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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어머니 김봉준 작. 이소선 여사 추모그림
▲ 위대한 어머니 김봉준 작. 이소선 여사 추모그림
ⓒ 김봉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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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 이소선의 남편은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헌 모자를 수집해서 그것으로 옷을 만들어서 파는 일을 했다. 그 덕분에 돈을 상당히 벌어서 비교적 넉넉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밥 걱정 안하고 살아 갈 만하니까 재속에 숨어 있던 불행의 불꽃이 또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장마철 폭우에 창고 지붕이 뚫려 창고에 쌓아둔 물건이 한꺼번에 못쓰게 되어 하루아침에 집안이 폭삭 망해 버린 것이다. 성한 물건들을 정리하여 보자기를 만드는 공장을 시작해 보았으나 이것도 잘 되지 않았다.

보자기 공장마저 주저앉아 버리자 얼마 남아있지 않던 재산도 완전히 탕진해 버렸다. 그야말로 알거지가 되었다. 부산에서는 옴짝달싹을 할 수가 없는 형편이 되어 버렸다. 이들은 누구한테 의지할 수도 없고 맨몸뚱이 그대로였다. 부산에는 더 이상 눌러 있을 수가 없었다. 무작정 서울로 올라가기로 작정했다.

이소선의 가족은 막상 서울에 도착했으나 몸뚱이 하나 비빌 언덕이 없었다. 아는 사람도 마땅히 없었지만 설사 있다 하더라도 신세지고 싶지는 않았다. 거리를 헤매다가 집 없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그런 곳에 가야 마음이라도 편할 것 같았다.
그런 곳이 염천교 근방이었다.

어느 집 대문 앞에서 이소선과 태일이, 태삼이 그리고 아기까지 넷이서 잠을 잤다. 겨우겨우 생명을 이어기는 삶이었다. 사람으로서 온전히 살아 있는 생명이라고 볼 수가 없었다.

이소선의 남편은 직장이라도 얻어야 한다고 여기저기 서울바닥을 돌아다녔으나 어디 쉽게 취직을 할 수 있겠는가. 부산에서처럼 이따끔 다녀가긴 했으나 변변한 생활대책을 세우지는 못했다.

눈이 노래지도록 고등어 배를 따야 했던 그녀

바보처럼 앉아서 굶고 있자니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다. 이소선은 아이들하고 이대로 굶어죽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아이들은 살려야 한다.'

이소선은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무슨 일이든지 하기로 마음먹었다. 식당 같은 곳에 가서 일하겠다고 하면, 아기 업은 사람은 쓰지 않겠다며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이소선은 별 수 없이 다른 사람의 절반만 돈을 줘도 좋으니 써달라고 애원했다. 다행히 어느집 주인은 그런 이소선을 한참이나 뚫어져라 쳐다 보더니 몹시 안됐다는 표정으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 거렸다.

이소선은 이틀 굶은 배를 움켜쥐고 일에 매달렸다. 갓난이 순옥이를 업고 거의 상해 가는 고등어의 배를 땄다. 그 일을 눈이 노래지도록 하고 나서 품삯을 받았다. 이소선은 돈을 받는 즉시 시장으로 달려가 시래기를 샀다. 가장 손쉽게 먹을 수 있는 것이 시래기죽이었다.

그날따라 하늘에서는 비가 야속하게 내리고 있었다. 떨어지는 비가 원수 같았지만 먹고 살아야지 어쩔 도리가 있겠는가. 솥을 걸어야 시래기죽을 끓일 수 있을 텐데 비가 내리고 있으니 답답한 노릇이었다. 두 눈 질끈 감고 남의 집 처마 밑에 솥을 걸었다.

처마 밑이라 하더라도 쏟아지는 비를 피할 수는 없었다. 오들오들 떨고 있는 아이들 셋을 대문 앞에 앉혀놓은 다음 엄마는 불을 지폈다. 빗방울이 등짝이며 가슴께로 흘러 들어왔다. 빗방울은 더욱 거세지는가 싶더니 솥에까지 쏟아지는 것이었다. 시래기죽을 끓여야 할 판인데 물이 넘쳐 흘렀다.

"아주머니,그러지 마시고 비가 그치면 하지요."

대문이 열리더니 주인집의 아들이 나왔다.

"어린것들이 배가 고파 울지도 못하고 있으니 언제 비가 그치기를 기다릴 수가 있겠어요."

이소선은 몸으로 비를 막아가며 시래기죽을 끓였다. 시래기마저도 구하기 힘들 때가 많았다. 그럴 때면 이소선은 남의 집으로 걸식을 다녀야 했다. 창피한 것은 나중 문제였다. 아이들을 굶겨 죽이지 않으려면 이보다 더한 짓을 못하겠는가.

돌아갈 집조차 없었던 그 시절, 남의 집 처마에...

서울역 뒤 만리동 고개 근방에 갔을 때였다.

"저런 말짱한 젊은 년이 뭐가 아쉬워 구걸을 하러 다녀."

대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젊은 여자가 눈을 흘기며 쾅 소리가 나게 문을 닫았다. 이소선은 자신도 모르게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래도 울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을 살려야 하니까.

세상인심이 아무리 각박해도 저렇게 야박한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른 집에 갔을 때는 피붙이 보듯 살뜰하게 대해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젊은 사람이 어찌 그리 딱하게 되었소…."

또 다른 집의 여자는 혀까지 차면서 이소선을 이끌고 집 안으로 들어가더니 따끈한 쌀밥을 차려주기까지 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밥을 보는 순간 목이 메였다. 태일이,태삼이 그리고 먹지 못해서 골골거리고 있는 순옥이가 떠올랐다. 숟갈을 들어도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엄마는 아주머니에게 사정 얘기를 하고 소쿠리에 담아서 집 아닌 집으로 돌아왔다.

사람에게는 당연히 돌아갈 집이 있어야 하는 법인데 이들이 갈 집은 남의 집 처마 밑이었다. 이소선은 밥을 나누어줄 때마다 아이들에게 얻어왔다는 말을 감추었다. 어린 자식들에게 거지 자식이라는 상처를 안겨주고 싶지가 않았다.

"애들아, 어서 먹어라. 엄마가 남의 집에 가서 일을 해주고 쌀밥을 얻어 왔다."

항상 그런 식이었다. 시래기죽만 먹던 아이들이 쌀밥을 보면 글자 그대로 환장을 한다. 눈이고 코고 밥알을 엉겨가면서 손으로 떠먹기에 정신이 없다. 어미는 아이들에게 할 수만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죽이 아닌 밥을 먹이고 싶었다. 아이들에게 죽이 아닌 밥을 먹여야 한다는 일념에 어미는 부끄러운 줄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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