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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25일부터 안산과 진도를 오고 가면서 겪은 이야기입니다.)

외할머니는 외손주가 반가워서 그러셨겠지만 아침 일찍부터 준비하시는 모습을 뵈는 것은 손자인 나로서는 여간 송구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첫차시간에 맞추지 못하면 어쩌나 고민을 했지만 30분 빠른 5시에 일어나면 첫차시간에 늦지 않도록 갈 수 있었다. 그 뒤 시작된 분당에서 안산으로 다니는 일주일의 기간. 그동안에도 안산에서는 많은 일이 있었다.

[부디 잊지 말아주세요①] 진도로 가는 버스, 빗줄기에 모두 울어버렸다

4월 28일 월요일

5시에 일어나 준비하고 버스를 15분쯤에 탔다. 버스는 지도검색에서 나온 예상소요시간의 절반정도인 25분여를 지나 인덕원역에 닿았다. 지하철 어플로 검색해보니 첫차 도착시간은 6시 6분이었다. 빨리 도착했지만 첫차가 올 때까지 어쩔 도리 없이 20여 분을 기다렸다.

첫차는 2분 늦은 6시 8분에 도착했다. 2분. 평소에는 별 거 아닌 시간인데 6시 40분, 늦어도 6시 50분까지는 올림픽기념관으로 향해야 하는 상황이라 조바심이 났다. 열차 안에서 빨리 가는 경로를 계속 검색해보며 고민했다. 한대앞역에서 내려 125번 버스로 갈아타는 것이 가장 좋아보였지만 환승소요시간이 문제였다. 6시 34분이 돼서야 한대앞에 내렸고 거의 100kg에 달하는 몸으로 버스정류장을 향해 열심히 내달렸다. 다행히 버스는 금방 와줬고 고잔초 앞 정류장에서 내려서 시계를 보니 50분이 조금 안 된 시간이었다.

가방이고 우산이고 집에서 출발할 때 복장 그대로 적십자 물품을 챙겨 이미 기다리고 있는 버스로 향해 일을 시작했다. 주말보다는 적었지만 월요일 아침시간인데도 열다섯 분이나 내려가셨다. 4시간 반에서 5시간이 소요된다는데 가시는 길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그리고 안전한 길 되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버스가 떠나는 모습을 배웅했다.

진도로 내려가는 버스 상황을 기록하는 일지. 평일이었음에도 많은 분들이 진도로 향하셨다.
▲ 진도행 버스 일지 진도로 내려가는 버스 상황을 기록하는 일지. 평일이었음에도 많은 분들이 진도로 향하셨다.
ⓒ 서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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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분향소로 향했다. 일요일에 너무 많은 분들이 찾아주셔서 국화꽃은 모두 동이나 버렸고 분향소를 지키는 봉사자 선생님은 헌화 대신이라며 검은 리본을 주셨다. 분향소 안에 들어서니 어제보다 더 사진이 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묵념과 기도를 하고 본격적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자원봉사센터 부스에 가니 어제 사용했던 우비들이 줄에 걸려 있었다. 오늘도 비가 오락가락 할 것 같아 조끼와 더불어 우비도 챙겨 승강장으로 향했다. 버스 승강장을 못 찾는 분이 있을까 싶어 쉬는 시간에도 그 곳을 기웃거리며 주변을 맴돌았다. 주변을 살피다보니 어제와 다른 것이 있었다. 진도 버스 승강장을 알리는 현수막이 길 건너에 붙어있었다. 첫차가 출발한 것으로 봐서는 승강장 위치변경은 없었던 것 같았는데 이상해서 안산시청 상황실에 전화를 넣어보니 변경한 적 없다는 답이 온다.

변경한 건 아니라고 하니 길을 건너 현수막을 떼어오려 했지만 단단히 묶인 줄이 잘 풀어지지 않았다. 현수막을 말아놓는 것으로 조치를 하고 건너왔다. 가뜩이나 주변 추모, 애도 문구를 적어놓은 현수막과 같은 색이어서 승강장 분간이 쉽지는 않았는데 현수막까지 없으니 이용하시는 분들이 헷갈리시겠다 싶은 걱정에 승강장 보이는 곳에서만 머무르기로 했다.

"삐익 삑"

어제보다는 도로가 한산해 소리가 오래 지속되지 않았지만 영구차 소리는 또다시 도로에 울렸다. 아이의 마지막 등교.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 편히 잠들기를 바라는 마음. 묵념으로밖에 표현 못하는 내가 밉고 작게 느껴졌다.

영구차가 사라진 언덕 골목길 쪽으로 밝은 아이보리색의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올라가는 모습이 보인다. 단원고 아이들이다. 기사를 찾아 읽어보니 전 학년 첫 등교의 날이라고 한다. 단원고 앞에 희생된 아이들을 애도하고 실종된 아이들의 생환을 바라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고 해서 가보고는 싶었지만 학교 앞에서 어른들이 울고 있는 모습을 보이면 아이들에게 부담이 될 것 같아 가보지는 못했다.

그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앳된 아이들이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모습에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저 또래 아이들이 그 끔찍한 사고를 겪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무너진다. 내가 이런데 세상의 전부인 아이를 찾아 진도로 내려가시는 분들의 심정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어서 내가 하는 일 정말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이 마음 한가운데 자리 잡는다.

4월 29일 화요일

다행히 오늘도 늦지 않았다. 올림픽 기념관에 도착하고 보니 여기 저기 이전 준비를 하느라 바빴다. 임시분향소는 오늘 0시를 기해서 폐쇄되었고, 오전 10시부터 화랑공원에 마련된 공식 합동분향소로 이전 운영된다고 했다. 그 많던 여러 단체의 천막들은 이미 절반이상 비어 있었고 막바지 천막 철거작업을 하느라 분주했다.

임시분향소가 폐쇄되면서 올림픽기념관 앞마당에 가득했던 천막들도 철거를 준비하고 있다.
▲ 철거를 기다리는 천막들 임시분향소가 폐쇄되면서 올림픽기념관 앞마당에 가득했던 천막들도 철거를 준비하고 있다.
ⓒ 서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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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향소 상황만 바뀐 게 아니었다. 진도행 버스도 하루 10대 운행에서 7대로 축소되었다. 오전 1대, 오후 2대가 줄어든 것이다. 아무 사전 안내도 없었다. 잠들기 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 보게 된 안산시청 교통상황 게시판에서 확인한 내용이었다. 보통 7시와 9시 사이 3대의 버스가 가장 많이 내려가시는 시간대긴 했지만 없어진 10시차를 타실 계획으로 오신 분들이 있다면 어떻게 설명해드려야 되나 싶어 난감했다.

버스가 떠나고 다음 버스를 기다리는 사이 시간에는 천막을 개는 일을 도왔다. 그렇게 하나씩 천막이 접혀 트럭에 실려 사라지자 천막들로 가득했던 올림픽기념관 앞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날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맑고 화창해졌다. 사람도 천막도 그리고 희생된 분들도 모두 화랑공원으로 떠나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 같은 일상의 평온으로 돌아왔다. 정말 그런 거라면 얼마나 좋을까?

버스에 올릴 물품을 지원해주던 적십자가 철수하는 통에 11시 30분차가 떠난 후 비는 시간동안 화랑공원으로 향했다. 점심도 먹고 적십자에서 오후 버스에 올릴 물품을 실어오기로 하고 자원봉사센터 차를 타고 이동하게 된 것이다. 올림픽 기념관을 떠나 차는 좌회전해 언덕 쪽에 접어들었다. 단원고 방향이었다. 아이들이 다녔을 그 길을 지나자 곧이어 정문이 보였다. 우리 곁에 남아준 아이들을 더 힘들게 만들까 싶어 가보지 못했던 그 500여 미터의 거리, 차로 지나가면서 와보게 되었다. 미안하고 또 미안한 마음. 편히 잠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눈을 감았다.

합동분향소는 생각보다 컸다. 사람도 많았다. 챙겨온 짐들을 푸느라 정신없는 각 센터며 점심 때라 분주한 밥 차 부스. 그리고 이전해 온 분향소를 찾은 조문객들까지 평일 낮인데도 사람이 많았다. 매 시간마다 받던 물품을 하루치를 실어다 놓고 보니 상당했다. 그걸 쌓아놓을 곳도 마땅찮고 매시간 그걸 옮기기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일단은 공연장 건물 기둥에 쌓아두고 시간마다 옮기기로 했다. 나야 2시 30분 차 떠나면 분당으로 이동하지만 오후 차 담당하시는 분들 오늘 고생 좀 하시겠다 싶은 양이었다. 진도 내려가시는 분들 챙겨드리는 일도 중요한데 이렇게 다 떠나버리는 것이 맞는 건지 야속한 마음이 든다. 일단은 오늘 치는 짐 옮겨 왔으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보고 내일 걱정은 내일 하기로 했다.

여러 단체 천막이 펼쳐져 있을 때에는 휴식시간마다 천막마다 마련된 의자를 찾아들어가 쉴 수 있었지만, 천막이 사라진 자리에 쉴 곳도 마땅찮았다. 쉴 곳이 없다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버스 승강장 앞에 놓였던 의자마저도 사라져서 버스를 기다리는 분들이 대기할만한 장소가 없어져 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나마 그 곳이 버스승강장임을 알리던 버스 시간표를 변경되었다는 이유로 시에서 회수해 가버렸고 추모현수막과 같은 색의 버스승강장 현수막만 가지고는 그 곳이 진도행 버스를 타는 곳인지 분간하기가 쉽지는 않아 보이게 되었다.

공연장 건물 외벽 기둥 뒤에 물품을 쌓아두고 버스승강장 앞으로 왔다갔다 서성이며 혹시 머뭇거리는 분이 있으면 진도가시는 분인지 여쭤보고 물품은 잘 있는지 살펴보고 공원 벤치에 앉아있기를 반복하며 2시 반 차가 오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버스가 도착하자 짐을 수레에 실어 날랐다. 애초에 쓰던 손수레 대신 약수터 갈 때  많이 쓰는 조그만 금속 손수레를 쓰게 됐는데 공연장에서 버스까지 울퉁불퉁한 길이 많아 전에 쓰던 것보다 이동이 편했다. 다행이지 싶다. 덕분에 실수 없이 갑자기 변화한 환경들로 인해 걱정했던 하루를 실수 없이 마칠 수 있었다.

5월 1일 목요일

아슬아슬하게 도착했다. 30일부터 아침타임을 같이 하고 있는 어머니 봉사자 선생님들이 이미 버스에 올라계셨다. 평일이라 많은 분들이 오실 거라 예상은 못했는데 버스는 이미 만차였다.

지난 주말 이후 만차는 극히 드문 경우여서 늦게 오신 분들께 양해를 구하고 첫차를 출발시켰다. 만차가 되면 오신순서대로 출발 시키는 것이 규칙이니까 그래야겠지 라는 생각만 했다.

그런데 버스가 멀어지고 나서 아차 싶었다. 만차라서 버스를 놓친 분들 중에는 실종학생 아버님이 계셨다. 선착순만 생각했지 탑승 우선순위를 고려해 양보하실 분이랑 바꿔서 먼저 보내드린다는 것을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래본 적이 없었으니까. 선생님들과 나는 어쩌지 고민하다가 그래도 일 맡아본 지 오래된 내가 시청 상황실에 전화를 걸어 사정을 설명하고 차량 증차를 요청했다. 시청에서는 알아보겠다 하고는 버스를 빨리 보내줬다. 안산에 일이 있으셔서 올라왔다가 다시 내려가는 길이라는데 거기에 실수를 했으니 너무나도 죄송스러웠다.

버스가 얼마 안 지나 도착했고 첫차에 못 타신 분들과 추가로 오신 분들께 버스로 안내했다. 유독 짐을 많이 가져오신 분들이 많았는데 그 짐들 가운데 아이가 하루빨리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현수막도 있었다. 준비를 다하고 보니 20분을 조금 넘겼다. 선생님들과 논의 해 그 버스를 8시 30분에 출발시켰다. 멀어지는 버스를 보며 죄송스러운 마음과 또 학생이 어서 빨리 가족들 품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실종학생 가족분들은 간절함을 담은 현수막을 들고 진도로 내려가셨다. (현수막 속 학생은 5월 6일 가족들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 아이가 빨리 돌아오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 실종학생 가족분들은 간절함을 담은 현수막을 들고 진도로 내려가셨다. (현수막 속 학생은 5월 6일 가족들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 서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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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음 시간 차량들은 인원이 적어 30분씩 지연시켜 출발시켰다. 10시차까지만 30분 지연시켜 출발시키면 그 다음 차는 11시 30분차라 정시 출발 시켜도 되겠다는 판단이었는데 예상대로 진행됐다. 순간의 실수로 괜히 버스 1대가 증차해서 여러모로 폐를 끼치는 것은 아닐까 걱정했는데 오전 시간이 조금 지연은 되었지만 증차가 되지는 않아서 천만 다행이었다.

10시 반에 버스를 보내고 한 아버님이 이것저것 질문을 해오셨다. 버스가 하루 몇 대가 내려가는지, 시간대는 어떻게 되는지, 내려가는 사람들이 많은지 등등을 물어오셨다. 답을 다 마치고 이어서 돌아오는 이야기에 나는 온몸에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우리 아들도 이번에 잘못 됐어요. 그래도 다행히 우리 애는 빨리 찾아서 얼굴은 알아봤어."

너무도 담담하게 이것저것 물어보셔서 희생된 학생의 아버님이실 거라는 전혀 생각도 못했었고 시신 수습을 다행이라고 담담하게 말씀하시는 아버님을 앞에서 그저 나는 굳은 침묵을 잇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안산에 있으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 쏟을 때가 많았지만, 아버님 앞에서 내가 눈물을 보일 수는 없었다.

"정말 고마워요. 고생 많네요. 정말 고마워요."

아버님은 몇 번씩이나 고맙다는 말씀을 남기고 가셨다. 아이들의 생환을 바라던 모두의 바람은 '시신을 빨리 수습해서 다행이다'라고 이야기하게 되는 숨 막히는 현실이 되어 돌아온 것만 같다. 시간은 그렇게 원망이 되어 쌓였다.

5월 3일 토요일

버스 안내 봉사를 위해 안산을 찾는 마지막 날. 어머니 자원봉사자 선생님들은 '실종자 전원구조'가 이루어진 후에 안산에 놀러오라고 하셨다. 여기까지만 하게 되어 송구스러운 마음 전하고 작별의 순간의 아쉬움을 나눴다.

단원고에 가보기로 했다. 동네 슈퍼에 들러 이것저것 담은 검은 봉지를 들고 단원고 방향으로 향했다. 아이들이 걸었을 그 길 따라 닿은 단원고 정문 앞 보도에 마련된 천막에는 많은 분들의 마음이 담긴 촛불과 간식들이 놓여 있었다. 나도 봉지에 담긴 간식들을 펼쳐 놓았다. 펼쳐놓고 보니 내가 아이들 나이 때 좋아했던 것들뿐이었다.

'여기까지여서 미안하다.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기도하고 또 기도하는 것으로 8일간 이어졌던 나의 안산행은 끝을 맺었다.

5월 6일 화요일

평일 일정으로 인해 안산에는 더 이상 못 가게 되었지만 계속해서 안산소식을 신문보도로 주의 깊게 살피고 있었다. 그러다 발견한 피해학생 부모님들이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서명운동을 시작하셨다는 소식에 다시 안산으로 향했다.

합동분향소에 도착해 헌화를 하고 밖으로 나오면서 목격한 장면에 정말 기도가 졸려오는 것만 같았다.

"아이 엄마입니다. 진상 규명을 위해 서명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아이를 잃은 슬픔 속에 부모님들은 스스로 서명운동을 진행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였다.
▲ 진상규명을 위해 서명해주세요. 아이를 잃은 슬픔 속에 부모님들은 스스로 서명운동을 진행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였다.
ⓒ 서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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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막힌 장면을 목격하고 얼른 부스로 달려가 서명을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길에 받은 5월 10일 안산 촛불행동 유인물을 읽어보면서 꼭 참석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5월 10일 토요일

유인물에 적힌 시간보다 빨리 합동분향소에 도착했지만 이미 많은 분들이 집회참여를 위해 와 계셨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역시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었다. 가슴에 노란 리본을 메고 각기 다른 교복을 입고 모여 있는 아이들은 어른들을 향해 꾸짖고만 있는 것 같다.

'왜 우리 친구들을 지켜주지 못했나요?' 라고.

5월 10일 안산 촛불행동을 위해 참석한 아이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있다.
▲ 교복을 입고 집회에 참석한 아이들 5월 10일 안산 촛불행동을 위해 참석한 아이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있다.
ⓒ 서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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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티셔츠에 끝까지 함께하겠다는 메시지를 담은 분들은 손에서 손으로 노란 끈을 잡고 합동분향소를 한 바퀴 둘렀다. 인간 노란리본을 이룬 것이다. 시간이 되자 일제히 구호를 외치고 기적의 염원을 담은 노란 풍선을 하늘로 날려 보냈다.

'끝까지 함께할게, 잊지 않을게.'

저 멀리 날아가는 풍선을 보며 외쳤던 약속을 마음에 새겼다.

▲ 5.10안산촛불행동 풍선날리기 '실종자의 조속한 구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과 '끝까지 함께하겠다.'는 약속을 담은 노란풍선이 하늘로 날아가고 있다.
ⓒ 서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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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선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노란 리본은 안산문화공원을 향해 행진을 시작했다. 그 행진 속에는 친구들을 잊지 말아달라는 아이들의 호소도 보인다. 보고 있기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뿐이다.

안산 문화공원에 도착해보니 정말 많은 분들이 모여 계셨다. 자리 잡고 앉아 마련된 순서대로 진행되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 중 아빠의 기도라는 제목의 영상이 나오자 공원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하느님, 부처님, 용왕님 살려주세요. 당신이 누구든 우리 딸 데려가지 마세요. 제발요.'

▲ 아빠의 기도 세상의 전부인 딸을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기도했을 아빠들. 안산문화공원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 서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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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보도로 알려졌던 단원고 아이들의 영상 속에서 마지막까지 '내 동생 어떡하지?'라며 동생 걱정을 하던 故 김동혁 군의 어머니도 참석해 아들에게 남긴 편지를 전해주셨다. 금쪽같은 아들, 딸 잃은 부모님이 바라는 것은 부도 명예도 아니다. 숨기는 것 없는 말 그대로의 진상규명과 아직도 구조를 기다리는 실종자 분들의 전원구조 뿐이었다.

많은 분들의 발언과 준비된 영상 모두 보고 나자 구호를 외치고 중앙역까지 가두행진을 시작했다. 매우 많은 분들이 모여 주셨는데도 행진은 걱정됐던 사고 없이 무사히 마쳤다. 안산 촛불행동에서 놀라웠던 것은 집회 현장에 그 흔한 전경버스 한 대 보이지 않았고, 경광봉을 든 여성 경관 분들의 안내에 따라 평화로운 가두행진이 이어졌다는 점이었다. 당연히 물리적인 충돌도 사고도 없었다.

안산문화공원에서 시작된 가두행진은 중앙역광장까지 평화롭게 진행되었다.
▲ 행진을 시작한 촛불의 물결 안산문화공원에서 시작된 가두행진은 중앙역광장까지 평화롭게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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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머릿속이 복잡했다. '끝까지 함께하겠다'는 약속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집에 가까워질수록 답은 명확해졌다. 다음주말에는 진도로 내려가야겠다.

덧붙이는 글 | 안산에서 있었던 일들을 전하면서 많은 분들이 봐주셨으면 하는 마음이었고 한편으로는 너무 길게 써서 외면당하면 어쩌나 하는 우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그런 걱정들이 우습게 정말 많은 분들이 읽어주셨고 감히 마음이 통했다 싶어 기쁘고 또 슬펐습니다. 부제로 적어놓은 '부디 잊지말아주세요.'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다시한번 호소드립니다. 부디 잊지 말아주세요. 구조를 기다리고 있을 12분이 하루빨리 가족들 품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기도해주세요.



태그:#세월호, #안산, #진도, #촛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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