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텔레비전 리모컨이나 휴대전화를 냉장고에 넣어놓고 찾는다는 주부건망증. 나는 남의 이야기인줄 알았다. 나는 그동안 지갑이나 휴대전화 등 내 물건 같은 것을 잃어버리는 일은 거의 없었다. 건망증이 심해서 한 발짝 움직일 때마다 종이에 써 붙여 놓고 찾는다는 이야기도 다른 나라 사람 이야기인줄 알았다(어쩌면 그런 기억이 없다는 것도 건망증일지도 모르지만). 그런데 요즘 들어 건망증이라는 게 심각하게 와닿는다.

기분 좋게 목욕탕·도서관 다녀왔더니... 경악

내게도 건망증 징후가 포착되다니...
 내게도 건망증 징후가 포착되다니...
ⓒ 오마이뉴스

관련사진보기

어느 토요일, 남편이 일을 쉬는 날이라 둘이서 아침 일찍 일어나 공중목욕탕에 가서 피로도 풀겸 몸을 푹 담그다 오자고 했다. 목욕 갈 준비를 하면서 전날에 먹다 남은 미역국을 한 번 데워놓고 가자 싶어 국솥을 가스 불 위에 올렸다. 당연히 한 번 끓여놓고 가스 불을 끄고 나가리라 생각했다. 적어도 가스 불을 켤 때까지는….

하지만 목욕 갈 준비를 하는 동안 나는 내가 가스 불에 뭔가를 올려놨다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아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대충 목욕준비를 하고 집을 나섰다. 다녀오는 길에 시내에 있는 두 개의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고 새로 빌릴 생각으로 책도 챙겨놨다. 목욕탕에서 두어 시간 넘도록 뜨끈뜨끈한 물에 푹 담근 채 피로를 풀고 한증탕, 냉탕, 온탕을 들락날락거리다가 막판에 때를 좀 밀고 여유 있게 목욕탕을 나왔다. 돌아오는 길에는 도서관에 들러 책을 반납하고 새로 빌리기도 했다. 이제 목욕도 하고, 책도 잔뜩 빌려놨으니 집에 돌아가 누워 뒹굴며 독서삼매경에 푹 빠져보리라. 부푼 마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집 앞에 당도한 순간, 코끝에 강렬하게 와 닿는 타는 냄새. 누가 뭘 얼마나 태웠길래 이토록 공기 중에 깊고 짙은 냄새가 충만할까. 그 순간 눈앞에 별이 반짝하며 깜깜해지는 것 같았다.

아차!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머, 어머머…, 어떡하지? 그때서야 아침 일찍 가스 불 위에 올려놓고 나간 쇠고기 미역국솥이 생각났다. 어머, 어떡해. 어쩌면 그렇게 까마득하게 잊고 있을 수가 있지? 내 머리가 어떻게 된 건 아닐까. 전혀 기억이 없었다니 말도 안돼! 나는 내 자신에게 실망하고 절망하고 낙담을 늘어놨다. 허둥지둥 집으로 달려가 현관문을 따고 뛰어 들어왔다. 탄 냄새가 진동했다.

밸브가 열린 상태였는데 불은 꺼져 있었다

그런데 부엌 가스레인지는 꺼져 있었고 밸브는 열린 채로 있었다. 국솥은 새까맣게 타서 흉물스러워졌고, 뚜껑을 열어보니 얼마나 탔는지 숱 검댕이가 돼 있었다. 이상했다. 불은 어떻게 꺼진 걸까. 나의 궁금증도 잠시. 옆집 할머니가 오셨다. '아니 불났으면 어쩔 뻔 했냐'면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해줬다. 타는 냄새와 연기가 솟아나자 옆집 할머니와 2층 집 아가씨가 달려 내려왔고, 사람이 없고 문이 잠겨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얼른 우리집 부엌 뒤 가스통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밸브를 잠갔다고 했다. 큰 일 날 뻔 했다면서 야단 아닌 야단을 쳤다.

아이구 세상에, 부끄럽고 놀랍고 민망했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편으로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나의 건망증에 내 자신이 어리둥절했다. 남편은 속이 상할 텐데도 그래보 불이 안 나서 다행이라며 더 이상 말을 보태진 않았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국솥이랑 국이랑 다 태워먹어도 불이 안 나게 해주시고 큰 일 벌어지기 전에 이웃 사람에게 발견되게 해주셔서, 위험을 지나가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절로 감사가 나왔다. 집안엔 한참 동안 짙게 밴 탄 냄새는 가시지 않았다.

그때의 충격으로 인해 나는 자주 깜짝 놀란다. 그렇지 않아도 잠깐 어딜 외출할 일이 있으면 분명히 가스를 잠그고 나왔는데도 혹시 켜 둔 채 나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다시 달려가 확인하고 하는 습관이 있는데 이런 일이 생기고 보니 강박증이 더해졌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고 했던가. 어디 나가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면서 내가 가스를 잘 잠갔나? 골똘히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건망증아, 부디 모른 척 하고 살자

그때 그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때의 일이다. 책을 읽고 있다 문득 배가 고팠다. 마침 밥이 없어 짜파O티라도 끓여먹자 싶어 가스 위에 물을 올렸다. 물이 끓어오르는 것을 보고 면을 냄비에 넣었다. 그리고 서재로 왔다. 책을 읽었던가 글을 썼던가. 책상 앞에 앉아 있노라니 노트북 뒤쪽 콘센트가 꽂힌 데에서 하얀 김인지 연기인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런 줄 알았다. 전기합선이라도 생긴 걸까 하고 나는 스위치가 꽂힌 곳을 확인해봤지만 아무 이상이 없었다.

'이상하다, 어디서 연기가 나는 거지?'라고 생각하는 순간…. 아차! 얼른 부엌으로 달려갔다. 면이 냄비 밑바닥에 들러붙어서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냄비 뚜껑을 열어보니 면은 팅팅 불었고 밑바닥은 새까맣게 들러붙어 있었다. 짜파O티로 점심을 대신하려 했던 것이 까맣게 탄 솥을 만들어놨다. 나는 경악했다. 도대체 내가 왜 이러지…. 절망에 차서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내가 왜 이러지…, 한심하고, 이상하고, 칠칠맞지 못하고, 어이없고, 황당했다.

고교 때 짝꿍이었던 친구는 학기 초에 샤프 연필을 손에 들고서 '내 샤프 내 샤프'하면서 찾느라 소동을 피워 내 정신을 빼놓은 적이 있었다. 두고두고 그 얘길 써먹곤 했는데 내가 요즘 그와 비슷한 증세를 보이고 있다. 전에는 내 물건 같은 걸 잘 잃어버리지 않았는데 요즘은 종종 깜박 깜박한다. 휴대전화를 손에 들고 외출을 하다가 '어머 내 휴대전화!' 하며 집으로 도로 뛰어 들어가다가 손에 들고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라기도 하고 물건을 사고 거스름돈을 안받고 돌아서다가 '거스름돈요'라고 부를 때에야 비로소 '아참' 하고 놀라기도 한다.

아! 건망증이여! 내 젊었을 때 너란 존재를 몰랐듯이 여전히 모른 척 해다오. 이제 와서 친구 하자고 하지마. 부디 모르는 척 하고 살자. 지금까지 네가 날 깜짝깜짝 놀라게 한 건 널 기억하라는 사인으로 받아들일게.

그래도 친구하고 싶거든 놀라지 않게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은근하게 왔으면 해. 긴 세월 끝에서 널 만나면 친구하자 손 내미는 너를 향해 '그깟 건망증쯤이야!' 용납하는 마음 한 자락 내줄게. 그러니 천천히 와, 놀라지 않게. 세월을 다해.

덧붙이는 글 | "건망증 때문에 겪은 일" 응모 글입니다.



태그:#건망증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데살전5:16~17)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