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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일항쟁기에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해방 후에는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국무총리 및 국방부장관을 지낸 독립운동가 철기 이범석 장군의 서거 제42주기 추모제가 9일 오전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사)철기이범석장군기념사업회(조준래 회장 직무대행) 주최로 거행됐다.

이날 추모제는 기념사업회 관계자와 유족, 정부를 대표하여 안중현 국가보훈처 서울지방보훈청장이 참석하였으며, 각각 군(軍)과 광복회를 대표하여 한민구 前 합참의장(예비역 대장), 안홍순 광복회 부회장 등이 참석하였다. 이밖에 대한민국 6·25 참전 유공자회 및 베트남참전유공자회 회원들이 다수 참석하였다.

철기 이범석 장군 42주기 추모제 철기 이범석 장군 42주기 추모제 현장
▲ 철기 이범석 장군 42주기 추모제 철기 이범석 장군 42주기 추모제 현장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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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무정 기념사업회 감사의 약력보고로 시작된 추모제는 내빈 추도사, 헌화 및 분향, 조총발사, 묵념 순으로 진행됐다.

국민의례하는 내빈들 철기 이범석 장군 42주기 추모제에서 국민의례를 하는 내빈들의 모습
▲ 국민의례하는 내빈들 철기 이범석 장군 42주기 추모제에서 국민의례를 하는 내빈들의 모습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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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정부를 대표하여 참석한 안중현 국가보훈처 서울지방보훈청장은 추도사를 통해 "이범석 장군은 한 평생 개인의 안녕과 사욕을 탐하지 않고, 오로지 조국광복과 국가라는 대의를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바친 훌륭한 애국지사요, 참다운 군인이며, 국민을 위한 정치인이었다"고 회고하며, "우리들은 장군이 이룩한 큰 뜻과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나라를 굳건하게 지키고 평화통일을 이룩하며, 온 국민이 행복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 힘을 하나로 모아갈 것"이라고 의지를 밝혔다.

세월호 참사로 더욱 엄숙했던 분위기

한편 이날 추모식장은 최근 일어난 진도 여객선 '세월호' 침몰 사고로 인해 더욱 엄숙한 분위기였다.

안홍순 광복회 부회장을 통해 추도사를 보내온 박유철 광복회장은 "장군의 영전에 서고 보니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분단국가인 데다가 최근 세월호 선박사고로 자라나는 고등학생들 수백 명이 희생되는 비극이 일어나는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고 슬프다"며 "그 원인이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안전불감증과 도덕적 해이에서 오는 병폐라서 살아생전 조국애가 남달랐던 장군께 송구한 마음 금할 길이 없다"는 안타까운 심경을 드러냈다.

이어 박 회장은 "이번 세월호 참사를 유발한 당사자는 말할 것도 없고 공직자는 물론 국민 모두가 뼈를 깎는 자성이 없으면 결코 이 난국을 헤쳐나갈 수 없다는 생각을 가져야 할 것이다. 우리가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나라가 위태로움에 빠진다는 위기의식을 가져야 한다"며 다시는 이런 비극이 없도록 온 국민이 뼈를 깎는 노력을 해나가자고 당부하였다.

안홍순 광복회 부회장 철기 이범석 장군 42주기 추모제에서 안홍순 광복회 부회장이 박유철 광복회장의 추도사를 대독하고 있다.
▲ 안홍순 광복회 부회장 철기 이범석 장군 42주기 추모제에서 안홍순 광복회 부회장이 박유철 광복회장의 추도사를 대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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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마지막으로 "이번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우리 국민 모두가 선열들의 애국정신,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이타정신을 배워, 한 마음 한 뜻으로 통일을 이룩하고, 더 나아가 인류평화에 기여를 할 것"이라고 다짐하였다.

묵념하는 유족들 철기 이범석 장군 42주기 추모제에 참석한 유족들이 장군의 영정 앞에서 묵념하고 있다
▲ 묵념하는 유족들 철기 이범석 장군 42주기 추모제에 참석한 유족들이 장군의 영정 앞에서 묵념하고 있다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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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기 이범석 장군의 생애

철기 이범석 장군은 1900년 10월 20일 서울 용동 출생으로 소년 시절이던 1915년에 몽양 여운형의 권유로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그곳에서 신규식의 주선으로 중국의 군벌 당계요가 설립한 군관양성학교 운남강무당(雲南講武堂)에 입학한 장군은 기병과(騎兵科)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중국군 기병장교가 되었다.

1919년 3·1혁명이 일어나자 장군은 독립운동에 동참하고자 스스로 장교직을 사임하고, 만주로 떠나 신흥무관학교의 고등군사반 교관으로 취임하여 독립군 장교 양성에 진력하였다. 이듬해인 1920년 4월에는 백야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로 가서 연성대장에 취임,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말을 타고 있는 철기 이범석 장군 철기 이범석 장군이 말을 타고 찍은 사진
▲ 말을 타고 있는 철기 이범석 장군 철기 이범석 장군이 말을 타고 찍은 사진
ⓒ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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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10월 21일 만주 화룡현 청산리 일대에서 한국 독립군과 일본군이 전면전을 벌인 '청산리 전투'가 일어나자, 보병 1개 대대를 인솔하여 일본군을 대파하는 큰 승리를 거두어 한국독립운동사의 새 장을 열었다.

이후 독립군을 이끌고 밀산으로 이동하였으나, '자유시 참변'으로 인해 군대가 강제 해산당하자 중국, 러시아 등지를 전전하다가 1923년 5월 김규식, 고평 등과 고려혁명군을 조직하며 독립전쟁의 기회를 기다렸다. 1934년에는 중국 국민당 정부의 도움으로 낙양군관학교 내에 한국 독립군 양성을 위한 특별반이 개설되자, 지청천의 수하에서 교육대장을 맡아 독립군 간부 양성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다 1940년 9월 17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에 국군인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초대 참모장으로 임명되었으나, 얼마 후 야전에서 직접 작전을 지휘하기 위해 참모장 직을 스스로 벗어던지고 제2지대장에 취임, 섬서성 서안(西安)에서 광복군을 양성하였다.

철기 이범석 장군 영정 추모제 현장에 모셔진 철기 이범석 장군 영정
▲ 철기 이범석 장군 영정 추모제 현장에 모셔진 철기 이범석 장군 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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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당시 장군은 미국 전략정보국(OSS: Office of Strategic Service)과 합작하여 광복군을 국내에 침투시키는 '국내진공작전(독수리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으나, 일본의 갑작스러운 항복으로 인해 작전 개시 직전, 광복을 맞이하였다.

1946년 6월 3일 광복군을 이끌고 인천항을 통해 환국한 장군은, 이후 '민족지상 국가지상'의 표어를 내건 조선민족청년단(朝鮮民族靑年團, 속칭 족청)을 창설해 해방 후 혼란 속에서 민족국가 건설을 위한 노력을 경주하다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국무총리 및 국방부 장관에 취임하여 국가기반 구축과 국군 창설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후에도 이승만 정권 하에서 내무부장관, 자유연맹 소속 참의원으로 활동하는 등 활발한 정치적 활동을 전개하다가 1972년 5월 11일 향년 72세에 심근경색으로 서거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3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하였고, 유해는 국립서울현충원 국가유공자 제2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철기 이범석 장군의 묘 국립서울현충원 국가유공자 제2묘역에 모셔진 철기 이범석 장군의 묘역
▲ 철기 이범석 장군의 묘 국립서울현충원 국가유공자 제2묘역에 모셔진 철기 이범석 장군의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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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장군의 뜻을 계승하기 위해 지난 1979년 2월 26일에 출범한 (사)철기이범석장군기념사업회는 장군이 창설한 족청의 전통과 유지 계승을 위하여 지난 2006년 광복청년아카데미를 창립하고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청소년 해외 독립운동 사적지 탐방을 8년째 이어오고 있다.

또 중국 연변대학교에 재학 중인 재중동포 대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광복청년아카데미 소속 대학생들과의 한·중 대학생 토론회를 개최하는 등 한국과 중국의 친선교류를 도모하고 있으며, 중국 내 왜곡된 항일역사유적을 시정하기 위해 연변대학 내 재중동포 학생들을 중심으로 '역사연구회'를 만들어 꾸준한 후원을 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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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선열을 기억하기 위해 기록하고자 하는 역사학도 / 以茶靜心 以武健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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