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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오전 서울역 승강장에서 시민들이 TV를 통해 박근혜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문 발표를 지켜보고 있다.
 19일 오전 서울역 승강장에서 시민들이 TV를 통해 박근혜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문 발표를 지켜보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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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뭘 잘못했다고 생각하는데?"

애인에게 혼날 때 항상 듣던 그 말을, 한국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은 그 분에게 감히(?) 묻게 될 줄은 진정 몰랐다. 박근혜 대통령의 담화를 다 들은 뒤, 난 내가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을 상실한 싸이코패스라도 된 기분이었다.

대통령이 울었다. 어쩐 일인지 대통령은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않았다. 대통령에게 실망했던 지지자들은 그 눈물을 보고 마음을 다시 돌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눈물이 당혹스러웠다. 왜 우는지, 무엇이 대통령의 눈가를 젖게 만든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되뇌인 희생자들의 이름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 걸까. 대통령은 그들이 대한민국의 "희망"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려다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지금 한 사람도 구하지 못한 정부의 수장이, 그들을 향해 "희망"이라 말하고 있다. '절망'의 제공자가 "희망"을 말하는 기가 막힌 상황이지만, 백 번 양보해 대통령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고 치자.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구할 기회는 모든 죄인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특권이니 말이다.

대통령의 눈물이 희생자에 대한 추모, 미안함, 자기반성을 위한 눈물이었다면, 나는 아마 대통령과 함께 울음을 터트렸을지도 모른다.

여전한 대통령의 '유체이탈 화법'

그러나 박 대통령의 눈물에 이입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담화에 '목적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대통령의 '유체이탈 화법'에는 주어가 없었다. 이제 주어가 채워진 대신 목적어가 비었다. 대통령은 자신에게 참사 수습의 "궁극적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다행스러운 한 단계 인식 발전이다.

그렇다면 이제 응당 나와야 할 이야기는 '무엇을'이다. 대통령으로서 그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잘못했는가? 그 이야기가 있어야 비로소 반성과 뉘우침이 성립된다. 모든 반성문에는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그 문제를 앞으로 어떻게 해결할지에 대한 내용이 들어가야 한다. 초등학생들도 알 만한 내용이다.

그러나 24분의 담화 시간 내내, 누구도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다. 대통령은 대체 무얼 잘못한 거지? 국민들이 어떤 점에 분노했는지는 아는 건가? 앞으로 대통령으로서 본인은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

놀랍게도, 박 대통령은 그렇게 수많은 물음표를 우리 머릿속에 던져주면서도 '심판자'로서의 위엄은 잃지 않았다. 모든 사태의 궁극적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던 대통령은 곧 해양경찰청, 안전행정부, 해양수산부에 책임을 묻기 시작했다. 그녀의 "책임지는" 자세는 바로 하급자들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었다. 쉬워도 이렇게 쉬운 책임지기는 또 없다.

그리하여, 해경은 해체라는 충격적 조치에 직면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내일 시험을 앞두고 있던 해경 지원자들까지 패닉에 빠트렸지만, 이 조치에는 '왜'와 '무엇을'이 함께 빠졌다. 물론, 이번 참사에서 해경의 대응과 내부 구조에 문제가 있다는 건 삼척동자도 안다. 그런데 해경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잘못했는가? 그냥 조직 개편도 아니고 해경을 해체까지 하는 건 왜인가? 다른 부처로 구조업무가 이월되면 정말 이런 문제는 반복되지 않을 수 있을까?

만일 이것이 보여주기식 조치가 아니라면, 그녀는 왜 하필 해경 해체가 대안인지에 대해서 근거를 제시하고 사람들을 설득해야 한다.

사실 그 근거는 오로지 진실이 밝혀질 때만 분명해질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의 머릿속에는 진실(원인 진단)과 해법이 완전히 따로 존재하는 관계인 듯하다. 공직 사회 개혁과 부처 개편이 담화를 압도했고, 진실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으며 진상조사에 대한 대책은 지나가듯이 언급되었을 뿐이다. 어쩌면 대통령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진실 속에 자신이 책임져야 할 또 다른 것들이 있을까 두려워하는지도 모른다.

진실과 연결되지 않은 대책을 내놓다 보니 사실 타이밍도 엉뚱하고 우려스러웠다. 실종자 가족들이 타는 가슴으로 외쳤듯이, 해경이 여전히 일선에서 구조 작업에 한창인데 왜 하필 지금 이런 극단적 처방을 발표를 한 걸까. 남은 실종자에 대한 구조 언급이 담화 속에 한 마디도 포함되지 않았던 것은 실수나 우연이 아니다. 대통령 관심의 우선 순위는 다시 한 번 실종자 가족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17일 오후 서울 청계광장에서 세월호침몰사고 희생자 추모와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범국민촛불행동집회가 열리고 있다.
 17일 오후 서울 청계광장에서 세월호침몰사고 희생자 추모와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범국민촛불행동집회가 열리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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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담화에서 빠진 건 그뿐만이 아니다. 사고 발생 한 달이 넘어서야 "지각사과"를 한 이유도 설명하지 않았다. 사고 직후에는 선장 개인만 찍어서 비난하다가, 왜 이제 와서 해경을 해체한다는 극약 처방을 내놓은 것인지, 그 사고의 변화 과정 또한 납득되게 설명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모든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면서, 어떻게 자신에게 그 책임을 묻는 시민과 학생들을 이틀 사이 이백 명이나 연행했는지도 설명하지 않았다. 담화 종료 후 기자들의 질문도 받지 않았다. 그저 눈물을 떨구며, 아랍에미리트로 핵발전소 수출을 기념하기 위해 홀연히 춘추관을 떠났을 뿐이다.

더욱 분명해진 살아남은 자의 책임

사실 대통령이 밝힌 이야기 중에서도 우리가 행간을 읽어야만 하는 대목도 있다.

예를 들면, 그토록 전가의 보도처럼 대통령이 되뇌이는 국가안전처 문제다. 그 부서는 일개 "처"인데도, 모든 재난에 대한 구조와 방비 업무를 담당한다고 한다. 실효성과 효율성에 대한 전문적 논의는 차치하더라도, 집중된 힘을 가진 행정부서가 과연 권력의 편의에 따라 이용될 위험은 없는지 따져봐야 할 일이다. 9·11 사건 이후 조지 부시가 만들어낸 국토안전보장부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은 지나치게 앞서 나간 걸까?

또 이 난리통에도 경제계획 3개년을 확실히 추진하겠다는 대통령의 다짐도 마음에 걸리기는 마찬가지다. 대통령이 아무리 시치미를 떼더라도, 그 계획의 핵심 내용이 규제완화와 민영화라는 진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안전이나 공공성보다 돈벌이를 중시하는 '경제 우상숭배' 계획을 계속 추진하겠다는 사람이 재난관리를 말하고 있으니, 이런 블랙 코미디가 또 있을까.

또다른 세월호 참사가 벌어지기 전에 이 무대의 막을 얼른 내려야만 한다. 이미 세월호 사건 직후 여기저기서 연쇄적으로 발생하는 사고들이 우리의 불안감을 깊게 한다. 

'진정성'이라는 말이 있다. 상대의 진심이 나에게 전해질 때, 우리는 그 단어를 사용한다. 진심에는 사심이 없다. 박근혜 대통령은 30대에 접어든 내게 그 단어와 가장 거리가 먼 정치인으로 기억될 듯하다.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에는 너무나 많은 목적과 '꿍꿍이'가 여기저기 포진해 있다. 아마도 박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는 나처럼 "미개한 국민"보다는 '집토끼'인 자신의 지지자들을 위한 것이었지 싶다.

화가 나지만, 그래도 어떤 점에서 나는 담담하다. 박 대통령의 진정성 부족한 사과가 어떻게 나왔는지, 나는 잘 알기 때문이다. 최근 무분별할 정도로 자주 반복되는 대통령의 내용 없는 사과는 바로 '거리의 힘'에 의해 나온 것이다. 우리의 여론이 대통령을 움직였다. 아직 우리가 원하는 수준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라지만 말이다.

그래서, 이번 토요일에도 나는 청계광장에서 촛불을 들 것이다. 참사 책임에 대한 대통령의 마음이 설령 진심이 아니라고 해도, 우리들의 힘이 크다면 최소한 대통령이 진심으로 이번에 한 일들을 후회하게 만들 수는 있을 것이다.

더 많은 사람이 나와 같은 마음이길, 그래서 더 많은 이들을 광장에서 만나길 바라본다. 우리에게는 대통령에게 없는 진심이 있다. 우리는 이 모순투성이 사회, 생명보다 돈인 사회, 힘 있는 사람들이 책임 지지 않는 이 사회를 반드시 바꾸어 놓을 것이다. 불의에 맞선 행동이야말로 희생자들의 넋을 지키는, 살아남은 우리의 유일한 선택지다.


태그:#세월호, #박근혜, #담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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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에서 미국 노동운동사와 한미관계를 공부했고, 지금은 노동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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