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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신 있는지 다시 한번 쭈욱 점검해봐. 문은 꼭 잠그고."

2005년 추석 무렵, 중국 베이징에선 동북아 다자간 협상이 한창이었습니다. 9·19 공동성명이 도출되던 바로 그 시점, 6자회담을 취재하기 위해 모인 6개국 기자들의 정보전쟁은 매우 치열했습니다. 각국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사안도 있는 터라 기자들도 덩달아 '국익' 차원에서 정보에 촉각을 세우고 있었지요.

제가 기억하기로 한국의 입장을 가장 궁금해 하고 적극적으로 취재하는 기자들은 일본 기자들이었습니다. 6자회담이 열리는 댜오위타이 앞에 카메라를 세워두고 회담 기간 내내 밤을 새워 취재하는 기자들은 중국기자보다 일본기자들이 더 많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북핵문제 등 한반도 이슈가 가장 큰 의제였지만 북한 기자들은 거의 없었고, 한국기자들도 한국 외교부가 설치한 브리핑 룸을 중심으로 취재했던 것 같습니다. 일본 기자들은 늘 한국 브리핑 룸 주변에서 정보를 캐려고 다녔던 걸로 기억합니다.

한국 측 입장을 듣는 대변인 브리핑은 대개 온 더 레코드, 백 브리핑, 딥 백 그리고 오프 더 레코드 등으로 나뉘어 진행됐습니다. 한국적 이해가 걸려 있는 경우 간혹 외교부 대변인은 외신기자들을 내보내고 브리핑룸 문을 잠근 뒤 한국기자들만을 대상으로 속 깊은 각국 사정을 설명해주었습니다. 배경지식이 있어야 정확한 보도를 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오프 더 레코드를 걸고 술술 이야기를 풀어냈지요. 외교부 대변인과 격의 없는 대화가 이어졌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오프 같지도 않은 오프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이 지난달 21일 서남수 교육부 장관이 세월호 참사 희생자 가족들이 머물고 있는 숙소 진도 실내체육관에서 라면을 먹은 사실을 옹호한 발언을 보도한 <오마이뉴스> 등의 매체에 대해 출입기자 징계를 내렸습니다.
▲ 기자들 질문에 답변하는 민경욱 대변인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이 지난달 21일 서남수 교육부 장관이 세월호 참사 희생자 가족들이 머물고 있는 숙소 진도 실내체육관에서 라면을 먹은 사실을 옹호한 발언을 보도한 <오마이뉴스> 등의 매체에 대해 출입기자 징계를 내렸습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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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취재원들은 기자들에게 '오프 더 레코드'를 걸고 국민적 알 권리와 상충하는 사실을 전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취재원과 신의가 먼저냐, 알 권리가 먼저냐. 기자들이 가장 고민하는 때가 그럴 때입니다. 취재원 또는 출입처와 돈독한 신뢰관계가 쌓여야 더 깊숙한 취재가 이뤄지기 때문이지요. 비보도 약속을 깨면 그간 쌓아온 신뢰관계가 무너지기 때문에 비보도 약속을 깰 땐 그 어떤 기자도 신중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여러 부처에서 기자들 말로 "오프 같지도 않은 오프"를 걸고 기사를 막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대표적인 곳이 청와대입니다.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은 지난달 21일 서남수 교육부 장관이 세월호 참사 희생자 가족들이 머물고 있는 숙소 진도 실내체육관에서 라면을 먹은 사실에 대해 "라면에 계란을 넣어 먹은 것도 아니고 끓여 먹은 것도 아니다. 쭈그려 앉아서 먹은 건데 팔걸이 의자 때문에, 또 그게 사진 찍히고 국민 정서상 문제가 돼서 그런 것"이라고 옹호했습니다. 문제가 될 것 같으니 민 대변인은 사전에 기자들에게 '오프'를 요청했고 청와대 출입기자단은 그 요청을 받아들였습니다. 보도하지 않기로 민 대변인과 청와대 기자단이 약속한 것이지요. 

그러나, <오마이뉴스>는 이 발언의 부적절성을 들어 그 비보도 약속을 깨기로 했습니다. 청와대는 대통령 경호나 국가안보가 걸린 비밀 사안을 많이 다루는 곳이기 때문에 유독 비보도 요청이 많고 그래서 기자단이 그 요청을 수락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번 경우는 그것과 전혀 다른 사안이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여전히 기자들 사이에는 소위 청와대가 비밀주의로 내세우는 국가안보나 국익과 민 대변인의 '계란라면 발언'이 무슨 상관이냐 비판이 지배적입니다. 오히려 기자단이 더 크게 보도해서 다시는 청와대가 관계자가 문제적 발언을 하지 못하도록 차단해야 하는 것은 아니냐 하는 지적도 나옵니다.

여하간 당시 민 대변인의 발언이 SNS를 통해 빠르게 확산되면서 국민은 크게 분노했고 청와대는 움찔했습니다. 서 장관의 행태도 못 봐줄 지경이지만 그걸 감싸고 도는 민 대변인의 태도에 분개한 것입니다.

<오마이뉴스>의 첫 보도 이후 <경향신문> <한겨레> <한국일보>도 잇따라 민 대변인의 발언을 보도했습니다. 대다수 언론은 보도하지 않았습니다. 대개 오프 더 레코드가 깨져 온 더 레코드가 되면 자사 독자들의 알 권리를 위해 쓰게 마련인데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전남 진도해상에서 여객선 세월호 침몰사고가 발생한 16일 당일 구조된 탑승객들의 임시 보호소로 쓰인 진도 실내체육관을 방문한 서남수 교육부 장관이 팔걸이 의자에 앉아 컵라면을 먹고 있다. 서 장관의 뒤편으로 체육관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안정을 취하고 있는 생존자들과 다급한 가족들의 모습이 보인다.
▲ 장관님, 여기는 왜 오셨어요? 전남 진도해상에서 여객선 세월호 침몰사고가 발생한 16일 당일 구조된 탑승객들의 임시 보호소로 쓰인 진도 실내체육관을 방문한 서남수 교육부 장관이 팔걸이 의자에 앉아 컵라면을 먹고 있다. 서 장관의 뒤편으로 체육관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안정을 취하고 있는 생존자들과 다급한 가족들의 모습이 보인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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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욱 계란라면 발언과 국가안보, 비밀주의

청와대 출입기자단은 8일 징계위원회를 열어 비보도 약속을 깬 <오마이뉴스>에 대해 청와대 기자실 출입정지 63일(9주)이라는 중징계 결정을 내렸습니다. <경향신문>에 대해선 출입정지 63일, <한겨레>는 28일, <한국일보>는 18일을 각각 결정했습니다.

징계결정이 내려지면 해당 기관에서 발송하는 각종 이메일이나 문자메시지 등 정보를 제공받지 못합니다. 사실상 취재가 불가능한 상태가 되는 것이지요. 요즘처럼 권력에 대한 감시가 긴요한 때 청와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취재조차 못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청와대 춘추관에는 현재 취재기자 60여 명을 포함해 모두 180여 명의 기자가 상주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들을 대표해 종합지·경제지·인터넷언론·방송·지역신문에서 각각 1~2명씩 모두 7명의 기자들이 간사단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이번 징계는 이 간사단에서 이뤄졌습니다. 징계 수위를 놓고 간사단 내부에서 입장이 갈리자 간사단은 총괄간사에게 결정권을 위임하는 방식으로 이 같은 결정을 내렸다고 합니다.

대개 청와대 출입 기자들은 각사에서 연배가 있는 시니어급 기자들이니 대개 오랜 세월 기자생활을 해온 사람들입니다. 그런 기자들이 상식적으로 판단했을 때 과연 청와대 대변인의 '계란라면 발언'을 보도했다는 이유만으로 동료기자들의 출입을 막는 결정을 내리는 게 합당하다고 생각했을까요? 민 대변인의 부적절한 문제를 180여 명의 기자들이 똘똘 뭉쳐 함께 지적했다면 어떤 상황이 연출됐을까요?

민 대변인의 발언은 세월호 참사 엿새째 우왕좌왕 갈팡질팡 어느 것 하나 분명하게 처리하지 못하는 정부와 관료의 무능과 복지부동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던 때였습니다. 따라서 서 장관의 부적절한 라면 처신과 민 대변인의 감싸기 발언은 국민적 지탄을 받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청와대 출입기자들은 그 부당한 발언에 각을 세우고 권력에 맞서 함께 싸우기 보다 오히려 동료기자들을 징계하는 어처구니없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것이 대한민국 언론사에 어떻게 기록될 것으로 보십니까.

대한민국 최고 권력인 청와대를 감시하고 견제해야 할 기자들이 청와대 편에서 사안을 바라보고 판단하고 기사를 재단한다면 그 자체로 권언유착이라는 비판에 직면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공영방송과 청와대 그리고 권언유착

세월호 희생자와 교통사고 사망자를 비교하는 발언으로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이 격하게 항의하는 등 파문이 일고 있는 가운데 발언 당사자로 알려진 김시곤 KBS보도국장이 9일 오후 여의도 KBS신관 국제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실제발언이 왜곡되었다고 반박했다. 또한 김 국장은 회견에서  "혼신의 힘을 기울였으나 보도국의 독립성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책임을 지고 사퇴한다"고 밝혔다.
▲ '사퇴' 표명한 김시곤 KBS보도국장 세월호 희생자와 교통사고 사망자를 비교하는 발언으로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이 격하게 항의하는 등 파문이 일고 있는 가운데 발언 당사자로 알려진 김시곤 KBS보도국장이 9일 오후 여의도 KBS신관 국제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실제발언이 왜곡되었다고 반박했다. 또한 김 국장은 회견에서 "혼신의 힘을 기울였으나 보도국의 독립성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책임을 지고 사퇴한다"고 밝혔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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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날인 8일과 9일 한국사회를 가장 뜨겁게 달군 뉴스는 KBS였습니다. 언론사 보도국장과 사장이 사건의 중심에 서서 뉴스인물이 되는 진풍경이 벌어진 것이지요. 발단은 김시곤 KBS 보도국장이었습니다. 김 국장은 '뉴스 앵커 검은 옷 자제 발언'과 '세월호 참사를 교통사고에 빗댄 발언'이 알려지면서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의 거센 항의를 받았고 9일 전격 사퇴했습니다. 현재는 공영성 연구부로 발령 났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김 국장은 자신이 사퇴할 수밖에 없게 되자 엄청난 사실을 폭로하고 나섰습니다. 보도국장 사임 기자회견에서 "언론에 대한 가치관이나 신념 없이 권력 눈치만을 보며 사사건건 보도본부의 독립성을 침해해온 길환영 사장은 즉각 자진 사퇴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JTBC <뉴스9> 인터뷰에서는 "길 시장이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의 미국 성희롱) 사건을 톱뉴스로 올리지 말라고 한 적도 있다"고 폭로했습니다. 그는 "길 사장은 대통령만 보고 가는 사람"이라며 "권력은 당연히 KBS를 지배하려고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길 사장 같은 언론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 공영방송 사장을 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지요.

자중지란. 김 국장의 폭로가 사실이라면 그동안 길 사장의 지시를 받아 KBS 보도국을 틀어쥐고 총 사령관으로 청와대와 권언유착 관계를 이어오다가 자신이 불명예 퇴진을 하게 되자 홀로 오물을 뒤집어 쓸 수 없다는 판단 아래 길 사장의 동반사퇴를 주장한 격입니다.

여기에다 박준우 청와대 정무수석은 박영선 신임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를 예방하는 자리에서 이번 사건의 경위를 설명하면서 "(9일 오전 9시30분 세월호 유가족 대표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니 상황이 심각했다"며 "그래서 어렵게 KBS에서도 좀 노력해줄 것을 부탁드렸고 그 결과 보도국장이 사의를 표시하고 길환영 사장이 (유족) 대표를 만나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청와대가 KBS 인사에 얼마나 깊이 개입하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줬습니다.

왜 사람들이 기자들을 '기레기(기자+쓰레기)'라고 할까요?

1973년 10월 유신 당시 대학가를 취재하던 정연주 당시 동아일보 기자(전 KBS 사장)는 농성장 입구에 붙어 있는 팻말을 보고 놀랐다고 했습니다. '개와 기자는 접근 금지'

기자 정연주는 당시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 부끄러움과 분노가 쌓여 마침내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의 젊은 기자, 피디, 아나운서들이 자유언론의 횃불을 들게 됐다고 훗날 회상하기도 했습니다. 이명박 정부 때부터 언론은 만신창이가 됐습니다. YTN MBC 해직기자들은 아직도 현장으로 못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 부끄러움을 도대체 어찌해야 할까요.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태그:#계란 발언, #민경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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