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흔하게 들을 수 있는 단어이지만 정작 실제로 찾기는 가장 어려운 것. 때문인지 어느 설문조사에서는 나이와 성별, 계층을 불문하고 '사랑'이 '성적'과 '취업', '노후 준비' 등의 사안을 제치고 가장 많은 사람들의 고민인 것으로 나타났다. 나를 위해 계산없이 마음을 열고 아껴줄 사람, 그 한 사람을 찾기가 그리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오랜 시간 동안, '멜로' 영화가 인기를 끌고 많은 사람들이 찾는 장르가 된 것이기도 하다. 그만큼 '사랑'을 주제로 한 영화가 식상해진 면도 있다. 긴 세월 동안 관객의 심금을 울린 영화에서 나온 소재들은 비슷한 것들이 많았고, 크게 다르지 않은 줄거리가 당대의 유명배우로 캐스팅만 바뀌면서 반복되는 경향도 있다. 그런 것과 대조적으로, 최근 새로운 방식으로 '사랑'을 말하는 영화가 있다. 바로 지난 5월 22일 한국에서 개봉한 영화 <그녀(Her)>이다.

삭막한 현대인의 삶, 인공지능 운영체제를 만나다

 영화 <그녀(Her)>의 한 장면. 주인공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는 삭막해지는 도심에서 외롭게 살아가는 처지에서 인공지능 운영체제인 '그녀'를 만난다.

영화 <그녀(Her)>의 한 장면. 주인공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는 삭막해지는 도심에서 외롭게 살아가는 처지에서 인공지능 운영체제인 '그녀'를 만난다. ⓒ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현재로부터 멀지 않은 미래를 배경으로 한 영화 <그녀>의 주인공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는 손편지 대필작가이다.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대신 작성하여 전해주는 직업인 그는, 정작 자신의 아내와는 별거 중이다. 삶과 직업의 상태가 아이러니하게 이어지는 상황은 그를 지치고 외롭게 한다. 환경오염이 심해진 듯한 회색빛 하늘 아래, 삭막한 도심에서 그는 고독하게 살아간다.

영화 속의 세계는 세련된 기술이 보급되었고, 그것과는 별개로 사람들은 더 고립된 느낌이다. 건물들은 더 높아졌지만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자존감은 낮다. 주인공 테오도르도 예외는 아니다. 아내와의 결혼생활이 끝나고 허탈한 마음으로 하루를 살아가는 그는 오직 일을 하는 순간에만 열정을 발휘할 뿐이다.

온라인 채팅과 전화는 귀에 꽂는 무선이어폰 모양의 전화기로 더욱 쉽게 가능해졌다. 외로움을 딛고자 테오도르는 그런 도구들로 새로운 만남을 시도하지만 타인과의 벽을 느끼는 결과로 그친다. 그를 떠나간 아내에 대한 그리움은 공허하게 맴돌면서 그를 괴롭힌다.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하는 물음에 대한 답은 끝내 좌절로 마침표를 찍게 되는 것일까.

그러던 어느날, 테오도르는 우연히 '인공지능 운영체제'를 구입하게 된다. 자신에게 상처주지 않으면서 그를 알아줄 존재라는 광고에 마음이 움직인 테오도르는 컴퓨터에 설치한 운영체제를 여성으로 설정한다. 인공지능에게 이름을 묻자, 그녀는 순식간에 수십만 개의 이름을 검색하여 그 중 이름을 '사만다(스칼렛 요한슨)'로 정한다. 그리하여 둘의 관계는 다소 색다르게 시작된다.

디지털 감성으로 그려낸 아날로그 사랑

 영화 <그녀(Her)>의 한 장면. 주인공 테오도르는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다가 자신을 진정 알아주는 존재인 인공지능 '그녀'를 만나게 된다.

영화 <그녀(Her)>의 한 장면. 주인공 테오도르는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다가 자신을 진정 알아주는 존재인 인공지능 '그녀'를 만나게 된다. ⓒ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인공지능인 사만다와 테오도르의 관계는 친구에 가까운 비서에서부터 출발한다. 사만다는 테오도르의 이메일을 읽어주며, 일정을 관리해주고, 작성된 문서의 교정을 돕는다. 유용한 운영체제인 사만다는 새로운 정보와 경험을 습득하며 스스로 더욱 성장한다. 점차 발전하는 그녀는 단순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한 차원 높은 존재로 발돋움하며, 이에 따라 테오도르와의 관계도 달라진다.

외로움에 괴로워하던 테오도르의 말동무가 되어주고, 그를 돕던 사만다는 점차 테오도르와 가까워진다. 테오도르 역시 사만다에게 마음을 열고 자신의 모든 것을 털어놓으면서 그녀에게 호감을 느낀다. 심지어 소개팅에 나간 그는 매력적인 여성보다 인공지능 운영체제인 사만다에게 더 끌린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영화는 한 남자의 마음이 움직이는 과정을 차근차근 설득력 있게 표현해낸다.

사만다와 테오도르가 서로 사랑에 빠진 과정과 그 이후의 이야기를 소재로, 이 영화는 디지털의 감성으로 아날로그 사랑을 그려낸다. 그와 그녀는 서로를 카메라로 보고 무선이어폰 전화기로 듣고 말한다.

디지털 기기는 도구일 뿐, 어느 무엇보다 진실한 감정은 아무런 여과없이 서로를 관통한다. 다소 의아하게 보일 수 있는 인간과 기계의 사랑은 다양한 색채로 그려진 장면과 상황들을 통해 찡할 정도로 관객의 마음을 울린다.

그와 그녀가 서로에 대한 계산을 허물고 진심을 모두 보일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한 쪽이 육체를 갖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이유가 무엇이건 둘은 서로를 진정 사랑했다. 처음엔 그저 서로가 각자를 '욕구를 채우기 위한' 혹은 '프로그래밍'된 존재로 생각했지만 편견과 이기주의라는 벽이 무너지자 아름다운 사랑이 싹을 틔운다. 그런데 이들의 만남은, 과연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

그리하여, 우리는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영화 <그녀(Her)>의 포스터.

영화 <그녀(Her)>의 포스터. ⓒ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영화 <그녀>는 사실 멜로영화라기보다 SF영화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인공지능 운영체제와 미래를 배경으로 한 사회, 그리고 그를 통해 담아낸 인간과 세계에 대한 통찰. 이는 SF영화가 전형적으로 사용하는 소재이면서 동시에 표현하려는 바이기도 하다.

새로운 기술들이 선보이는 영화 속 장면들은 다소 신기하지만 많이 어색하지 않다. 현실과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질 않기 때문이다. 영화 속의 스마트폰과 음성인식 프로그램 등은 현재 우리 일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자동차'보다 이러한 모습들이 실제 현실에서 보이는 '기술의 발전'에 가깝지 않은가. 이런 점에서 <그녀>는 '현실적인 SF영화'로 볼 수 있겠다.

눈에 띄는 화려한 볼거리보다는 굵직한 줄거리와 명대사가 영화가 끝난 뒤에도 한참 마음을 울린다. 잔인한 인간보다 더욱 인간적인 로봇의 모습에서 '인간성'에 대한 고찰을 담았던 <블레이드 러너>가 그랬듯이, 인간과 인공지능 프로그램의 사랑으로 <그녀>는 '사랑'에 대해 돌아보게 한다. 우리가 형식에 매달리느라 놓치곤 하는 '진심으로 누군가를 아끼는 마음' 말이다.

'썸' 타고 '밀당'하느라 서로에 대한 간격유지에 집착하고, 주고받은 마음의 손익분기점을 따지면서 피곤하게 연애하는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 그런 것을 최선의 사랑이라 믿었던 사람들에게도, 인공지능 운영체제와 한 남자의 이야기는 묵직하게 와닿을 것 같다.

사랑은 갈수록 어렵고, 가벼운 이별은 흔한 세상에서 그들은 치장되지 않은 진심을 주고받았다. 그래서인지 서로의 삶을 공유하고, 상대를 이해하는 것에 대한 그들의 대화와 독백은 날카로운 통찰로 가득하다.

스스로를, 타인을, 관계를, 삶과 세계를 돌아보게 만드는 이 영화를 본 당신이라면, 사랑하는 법을 배운 것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사람 찾기'보다 '진정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나를 찾는 일'이 우선되어야 함을 깨달으며, 그제서야 타인이 아닌 자신의 마음을 담은 편지를 써낸 테오도르와 더불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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