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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격의료, 의료영리화 문제가 전 국민의 불안을 야기시키는 요즘, <오마이뉴스>와 한국의료협동조합은 국민의 건강권과 의료의 공공성을 위한 '우리동네 주치의' 의료협동조합의 오늘과 내일의 모습을 함께 짚어 봅니다. [편집자말]
그날 거기에 가서는 안 되었다. 아무리 친구가 유혹했어도, 그래도 한 동네가 아닌가. 친구에게 "우리 병원 다니는 분들 많이 오실까?" 물었지만, 친구는 마음편히 "아닐 걸, 조금 멀잖아. 그리고 설마 알아보겠어?"라고 대답했다. 그렇게 대답을 들었다고 해도, 마음의 준비없이 터덜터덜 거기 들어가서는 안 되었다.

어, 시원하다. 뜨끈한 욕조에 몸을 담갔다. 뿌연 수증기 사이로 마주 앉은 사람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아~ 아는 얼굴이다. 그녀도 나를 알아보았다. 다만 내가 누군지까지는 알아채지 못한 표정. 어디서 봤더라 싶어하는 그녀와 까딱 목례를 주고받았다. 병원 유니폼이나 하얀 의사 가운을 벗으면 사람들이 잘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천만 다행이다.

설나 나를 알아보겠어? 벌거벗은 채로 눈이 마주쳤다

목욕탕에서 만난 환자들. 어딘가를 가리고 싶었지만, 어디를 가려야할지 정말 모르겠는 상황이었다. 가슴을 가려야 할까, 아랫도리를 가려야 할까, 하다못해 그녀의 눈이라도 가리고 싶었다.
 목욕탕에서 만난 환자들. 어딘가를 가리고 싶었지만, 어디를 가려야할지 정말 모르겠는 상황이었다. 가슴을 가려야 할까, 아랫도리를 가려야 할까, 하다못해 그녀의 눈이라도 가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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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너머 샤워를 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아는 얼굴들이 몇 보여, 숨어야지 하는 생각에 사우나실 안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무릎관절염으로 우리 의원에 다니시는 할머니 한 분과 딱 마주쳤다. 우리 조합원의 어머니셨다.

"아이고, 안녕하세요, 원장님?"
"네, 안녕하세요, OOO님."

어딘가를 가리고 싶었지만, 어디를 가려야할지 정말 모르겠는 상황이었다. 가슴을 가려야 할까, 아랫도리를 가려야 할까, 하다못해 그녀의 눈이라도 가리고 싶었다.

"이 동네 사세요, 원장님?"
"아니요, 요 아랫동네에 살아요. 참, 무릎은 요즘 괜찮으세요?"
"좀 좋아지는 것 같기는 한데, 아직 그래요. 이렇게 만날 사우나해야지 안 그러면 뻣뻣해서 걷기 힘들어요."
"네,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하셔야겠어요, 여기 바닥이 꽤 미끄럽네요."
"그러네요. 사우나 들어가시려는 거죠?"

다행히 사우나 안에서 그분은 동네 친구들과 이야기하느라 나에게 신경을 약간 꺼주셨다. 사우나를 하는 둥 마는 둥 얼른 이 목욕탕에서 탈출하기 위하여, 평소 목욕 시간의 반에 반도 채우지도 못하고 분주하게 몸을 씻고 있던 순간, 저 멀리서 수증기를 뚫고 누군가가 뛰어오셨다.

"아유, 선생님 맞네! OO 언니한테 선생님 계시다는 말 듣고 물어보고 싶은 거 있어서 왔어요."

고혈압과 협심증으로 진료를 받고 계시는 OO 할머니셨다. 이 분은 조합원.

"며칠 전에 가슴이 너무 두근거려서 갔는데, 문을 닫으셨대요."
"아… 아, 네…. 수요일 오후에 오셨군요. 올해부터 수요일 오후에는 진료를 쉬고 있어요."
"수요일이었어요. 맞아맞아, 문자도 받았어요. 그런데 맨날 까먹어요, 내 정신이야."
"아프실 때는 수요일인지 잘 생각이 안 나시죠. 죄송해요, 마침 아프신 날에 쉬어서."

"아네요! 선생님 혼자이신데 좀 쉬엄쉬엄 해야죠. 우리 조합도 빨리 커져서 의사도 더 많아지고 그러면 해결되겠죠."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래서 가슴 두근거리는 거는 어떠세요?"
"아니, 그래서 근처에 있는 다른 병원에 갔죠. 혈액검사를 해야 한 대서 했는데, 뭔 말인지 잘 모르겠네요. 그거 받아가지고 다시 갈게요."
"네네, 가지고 오시면 다시 찬찬히 설명해드릴게요."

갑상선 얘기와 췌장암에 대한 걱정 이야기 그리고 최근의 우울증에 대한 이야기까지 우리는 둘 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로 한참이나 의료 상담을 했다. 나는 어딘가 가리고 싶다는 마음을 이미 포기한 지 오래였다. 그 와중에 친구는 때를 밀고 있었다.

동네 주치의가 된다는 건, 이런 걸 각오하는 일

"에고, 내 정신이야. 이제 가볼게요. 선생님, 잘 씻고 들어가세요. 이 목욕탕 감식초 참 맛있어요, 시원하고."

발가벗었지만 우리는 최선의 예의를 다해 인사를 했다. 그리고 나와 친구는 잠시 후에 목욕탕 매점 아주머니가 가져다 주신 감식초를 받았다. "OO 할머니가 쏘신 거"라면서 눈웃음을 날리고 매점 아주머니가 사라졌다. 나는 냉탕에 몸을 담그고 빨대로 감식초를 쭉 들이켰다.

학교 선생님들이 학부모와 마주칠까봐 동네 목욕탕에 못 온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그러려니 했다. 나도 이제 목욕탕에 못 오는 거야? 아 학교 선생님들과 다를 바 없는 운명이 되고 만 거야? 설마 학교 선생님을 목욕탕에서 마주쳤을 때 아이의 학교 생활에 대해서 상담을 하고 싶어 하지는 않겠지? 이런 생각을 하다가 "푸푸푸하하하하하" 웃기 시작했다.

동네 주치의가 되겠다고 마음 먹은 건 처음부터 이런 의미가 아니었을까? 병원에 있든 없든, 의사 가운을 입었든 안 입었든, 동네 사람들이 편하게 상담할 수 있는 의사. 목욕탕에서 미용실에서, 슈퍼에서 장을 보다가도 마주칠 수 있고 상담할 수 있는 의사. 발가벗은 게 무슨 문제겠어. 후아, 감식초는 정말 시원하고 달았다. 그래도 이 목욕탕에 다시 오지는 말아야지. 크크크.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살림의원입니다.



태그:#의료생협, #주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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