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성이 14일 오전 경기도 수원 박지성축구센터에서 열린 '은퇴 선언 및 결혼 발표 기자회견'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박지성이 14일 오전 경기도 수원 박지성축구센터에서 열린 '은퇴 선언 및 결혼 발표 기자회견'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연합뉴스


'영원한 캡틴' 박지성이 은퇴를 선언하며 축구인생의 마침표를 찍었다.

박지성은 14일 수원 박지성축구센터에서 열린 기자회견을 통해 "오늘 선수 생활을 마무리한다는 소식을 전하게 됐다"며 "무릎 상태가 다음 시즌을 버티기 어렵다고 판단해 은퇴를 결정하게 됐다"고 밝혔다.

이어 "앞서 많은 분들이 은퇴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눈물이 날까'라는 생각도 했지만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눈물이 나지 않는다"며 "그만큼 축구 선수로서 미련이 남는 게 없다"고 소감을 밝혔다.

박지성은 "무릎 수술을 하면 다시 경기에 나설 수 있지만 회복 시간이 오래 걸리고 완쾌한다는 보장도 없어 은퇴를 선택하게 됐다"며 "(은퇴 후) 지도자를 할 생각은 전혀 없다는 것을 누누이 밝혀왔고 축구와 관련된 다른 일들을 하게 될 것"이라며 앞으로의 계획을 공개했다.

이로써 박지성은 교토 퍼플상가(일본), PSV 에인트호번(네덜란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잉글랜드), 퀸즈파크 레인저스(잉글랜드), 그리고 다시 에인트호번으로 이어지는 화려한 축구인생을 마무리했다.

주목받지 못하던 박지성의 '마이 웨이'

수원공고를 거쳐 명지대에 진학한 박지성은 그다지 주목받는 선수가 아니었다. 작은 체구에 기술이 뛰어나지도 않았다. 그러나 허정무 감독이 이끄는 2000년 시드니올림픽 대표팀과 명지대의 연습경기가 그의 축구 인생을 바꿔놓기 시작했다.

당시 연습경기에서 박지성을 눈여겨본 허정무 감독은 그를 과감히 발탁했고, 그해 4월 태극마크를 달고 라오스와의 아시안컵 1차 예선에서 A매치 데뷔전을 치렀다. 6월에는 마케도니아를 상대로 A매치 첫 골을 기록하며 당당히 시드니올림픽에 참가하는 등 상승세를 탔다.

박지성은 올림픽이 끝난 뒤 대학을 중퇴하고 일본 2부 리그 교토 퍼플상가에 입단했고, 이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축구계의 비주류였던 그는 외국무대에서 자유로웠고, 프로에서 체계적인 훈련과 관리를 받으며 기량이 급성장했다. 교토를 J리그로 승격 시키고 사상 첫 일왕배 우승컵까지 선사한 박지성은 곧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거스 히딩크 감독의 부름을 받았다.

박지성의 재능은 '은사' 히딩크 감독의 지휘 아래 꽃을 피웠다. 히딩크 감독은 주로 수비에 치중하던 박지성을 전진 배치하며 공격형 선수로 바꿔놓았고, 대표팀의 주전 멤버로 활용했다. 박지성은 월드컵 조별리그 3차전 포르투갈전에서 16강 진출을 확정 짓는 결승골을 터뜨리며 전 국민을 열광에 빠뜨렸다.

월드컵을 계기로 히딩크 감독의 '황태자'로 거듭난 박지성은 그를 따라 이영표와 함께 네덜란드 PSV 에인트호번에 입단했다. 그러나 장밋빛으로 가득할 것 같았던 유럽 무대에서는 시련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름 없는 영웅' 박지성, 그가 남긴 발자취

박지성은 에인트호번 입단 후 곧바로 지독한 슬럼프와 부상이 겹치며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다. 서툰 네덜란드어 실력도 비난의 대상이 됐다. 팀 동료들마저 박지성의 능력에 공개적으로 의문을 던졌고, 그가 그라운드에 나설 때마다 홈 관중은 야유를 보내는 등 축구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히딩크 감독은 홈 관중의 비난이 없는 원정경기에 주로 출전 시키며 박지성에게 계속 기회를 줬다. 서서히 적응력을 끌어올린 박지성도 곧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며 주전으로 자리 잡았다.

에인트호번에 완전히 녹아든 박지성은 2005년 팀의 네덜란드 에레디비지에 우승을 이끌었고, 그해 유럽 챔피언스리그 4강 2차전 AC밀란과의 경기에서 선제골을 터뜨리며 한국 선수로는 최초로 챔피언스리그 본선에서 골을 기록한 선수가 됐다. 비난을 쏟아내던 홈 관중도 언제 그랬냐는 듯 박지성의 눈부신 활약에 엄청난 환호를 보냈다.

월드컵 포르투갈전의 골이 박지성이 에인트호번으로 이끌었다면, AC밀란을 상대로 터뜨린 골은 그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아래 맨유)로 이끌었다. 박지성의 활약을 지켜보던 맨유의 알렉스 퍼거슨 당시 감독이 그를 영입한 것이다. 그리고 2005년 박지성은 맨유의 붉은 유니폼을 입었다.

맨유에서 보낸 7년은 박지성 축구 인생의 가장 화려한 전성기였지만, 반대로 가장 치열한 생존경쟁이기도 했다. 맨유는 유럽 최고의 명문구단답게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웨인 루니, 폴 스콜스, 라이언 긱스 등 세계적인 선수가 넘쳐났고 박지성이 설 자리는 좁아 보였다.

하지만 우려와 달리 박지성 특유의 강철 체력과 왕성한 활동력을 바탕으로 한 헌신적인 플레이는 스타 선수들 사이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맨유의 동료 선수들과 홈 팬들은 그에게 '이름 없는 영웅'이라는 별명을 지어줬다. 

퍼거슨 감독은 아스널, 첼시, FC바르셀로나 등 강팀과의 '빅매치'에서 박지성을 중용했다. 박지성은 7년간 205경기에 출전하며 아시아 선수 최초로 프리미어리그와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모두 경험했다. 박지성이 맨유에서 쌓은 경험은 대표팀으로 이어져 2010년 남아공월드컵에서는 주장 완장을 차고 사상 첫 원정 16강 진출을 이끌었다.

그러나 잦은 장거리 이동과 무릎에 부상이 찾아와 수술대까지 오른 박지성은 2011년 아시안컵을 끝으로 11년간 몸담았던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했다. 그리고 2012년 맨유를 떠나 퀸즈파크 레인저스(QPR)로 이적하며 선수 생활을 마지막을 장식하려고 했다.

"최고가 되는 길은 오로지 노력뿐"

하지만 박지성의 기대와 달리 QPR은 부실한 팀이었다. 선수 구성과 조직력에서 모두 허점을 드러내며 하위권을 맴돌았다. 구단은 감독을 경질했지만 신임 사령탑 해리 레드냅 감독은 박지성을 외면했다. 결국 QPR은 2부 리그로 강등됐고, 박지성은 별다른 활약도 없이 온갖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박지성은 여전히 가치 있는 선수였다. 에인트호번에서 함께 뛰었던 필립 코쿠가 감독이 되어 그에게 적극적인 구애 작전을 펼쳤고, 마침내 에인트호번으로 1년 임대되어 8년 만에 친정으로 복귀했다.

평균 연령이 20대 초반인 에인트호번에서 박지성은 기꺼이 팀의 리더가 되었다. 그리고 에인트호번은 박지성의 활약에 힘입어 5위로 시즌을 마무리하며 다음 시즌 유로파리그 진출권을 따냈다.

올 시즌이 끝나자 박지성의 거취가 다시 관심사로 떠올랐다. 에인트호번에서 임대 기간을 연장하느냐, 아니면 QPR로 복귀하느냐를 두고 갈림길에 섰다. 그러나 박지성은 은퇴를 결심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밝혔듯 더 이상 무릎이 버텨주지 않았다. 브라질월드컵 개막을 앞두고 홍명보 감독의 대표팀 복귀 요청도 마다한 박지성이기에 어느 정도 예상됐던 선택이기도 하다.

박지성이 박수를 받는 것은 그의 업적 때문만이 아니다. 그는 화려한 영웅이나 스타가 되려고 하지도 않았고,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에만 충실해도 세계 최고가 될 수 있다는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 박지성과 함께했던 히딩크, 퍼거슨 등 최고의 명장들과 스타 선수들이 그에게 찬사를 보내는 이유다.

올 시즌 에인트호번에서 함께 뛰었던 신예 수비수 제프리 브루마가 지난 3일 네덜란드 언론 <NIS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전한 감사의 인사는 박지성의 축구인생을 그대로 보여준다.

"박지성은 훌륭한 사람이자 훌륭한 선수다. 무릎 부상에 시달렸음에도 그는 아무런 불만도 없이 훈련할 때도 항상 최선을 다했고, 팀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하려고 했다. 우리는 박지성을 보며 최고가 되는 길은 오직 노력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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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성 에인트호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유럽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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