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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역 광장에 붙어있는 생환 기원 메시지입니다.
 중앙역 광장에 붙어있는 생환 기원 메시지입니다.
ⓒ 서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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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그러다가 만리(萬里)를 넘기겠다. 할 만큼 한 거 같으니까. 이제 엄마 생각도 좀 하지 그래?"

저녁 시간에 맥주를 곁들이며 오고 가는 이야기 속에 엄마는 작심한 듯 진도 이야기를 꺼내셨다.

1만 리. 거리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못했었는데, 책 제목에나 나올 법한 어마어마한 거리를 향해 내가 가고 있는 것일까? 문득 궁금해 일지를 정리해 보았다.

2251km. 단위로 환산하니 5740리가 나왔다. 시간은 93시간이다. 이 짧지 않은 거리를 오고 가며 봉사라고 표현하기 민망하지만, 고등학교 이후 봉사해 본 기억이 없는 나의 봉사시간이 100시간을 향하고 있는데 지금까지도 나오지 못하는 분들이 계시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겁다.

세월호 사고 이후 구조소식을 기다리며 TV를 켜놓고 잠들기를 수일 점점 장기화되는 것에 안타까워 어쩔 줄 몰랐던 나날들.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의 연속. 그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 무엇인가를 두고 고민하다 더 늦기 전에 안산으로 가야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렇게 다녀온 안산. 그리고 다시 향하게 된 진도.

지금부터 써내려가는 내용들은 지난 4월 25일부터 5월 3일까지 자원봉사하며 안산과 진도를 오고 가며 겪은 이야기들이다.

사고 발생 두 달이 지났고, 어느새 개막한 월드컵은 언론매체 메인을 장식하고 있다. 잘 쓰지 못하는 글로 그날의 일들을 이렇게 전하면서 지금도 진도에는 바다만 바라보며 또다시 하루가 지나가는 것에 절망하는 실종자 가족을 생각해 본다. 또 임시 주택도 마다하고 차디찬 체육관 바닥과 팽목항 천막에 기거하고 계시는 실종자 가족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주셨으면 하는 마음이다.

4월 25일 금요일

23일 임시 합동분향소를 찾아 조문을 마친 이후, 많은 생각과 고민들이 마음 속을 어지럽혔다.

'나는 이대로 가만히 있어도 되는 걸까? 정말 그래도 되는 걸까?'

고민하면 할수록 많은 생각들이 걸러지고 또 걸러져 하나의 생각만 남게 되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 뭐라도 해야겠다.'

생각이 정리되자 행동하는 것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일사천리였다. 여기저기 전화해 알아보다가 안산 자원봉사센터를 통해 임시분향소 쪽에서 일손이 필요하다는 내용을 전달받았다.

전화로 면접이 진행되었는데, 담당 선생님은 내가 가능한 시간과 사는 지역, 상황 등을 검토하더니 바로 업무를 배정해주셨다. 외가가 안산이어서 며칠 할머니도 뵙고 지내면서 다니면 어렵지 않을 거라는 계산이었다. 그렇게 안산으로 향하게 되었다.

집인 분당에서 안산으로 향하는 길. 금정역을 지난 이후부터 지상고가를 달리는 4호선 창 밖 풍경을 바라보면서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믿기지 않는 사고 소식이 주는 슬픔과 약한 내 정신 상태로 과연 맡겨진 일을 잘 해낼 수 있을까하는 우려가 복잡하게 뒤섞였다. 일을 해내는 것보다 실수해서 폐를 끼치면 어쩌나 싶은 마음에 걱정이 앞섰다.

임시분향소 앞은 금요일이어서 그런지 23일보다 더 많은 조문객이 보였다. 분향소 앞에 가득한 천막들 사이로 안산시 자원봉사센터 부스를 찾아 나와 통화했던 담당자 선생님을 찾았다. 선생님의 안내로 찾은 길가에는 대기하는 분들이 앉아서 쉴 수 있도록 의자가 놓여있고, 버스 시간표가 놓여 있었다. 이곳에서 안산시가 운행하는 진도행 버스에 오르는 분들을 위해 적십자가 준비한 물품을 실어드리고 안내하는 일을 배정 받았다.

휴가를 내서 2주 가까운 기간 동안 그 일을 해 오셨다는 아버지 뻘의 자원봉사자 선생님은 오전 7시부터 시작되어 밤 9시까지 이어지는 전 시간을 책임져 왔던 터라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면서도 휴가 기간만 일을 맡아보는 것에 미안해하셨다. 그런 선생님의 마음과 걱정이 전해져 오면서 실수 없이 잘 해내야겠다는 사명감이 되어 자리한다. 반드시 잘해야만 한다.

오전 7시부터 오후 9시 막차까지 10대의 버스가 안산시 올림픽 기념관 앞에서 출발하여 진도 실내체육관까지 운행되고 있었다. 매시간 버스가 출발하기 10분 전쯤 경황없이 진도로 내려가는 분들을 위해 적십자에서 준비한 물이며 빵 같은 간식거리를 버스 맨 앞좌석에 올려주는 것이다. 그리고 가면서 꼭 이용하라고 안내하고, 몇 분이 탔는지 집계해서 버스가 출발하면 시청 상황실에 전화하는 일을 했다. 업무 자체는 어려운 것이 없었다. 다만 6시 40분까지 올림픽 기념관 앞으로 갈 수 있을지, 심리적으로 강하지 못한 내가 이 슬픔을 감당할 수 있을지가 내심 걱정이 된다.

사고 발생 이후 안산시청에서는 매일 10대의 버스를 안산 올림픽기념관에서 진도실내체육관까지 운행했다. 지금은 줄었지만 여전히 4대의 버스가 진도로 향하고 있다.
▲ 안산-진도 셔틀버스 시간표 사고 발생 이후 안산시청에서는 매일 10대의 버스를 안산 올림픽기념관에서 진도실내체육관까지 운행했다. 지금은 줄었지만 여전히 4대의 버스가 진도로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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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인계는 버스 2대를 보내는 것으로 마쳤다. 내일부터는 나 혼자 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혼자서 잘할 수 있을까? 걱정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조금만 힘이 들면 도중에 관두고 포기했던 나지만 이번만큼은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보겠다는 다짐을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봉사가 끝나고 오랜만에 외손주가 안산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좋아하셨던 외할머니를 뵈러 외가로 향했다.

4월 26일 토요일

혹시나 늦을까 봐 5시 반 알람 소리에 맞춰 일어나 화장실로 향해 씻고 나갈 준비를 했다. 그 소리를 듣고 일어나신 것인지, 오랜만에 온 외손주가 신경이 쓰인 외할머니는 일어나서 밥 먹고 가라고 성화셨다.

"할머니 거기 가면 다 밥 줘요. 걱정 마시고 아직 이른 시간이니까 더 주무셔요."
"뱃속이 허하면 아무 일도 못 하는 법인데..."

할머니는 몇 번이고 걱정하시고는 베란다까지 나와 손을 흔들어 주셨다. 그런 외할머니 모습을 뒤로하고 올림픽 기념관으로 향했다. 외가인 중앙동 주공아파트에서 안산 올림픽 기념관까지 가는 길은 그리 멀지 않았다. 안산시청 앞을 지나 대략 1km 정도 되지 싶은 그 길은 아침에 걷기도 나쁘지 않은 길이었다.

첫날부터 늦을까 싶어서 걱정을 엄청나게 했는데 다행히 늦지 않았다. 오히려 일찍 도착했다. 메고 간 가방을 아무도 없는 안산시 자원봉사센터 천막 구석에 놓고, 분향소로 향했다. 이른 아침 시간이라 대기 줄 없이 분향소 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국화꽃 한 송이를 집어 모셔진 영정사진 앞에 올리고 묵념을 올렸다. 영정사진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도 눈물이 쏟아져서 차마 고개를 들고 영정사진을 볼 수 없었다. 그저 희생된 분들이 편히 잠들기를 기도하고 실종자분들이 생환하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그렇게 조문을 마치고 분향소 밖으로 나왔다.

7시 첫차. 30분 정도 일찍 도착한 버스에 이미 많은 분이 타 있었다. 늦지 않게 도착은 했지만, 업무를 배정받은 후 처음으로 혼자 해보는 일이라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순식간에 지나갔다.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보다는 혹시나 나의 실수에 누를 끼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매사 성심을 다하는 것에만 신경을 썼던 것 같다.

"진도 가는 버스 담당하는 봉사자입니다. 방금 진도행 버스 첫차 출발했습니다. OO분 타셨습니다."

버스가 출발해 시야에서 사라지고, 시청 상황실에 전화로 보고하는 것으로 첫 번째 소임을 다한 셈이다. 실수 없이 마쳤다는 생각에 자원봉사센터 부스를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찾아갈 수 있었다. 아무도 없던 천막 안에 몇몇 분의 선생님들이 와 계셨다. 그제야 일지에 이름과 주소를 적었다.

담당자 선생님은 그 옆 공란에 시작 시간을 기재해 주었다. 봉사 시간을 바라고 시작한 일은 아니지만, 일하는 도중에 상해를 입거나 무슨 일이 생기면 보험도 적용된다고 하니 적어두는 게 좋을 듯했다.

선생님들은 내 식사를 세심하게 챙겨주셨다. 비단 나만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식사 여부를 묻고 챙겼다.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은 먹는 것에 대한 생각을 지워 주었다. 그것을 아시는지 할아버지 자원봉사자 선생님은 잘 챙겨야 그 힘으로 다른 분들께 뭔가 도움이 될 수 있는 거라고 몇 번이고 식사를 권하셨다.

친할아버지 같은 말씀에 마음이 따스했다. 선생님 권유대로 밥을 챙기러 적십자 밥차로 향했다. 한 번에 많은 양을 소화 시키지 못하는 나는 식판을 들고 줄 서 있는 선생님들 옆으로 보이는 샌드위치를 받아 빈자리로 향했다. 정성스럽게 포장된 샌드위치 위에는 나비 모양의 노란 리본이 붙어 있었다. 나는 스테이플러로 고정된 노란 리본을 조심스럽게 떼어내어 조끼 주머니에 넣었다. 샌드위치는 내가 먹기에 딱 적당한 양이었다. 덕분에 정성이 담긴 음식을 남기지도 않았고 식사시간도 줄일 수 있었다.

샌드위치 위에 붙어있는 노란리본을 버릴 수가 없어 조심스럽게 떼어 내 주머니에 넣어두었다가 가슴에 달았다. 아이들이 살아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 아침식사로 나온 샌드위치 샌드위치 위에 붙어있는 노란리본을 버릴 수가 없어 조심스럽게 떼어 내 주머니에 넣어두었다가 가슴에 달았다. 아이들이 살아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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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정류장 쪽으로 가보니 아직 오전 8시까지 시간이 남았는데도 버스가 와 있었다. 버스 앞에는 단원고등학교 학부모회라고 써진 종이가 붙어 있었다. 단원고등학교 학부모들이 편성한 진도행 버스였다. 기사님께 이야기를 전해 듣고 갑자기 마음이 바빠졌다. 알지 못했던 시간대에 버스가 등장해서 30여 미터 되는 적십자 부스로 뛰어가 물건을 배정받아 손수레에 물건을 실어 날랐다. 발견 못했으면 그냥 내려갔을 텐데 발견해서 다행이지 싶었다. 얼마 안 지나 오전 7시 30분이 되자 대부분 실종 학생의 가족들이었을, 많은 분들이 오른 버스가 진도로 향했다.

오전 8시 차로 많은 분들이 내려가셨다. 마찬가지로 상황실에 보고하는 것으로 일을 마쳤다. 일을 마치고 적십자 부스를 지나다가 나는 울컥해 눈물을 쏟고 말았다. 아침 식사로 나온 샌드위치에 붙어 있었던 노란 리본이 올림픽기념관 조형물 앞에 정성스럽게 붙어 있었다.

노란 나비가 하늘 위로 나풀거리며 날아가듯 실종자분들의 생환을 기원하는 모든 사람의 마음이 붙어 있었다. 거기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같은 마음이었나 보다. 이토록 간절한 우리 모두의 바람이 제발 이루어지기를 무리 지어 날아가듯 붙어있는 노란 리본들을 바라보며 기도했다.

아침식사로 나온 샌드위치에 붙어있던 노란리본이 모여 무리지어 날아가 듯 붙어있다. 자원봉사자 선생님들 모두 같은 마음이었다.
▲ 모두 같은 마음으로 아침식사로 나온 샌드위치에 붙어있던 노란리본이 모여 무리지어 날아가 듯 붙어있다. 자원봉사자 선생님들 모두 같은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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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회에서 마련한 4대의 차량이 30분대에 추가되어 오전 시간대가 분주해졌다. 거기에 토요일을 맞이해 많은 분이 조문을 와 주신 덕분에 올림픽 기념관 앞 보도는 사람으로 가득했다. 보도뿐만이 아니었다.

왕복 4차선의 도로는 평소보다 늘어난 차들에다가 차선 하나를 버스가 대기하며 차지하고 있자 병목 현상에 긴 정체 구간이 생겨 봉사자 선생님들과 경찰 아저씨들이 경광봉을 들고 손을 저어 교통정리를 해야만 했다.

다행스럽게도 토요일이라 많은 봉사자 선생님들이 찾아주셔서 버스 정류장을 지키는 일은 다른 선생님이 맡아보시고 나는 조문대기 줄 사이사이 있는 도로에 가서 교통정리 하는 일을 맡아보면서 버스 시간대에만 물건을 나르러 오는 식으로 일을 했다.

4대의 버스가 늘어나 총 14대가 편성되었는데도 매시간대마다 정말 많은 분들이 진도로 내려가셨다.

가족 친지 분들도 많이 가셨지만, 자원봉사를 위해 내려가신 분들도 많았다. 내가 내려가지 못하고 이곳에 있는 게 너무도 송구스럽고 죄스러운 마음에 오랜 시간 가시는 동안 불편 없도록 하나라도 더 챙겨드리고 싶은 마음으로 임했다.

그렇게 한 대 두 대 버스가 가고 2시 30분 차가 출발했다. 막차까지 내가 전담하고 싶었지만 오래 전부터 잡아두었던 약속으로 2시 30분차까지만 내가 맡아보기로 했다. 다른 봉사자 선생님과 교대하는 것을 끝으로 실수하면 어쩌나 싶은 걱정이 가득했던 첫날을 무사히 마쳤다. 내가 맡아보기로 한 마지막 날까지 실수 없이 아주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어 드릴 수 있기를 재차 다짐하며 약속 장소로 향했다.

4월 27일 일요일

비가 내린다. 안산에만 내렸으면 하는 비는 야속하게도 진도에도 내린다고 한다. 외할머니는 오늘도 새벽부터 일어나셔서는 외손주 밥을 그리고 우산을 걱정해 주셨다. 특이한 문양의 우산을 주시면서 "그래도 제일 좋은 놈으로다가 준다"라는 말씀을 세 번 넘게 하셨다.

올림픽기념관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겁다. 구조 수색작업이 한참이어야 할 이 중요한 시기에 도무지 야속한 하늘은 도와주지를 않는다. 길이 눈에 익어 어제보다 더 빨리 올림픽기념관에 도착했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 헌화와 기도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분향소로 향했다. 새벽시간이라 역시 조문 오신 분들도 적었고 기자들의 셔터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분향소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쏟아지는 눈물에 제대로 사진 속 아이들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는데, 어제보다 사진이 늘어 있는 게 둔한 내가 보기에도 느껴졌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거기에 비까지 뿌려대는 매몰찬 하늘을 원망하고 또 원망했다.

버스승강장으로 향했다. 버스가 미리 와서 대기하고 있었다. 비가 내리는 통에 기사님은 차안에 계셨다. 아직 봉사센터 부스에 아무도 안 계셔서 일지를 받지 못했다. 우선 임시방편으로 핸드폰 메모장에 기사님 성함과 번호 그리고 차량번호와 버스회사명을 받아 적고 적십자로 향했다.

아침 배식 준비에 적십자 분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는 통에 수레에 짐만 옮겨 받아 직접 끌고 와야 했다. 우산을 들고 수레를 끄는 게 쉽지는 않았다. 비가 오지 않는 날이면 바퀴가 구르는 소리가 제법 크게 들렸는데 빗물이 우산을 때리는 소리에 가려 수레 소리가 그닥 크지 않았다.

원망스럽게도 하늘이 비를 뿌리는 날. 진도로 향하는 버스가 승강장에서 가실 분들을 기다리고 있다.
▲ 진도로 향하는 버스 원망스럽게도 하늘이 비를 뿌리는 날. 진도로 향하는 버스가 승강장에서 가실 분들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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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을 들고 버스에 오르자 많은 분들이 버스 안에 타 계셨다. 얼른 짐을 다 싣고 안내해 드려야 겠다 싶어 마음이 급해졌다. 생수 두 박스, 팩 음료수 2박스, 초코파이 등이 담긴 상자를 앞좌석 발밑에 쌓았다.

"여기 맨 앞좌석 보시면 물이랑 간식 같은 거 있으니까 가시는 동안 꼭 이용하세요."
"저기…. 물 좀 주실래요?"

안내를 마치기 무섭게 맨 뒷좌석에서 울린 소리였다. 아직 버스 출발 시간도 남았고 물이라도 나눠드리는 게 낫겠다 싶어 박스를 하나 뜯어 하나씩 나눠드렸다.

내가 이동하는 모습에 손을 내밀어 물을 받는 분들도 있었지만, 빗물이 번진 창밖을 바라만 보고 있는 분들이 더 많았다.

"우리 OO 어떡하라고. 비가 오면 어떡하라고. 비가 이렇게 오면 어떻게 해."

갑자기 한 어머니가 소리를 내어 우셨다. 어머님들도 아버님들도 그리고 나도. 버스 안은 그렇게 울음바다가 되어 버렸다. 기적을 바라고 있는 사람들에게 비는 그렇게 깊은 절망이 되어 심장을 찔렀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는 사실이 이리도 죄스러울 수가 있을까?

첫차가 떠난 후 자원봉사센터 천막에 가자 다른 선생님들이 와 계셨다. 그제야 일지에 내 이름을 기재하고 시작시간을 넣었다. 등록을 마치고서야 조끼도 입고 우비도 배정받았다. 우비를 입으니 한결 움직이기 수월해졌다. 일요일이라 아침부터 많은 분들의 조문행렬이 이어졌다. 어느새 줄은 버스정류장을 넘어 길게 이어졌다.

'삐익 삑삑'

사이렌이 울리려다 말기라도 하는 것 같은 괴상한 소리가 도롯가에서 울린다. 그쪽을 향해 자연스레 눈길이 갔다. 시선의 중심에 검은색 운구 차량이 자리한다. 그전에는 알지 못했던 영구차의 울음소리는 희생된 아이의 마지막 등굣길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편히 잠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묵념하는 것이 전부였다.

오전 9시를 넘기자 어제와 마찬가지로 많은 봉사자 선생님들이 와주셔서 나는 버스 안내 대신 조문 행렬 정리하는 일을 맡아보기로 했다. 고잔초를 넘어서도 줄이 이어지자 학교 운동장에 대기 줄을 만들고 4세 미만 영유아 동반한 부모님들을 대기 없이 분향소 앞으로 가시라는 안내를 해드리는 일을 맡아 봤다.

조문객분이 많은 질문을 주셨는데 주로 "화장실 어디 있느냐?"였고, 이는 답을 하기가 어렵지 않았지만 "여기 줄 서면 얼마나 걸려요?"라는 질문은 정말 답하기 어려웠다. 그때그때 다르기도 하거니와 실제로 그 긴 줄 뒤로 서 본 일이 없기 때문에, 놀이공원 같은 곳에 붙어있는 '여기서부터 몇 분이 소요' 이런 식의 답을 드리기도 애매했다.

여러 선생님들과 나름 고심 끝에 '고잔초 운동장을 다 통과하고 약 한 시간 정도 걸린다'라는 답을 하기로 했다. 그럼에도 빗속의 조문행렬은 고잔초 운동장을 가득 채우고도 한참 더 밑으로, 밑으로 이어졌다. 비 내리는 날이라 많이 안 찾아 주실 거라 생각했는데, 비도 그 분들의 마음을 막지는 못했다.

비가 와서 많은 분들이 오시지 않을 거라는 내 생각은 틀렸다. 비도 이 분들의 마음을 막지는 못했다.
▲ 빗속의 조문행렬 비가 와서 많은 분들이 오시지 않을 거라는 내 생각은 틀렸다. 비도 이 분들의 마음을 막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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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시를 넘을 무렵 집에서 연락이 왔다. 오랜만에 할머니 모시고 저녁 같이 하자며 집으로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분당에 갔다가 다시 외가에 오기는 시간이 애매하고 오늘은 분당에서 자야지 싶었다. 그렇게 오후 2시 30분차가 출발하는 모습을 보고 분당으로 향했다.

덧붙이는 글 | 진도 현지에 매일 상주하고 계시는 자원봉사자 선생님들도 계시는데, 제가 이 글을 남길 자격이 있는지 고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방송3사와 종편 케이블을 가리지 않고 월드컵 분위기를 띄우려는 모습들을 보면서 벌써 4월 16일 그날의 아픔이 흐려지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픕니다. 제가 경험했던 일들을 이렇게 옮겨보는 것이 세월호 사고가 그 이전에 있었던 끔찍한 사고들처럼 아무 변화 없이 잊혀지지 않도록 하는 데에 아주 미약하게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 적어봅니다. 지금도 애타게 구조를 기다리고 있을 실종자 분들 전원 가족들 품으로 돌아오시길 간절한 마음으로 기원합니다. 또한 희생된 분들이 편히 잠드시기를 기도합니다.



태그:#세월호, #안산, #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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