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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마 내키지 않는 일이겠지만, 세월호 참사를 처음부터 다시 떠올려보자. 300여 명이 거대한 선박 안에 갇힌 상태로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 장면을 전 국민이 그저 바라봐야만 했다. 사고 직후의 '전원구조' 오보 이후로 희망은 점차 내리막길을 탔다. 그리고 세월호가 그랬듯이, '살아서 돌아오리라' 믿었던 기대는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지 못했다. 검은 바다는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지켜보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던 사람들에게, 세월호 사건은 처음부터 황당함과 절망으로 채워졌다. 화물을 더 채우느라 평형수를 빼놓은 선박회사, 승객들의 탈출을 돕지 않고 도망친 선장과 선원, 승객 구조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해경, 규제완화로 사태를 초래한 정부까지. 한 곳만을 비판하기엔 너무나도 다양하게, 총체적인 분야에서 문제가 드러났다.

사고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에는 막말이 쓰나미처럼 몰아쳤다. 어느 인터넷 커뮤니티는 유가족을 '유족충'이라 부르며 비하했고, 정치인의 가족은 '미개하다'는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정부는 '순수유가족'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으며, 어느 방송국 간부는 희생자 수를 교통사고 사망자 수와 비교하는 안일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대재난 보고서 <이 폐허를 응시하라>

<이 폐허를 응시하라>의 표지.
 <이 폐허를 응시하라>의 표지.
ⓒ 펜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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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을 망연자실하게 만든 세월호 참사는 사고의 처음부터 현재까지의 진행 상황이 모두 끔찍한 요소들로 가득하다. 그 가운데서도 유일하다고 할 만큼 훈훈한 모습은, 꿋꿋하게 슬픔을 견디면서 서로를 위로하는 유가족들간의 정(情)이었다. 같은 아픔을 나누는 사람들이기에 가능한 것이었을 수도 있고, 인간이라면 보편적으로 가진 공감능력이 이끌어낸 감정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세월호 침몰사고와 같은 대형참사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이를 위해서는 다른 사고와 비교하는 방법도 필요할 것 같다. 그리고 가장 적절한 저서가 있다. 지난 2012년에 발간된 <이 폐허를 응시하라>가 그것이다. 레베카 솔닛이 미국과 세계에서 벌어진 사고들을 다양한 시각에서 분석하고 정리한 이 책은 한 편의 '대재난 보고서'라 부를 만하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에서 85년 멕시코 지진, 2001년에 무역센터 빌딩을 붕괴시킨 9·11테러와 2005년 뉴올리언스를 휩쓸었던 태풍 카트리나까지. 수백 명에서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사고들을 통해서 저자는 공통점과 차이점을 분석한다. 그리고 그가 주목하는 점은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부상자와 사망자를 단순히 숫자로 열거하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는다.

108년 전에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대지진으로 도시 전체가 붕괴된 상황에서도 시민들이 침착했다는 증언과 기록을 첨부한다. 약탈과 방화가 일어나리라던 우려와 달리 시민들은 서로 도우며 정을 나누었고, 일상의 무게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계층과 인종을 넘어서 서로 음식과 잘 곳을 스스로 공유했다는 것이다.

반대로 치안을 위해 투입된 군대는 도시가 불타는 것을 방관하고, 자경단이 설치는 것을 내버려 두었으며 심지어 무고한 시민을 강도로 몰아붙여 사살하기도 했다고 덧붙인다. 이렇게 상반된 두가지 모습은 '재난에 대한 통념'을 뒤엎는 것이다. 많은 재난영화가 그려내는 장면들과도 정반대의 상황이다. 영화 속에서 우왕좌왕하던 군중이 현실에서는 오히려 침착하게 상황을 극복하고, 사태를 수습해야 할 정부와 공권력은 당황하여 큰 실수를 저지르는 꼴 말이다.

재난에서 엿보이는 '엘리트 패닉'

"재난은 사회적 요구를 증폭시키고 새로운 집단에 힘을 부여하는 한편, 경제를 와해시키고 정부조직을 파괴하고 정부의 조직적·행정적·도덕적 결함을 노출시킴으로써 정치제도에 부담을 준다. (중략) 이는 엘리트들이 왜 엘리트 패닉에 빠지는지를 또 다른 관점에서 설명해준다. 엘리트들은 가장 자신없는 부분에서 가장 큰 시험을 겪는다. 그리고 갑자기 자신의 천명과 정당성과 권력에 의문이 제기된다." (본문 231쪽 중에서)

본문에서 엘리트 집단으로 대표되는 정부와 관료조직은, 대부분이 발생한 재난 앞에서 위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스스로 혼란 속에 빠져든다. 저자는 이런 상태를 '엘리트 패닉'이라 칭한다. 사고의 파악과 수습을 하기에 역부족인 모습을 보이다가 끝내 정당성마저 의심받는 일은 본문에 인용된 역사에서 다양하게 찾아볼 수 있다.

1755년 리스본 지진은 포르투갈 왕인 호세 1세가 왕궁에서 도시 밖 천막으로 옮겨가면서 권력을 잃게 만들었다. 본문에서는 이 재난을 "권위와 종교를 멀리하고 개인적 이성을 추구하는 유럽 계몽주의와 회의론의 출발점 가운데 하나"라고 평가하고 있다. 1985년 멕시코 지진이 발생했을 때는 순식간에 수많은 건물들이 붕괴되며 사람들이 매몰되었고, 이에 국민들이 부실공사와 부패 정권의 무능력을 비난했다고 한다.

그보다 13년 전에 발생한 마나과 지진은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독재자 아나스타시오 소모사는 이를 기회로 개발을 용이하게 하고자 계엄령을 선포했다. 야간통행 금지와 언론 검열이 벌어지자 결국 견디지 못한 국민들이 독재정권을 상대로 혁명을 일으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구소련 시절 발생한 체르노빌 참사도 "소련 관료들의 만성적인 은폐적 태도와 전반적인 무책임과 무능함, 냉담한 통치가 (수백만 명이 위험에 빠질 정도로 사태를 키운) 한 원인이었다"라고 지적한다. 9·11테러는 부시 정부에 의해 지나친 국가주의와 애국심 고취의 수단으로 악용되기도 했다.

요약하자면, 본문에서 말하는 바는 '대중은 사고가 일어나면 인간애를 발휘하여 서로 단합하는 반면, 정부는 엘리트 패닉을 보인다'는 것이다. 시민들이 재난에 맞서 새롭게 공동체를 형성하고 이타주의를 발휘할 때, 정부는 스스로의 권위를 지키고자 때로 시민을 적으로 간주하기도 하고, 무능을 숨기려고 거짓을 말하기도 한다는 이야기다. 실로 충격적인 증언들이다.

모든 재난은 사회적 재난

세월호 참사로 우리는 시스템의 붕괴를 목격했다. '사회가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는 가장 기초적인 신뢰가 무너졌으며, 무능한 정부와 특종경쟁에 오보를 일삼는 언론의 맨얼굴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믿어왔던 것들이 산산조각나면서 이제 우리는 전과 같은 상태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굳건하게 서있던 두 빌딩이 먼지가 되어버린 9·11 사태를 겪은 미국 시민들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모든 재난은 어느 정도 사회적 재난이다. 굳건하고 단합된 사회라고 해서 재난을 모두 예방할 수는 없지만, 재난 대책을 계획하고 대비하고 취약한 사람들을 보호하거나 그들을 덜 취약하게 만들고 대응과 복구가 효과를 발휘하도록 만들 수는 있다." (본문 396쪽 중에서)

불행하게도 사고는 언제든지 일어나기 마련이다. 우리가 원하지 않고, 일어나지 않게끔 최선의 준비를 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로 말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사고가 일어난 뒤에 이어지는 우리의 행동과 태도일 것이다.

세월호 참사와 같은 일이 또 다시 벌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사고로 희생된 사람들을 진심으로 애도하고, 같은 사고가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며, 잊지 않고 살아가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사회안전망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상황을 바탕으로 했을 때 가능한 일이다.

이 폐허를 응시하라. 비록 눈을 질끈 감고 시선을 돌리고 싶을지라도, 마음 편히 잊어버리고 싶을지라도 두 눈을 뜨라. 시스템의 부재와 감정의 밑바닥이 고스란히 드러나 폐허가 된 한국 사회를, 세월호가 가라앉은 그 바다를 응시하라. 필요한 것은 비판세력 진압과 해체가 아니라, 무너진 시스템을 재건하고 그 위에 다시 신뢰를 쌓는 일이다. 권위 뿐만 아니라 책임이 필요한, 공동체를 위한 이 작업을 박근혜 정부가 앞장서서 해야 마땅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폐허를 응시하라> (레베카 솔닛 씀 | 정해영 옮김 | 펜타그램 | 2012.09. | 2만원)



이 폐허를 응시하라 - 대재난 속에서 피어나는 혁명적 공동체에 대한 정치사회적 탐사

레베카 솔닛 지음, 정해영 옮김, 펜타그램(2012)


태그:#이 폐허를 응시하라, #재난, #세월호, #엘리트 패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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