보험료는 너무 비싸 포기했다.

뉴델리와 올드델리, 그 사이에 선 나

평소 (아이들 엄마 말대로) 철이 없던 내가 이제야 세상에 눈을 뜨고 있는 것일까? 여행 준비를 하면서 거부했던 자본의 가치를 일일이 셈하고 있었다. 긍정적인 것인지 부정적이 것인지 모르겠지만 새로운 나로 거듭나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이른 아침부터 카톡이 날아왔다. 인터넷 카페를 통해 알게 된 사람이다. 숙소 앞까지 찾아 온 그의 안내에 따라 배낭 여행자들의 거리, 빠간 메인 바자르로 나섰다. 여행서에 나와 있는 음식점을 찾았다. 한국인의 입맛에 맞을 것이라는 그의 추천에 따라 식사를 했다.

첫 인도 음식이었는데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인도 생활 3개월로 접어들고 있다는 그는 인도에 살게 되면 이것저것 챙겨먹을 음식들이 많아 살이 찐다고 말했다. 전날 그랬듯이 우리에겐 자기가 먹은 음식 값은 자기가 내야 한다는 기준이 있었지만 이날만큼은 그 신조를 깨야 했다. 뉴델리에서 의료기기를 판매하고 있다는 그가 음식 값을 지불했던 것이다.

그는 모바일 구글 지도를 펼쳐 델리를 남북으로 갈라 부유층과 빈민층 지역을 설명하고 지하철 이용 방법까지 상세하게 알려 준다. 하지만 뭐가 뭔지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덧붙여 그는 다른 해외 여행지를 돌다가 마지막으로 오는 곳이 인도라며 첫 해외 여행지를 왜 힘든 인도로 택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 날 오후 또 다른 인터넷 카페 친구를 만났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젊어서 못할 여행이라도 맘껏 누리자며 네팔 트레킹을 준비한다는 진성민(27)씨. 그를 만나니 내가 마치 여행자들을 연결시켜 주는 소개소 직원이 된 기분이 들었다. 카톡이라는 것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일 주일도 채 안 되어 낯선 이국땅에서 젊은 친구들을 연달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550루피짜리 방을 혼자 쓰는 것이 부담스러워 비교적 방값이 저렴한 다른 게스트하우스를 찾아 들어갈까 고민 중이었는데 때마침 400루피짜리 방이 나왔다. 델리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때까지 그 방을 성민씨와 반반씩 부담해 같이 쓰기로 했다.

우리는 휴대폰을 인도 현지에 맞게 쓰기 위해 유심 칩을 600루피를 주고 산 뒤 인도 현지 통신사 것으로 갈아 끼웠다. 하지만 내 휴대폰은 오래된 기종이라 인도 통신사 유심 칩과 맞지 않아 개통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유심 칩을 팔았던 상점에선 돈을 되돌려 주지 않겠다고 했다. 영어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나였기에 신경전 벌이기가 귀찮아 포기했다.(나중에 한국인이 운영하는 델리 여행자 쉼터에서 다른 통신사 것으로 바꿔 끼워 개통했다. 결국 이중으로 돈이 들어간 것이다)

그날 오후, 인천공항부터 함께 왔던 카톡 친구들 중 현정과 지희는 델리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선배를 만나기 위해 떠났고 나와 순이(나는 선머슴아 같은 조탄선을 순이라고 불렀다), 뒤늦게 합류한 성민씨와 함께 빠간 시장을 어슬렁거렸다.

한국에서 누군가가 신다가 버린 다 떨어진, 발에도 맞지 않는 운동화를 폐기처분하고 슬리퍼를 새로 구했다. 순이는 선머슴아같은 성품과는 달리 꽃무늬가 있는 예쁜 슬리퍼를 샀고 나는 가장 저렴한 슬리퍼를 100루피, 120루피 흥정을 해가며 결국 200루피 달라는 것을 150루피에 구입했다. 나중에 순이는 발에 맞지 않아 다른 슬리퍼를 사야 했고 나는 내내 발가락을 짓누르는 슬리퍼 때문에 고생께나 해야 했다.

우리는 북인도 날씨를 감안해 침낭을 구하러 빠간 거리를 싸돌아 다녔다. 나는 시골에서 막 상경한 세상 물정 어두운 할배가 되어 부산 깡순이, 순이 뒤를 쫄쫄 따라 다녔다. 순이는 참 당찬 아이였다. 한국의 아줌마들처럼 물건 깎는 데 거침이 없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가라는 대학은 가지 않고 인도에 가기 위해 밤낮으로 아르바이트를 해가며 인도 여행서를 독파했다는 순이. 순이 덕분에 두 군데의 상점을 오가며 천오백 루피 부르는 침낭을 팔백 루피에 샀다.

다음날 아침 성민씨가 인터넷 카페를 통해 알게 됐다는 연극배우 출신 이준(32, 본명 신성룡)씨와 합류했다. 그는 우리가 있는 게스트하우스 바로 앞에서 묵고 있었는데 하루 방세를 700루피나 줬다고 한다. 그에 비하면 우리는 재수가 좋은 편이었다.

값싼 루피에 충동구매... 다시 가난한 여행자로 돌아기로

중간에 합류한 이준과 진성민, 우리 일행은 여섯으로 늘었다.
 중간에 합류한 이준과 진성민, 우리 일행은 여섯으로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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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 일행은 넷에서 여섯으로 불어났다. 그 날 저녁 인도에서 의료기기 사업을 하는 인터넷 카페 친구의 안내로 뉴델리 부자 동네 구경을 갔다. 나는 이전 일본 여행에서 한국과 다를 바 없는 도심을 둘러본 것을 크게 후회한 기억 때문에 내키진 않았다. 하지만 이제 일행들과 헤어지는 날까진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인도여행의 동료가 되어 있었다. 젊은 친구들이 수염이 허연 아버지 같은 사내를 끼워 주는 것만 해도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이준씨 아버지와 내 나이가 같다고 한다.)

오토릭샤를 타고 우리가 찾아간 뉴델리는 올드 델리와 도로 하나 사이로 극과 극의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다. 오래되고 칙칙한 올드 델리 건물들에 비하면 뉴델리의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코넛 플레이스라는 뉴델리 쇼핑몰 주변을 오가는 인도 사람들의 화사한 옷차림. 마치 화려한 백화점이 즐비한 서울 시내 한복판을 걷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뉴델리 부자동네. 올드델리와 달리 백화점이 즐비한 서울시내 한복판처럼 화려하다.
 뉴델리 부자동네. 올드델리와 달리 백화점이 즐비한 서울시내 한복판처럼 화려하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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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델리 부자동네에서 그 이름을 알수 없는 프랜차이즈 음식. 가난한 동네의 싼 음식이 더 입맛에 맞았다.
 뉴델리 부자동네에서 그 이름을 알수 없는 프랜차이즈 음식. 가난한 동네의 싼 음식이 더 입맛에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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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기기를 판매하고 있다는 그는 인도에서 프랜차이즈를 경험해 보자며 패스트푸드 점 같은 곳으로 안내했다. 한국에서도 햄버거 집을 가본 지가 언제인가 싶을 정도로 까마득한 나로선 무척 낯설었다. 빠간의 시장음식보다 그 양이 훨씬 적을 뿐더러 가격이 두세 배나 비싸다. 거기다 맵고 짜고 느끼한 맛. 한국에서도 질펀한 장터 음식에 입맛 다시던 내 입엔 전혀 맞지 않았다.

인도 적응 이틀째, 동료들과 어울려 다니며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을 둘러 봤다. 인도 최초의 이슬람 왕조가 세운 승전탑, 꾸뜹 미나르와 무굴 제국의 최전성기 때 세워진 레트포트(붉은성). 꾸뜹 미나르는 상상을 초월했다. 웅장한 건물에 새긴 문양들을 바라보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세계문화유산을 둘러보기 위해 돌아다니면서 하루 세끼 꼬박꼬박 챙겨먹고 인도 차, 짜이도 즐겨 마셨다. 발효시킨 우유에 과일을 갈아서 만든 음료수 라씨도 챙겨 마셨다. 그날 저녁은 인도 음식 값보다 턱없이 비싼 한국식당을 찾아 맥주까지 마셨다. 하루 한 두 끼 먹는 것이 고작이었던 내겐 여러모로 부담 가는 일이었다.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꾸뜹미나르.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꾸뜹미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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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레드포트(붉은성).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레드포트(붉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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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장의 부담도 있었지만 어느 순간 돈을 물 쓰듯이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점 돈에 대한 감각이 없어지고 있었다. 한국 돈으로 계산하면 얼마 되지 않는다는 핑계로 카톡 친구들을 졸졸 따라 다니며 맘껏 사먹고 사고 싶은 것들을 사재꼈다. 어느새 소비적 인간으로 변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일행은 여행 공동체이기 전에 함께 이동하고 먹고 마시면서 자기의 입에 들어간 음식 값은 자기가 지불하는 딱 부러지는 소비 공동체였다. 젊은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내가 누구인지 점점 오리무중으로 빠져 들고 있었다. 평소 한국에서 여행을 떠날 때도 값싼 빵 몇 개나 도시락을 챙기던 내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입에 들어가는 대부분의 것은 산이나 바다, 논과 밭에서 해결하고 옷은 물론이고 심지어 운동화까지 누군가로부터 물려 신던 내가 아니었다. 인도에서도 최소한의 비용으로 남루한 거지처럼 떠돌아다니겠다고 작정했던 나. 그런 내가 올드 델리의 가난한 사람들 앞에서 뉴델리의 부자동네 사람들처럼 돈을 써대고 있었다.

하지만 이틀 내내 음식 값, 물건 값 물어보고 흥정하고 먹고 마시면서 얻은 것이 하나 있다. 이것저것 구입하고 하루 세끼 꼬박꼬박 챙겨 먹은 덕분에 인도 음식과 인도 물가를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인천공항에서 동생이 여비에 보태 쓰라고 찔러 준 돈은 미화 200달러. 이 중 얼마를 루피로 환전했는데 그 루피가 사흘 만에 바닥을 보였다. 한국에서 만든 씨티은행 카드로 루피를 뽑았다. 비폭력으로 평생 소박한 삶을 살다간 마하트마 간디의 얼굴이 새겨진 루피가 쏟아져 나왔다. 지폐에 박혀 웃고 있는 마하트마 간디가 "이제 본래 원했던 제 길을 찾아 가야 할 때가 왔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인도 여행 사흘째 되는 날, 홀로 내 갈 길을 나서기로 했다. 정든 일행과 헤어져 꼴카타로 떠나기로 작정한 것. 내 글을 즐겨 읽었다는 얼굴도 모르는 생면부지의 한 여성 독자가 꼴카타의 마더 테레사 '죽음의 집'에서 자원봉사를 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꼴카타는 본래 가고자 했던 목적지였기에 인도여행 사이트를 통해 알게 된 그녀를 겸사겸사 만나 보기로 했다. 꼴카타로 떠나기 위해 기차표를 알아봤다. 하지만 인도 전역에서 매년 봄에 열리는 홀리 축제로 이동인구가 많아 기차표를 구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델리에서 꼼짝없이 발이 묶이게 생겼다.

크게 걱정하진 않았다. 빠간의 복잡하고 혼잡한 거리에서도 다들 제 갈 길을 가고 있지 않은가. 소와 개, 작은 자동차와 오토릭샤에 모터 사이클. 서양인, 동양인 모두가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그 어느 하나, 어느 누구 갈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이나 동물은 없었다. 찻길이 막혔다고 내 갈 길이 없겠는가. 어느 길을 향한다 해도 그 길은 내 길인 것이다.

인도 전역에서 매년 열리는 홀리 축제 때문에 델리에서 발이 묶였다.
 인도 전역에서 매년 열리는 홀리 축제 때문에 델리에서 발이 묶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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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더치페이, #소비공동체, #세계문화유산, #루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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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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