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이소선이야말로 1930년대의 암담한 농촌의 궁핍한 상황 속에서 가장 천대받고 가장 빈궁한 농가에 그것도 데려온 자식으로 살아가야 했다. 식민지의 모순을 가장 아프게 겪었고, 봉건주의 폐해를 가장 심하게 당했을 뿐만 아니라 데려온 자식으로 차별을 받으며 살았다. 이처럼 어려서부터 인간차별을 받아온 그로서는 인간차별을 하는 모든 것에 대해 아주 치를 떨었다.

왜놈들 등쌀은 지긋지긋했다. 날마다 관솔을 따야했고, 가마니를 짜야 했고, 목화씨에 그 껍데기를 까는 일을 해야 했다. 왜놈들이 타고 다니는 말에게 먹일 말꼴도 해다 바쳐야 했다. 심할 때는 하루에 몇 번씩 공출을 해다 바쳐야 했다. 송진이 많이 붙지 않은 관솔을 해다 바쳤다고 퇴짜 맞기가 일쑤였다. 그러다 보니 소선은 어린 마음에도 인간차별을 깨 부셔야 한다든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소선은 차별 두는 것에 반항하고, 잘못된 것에 따지기를 잘 하는 아이로가 되었다.

"가시내가 이렇게 억척스러우니 니가 야시(여우)될 끼가, 미구(이무기)될 끼가? 수긋수긋 좀 못난이처럼 살아볼 줄을 알아야 편할 낀데..."

소선의 어머니는 따지기 잘 하는 딸을 두고 이렇게 나무라기 일쑤였다.

다른 애들은 보통학교(초등학교)에 보내주는데 소선은 입학시켜줄 꿈도 꾸지 않은 것에 대해 어머니한테 학교 보내달라고 떼를 썼다.

"여자가 공부해서 뭐하나. 일은 누가 하나."

어머니는 데뜸 화부터 냈다.

"아침에 나무하고 관솔 따고, 이런 일 다 해놓고 낮에 학교에 가면 안 되겠나?"
"야, 학교 가면 뭘 하나? 돈도 안 냈는데!"

어머니는 야단을 친다. 그래도 소선은 학교에 가고 싶었다. 아침나절에 할 일을 부지런히 한 다음에 먼 친척인 동인이 오빠를 따라서 학교로 갔다. 그러나 돈을 내지 않았기 때문에 정식으로 교실에 들어가 공부할 수가 없었다. 교실에 들어갈 수가 없어서 밖에서 기다리다가 애들이 화장실 가려고 들어갈 때 슬쩍 묻어서 따라 들어갔다.

어깨너머로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같은 마을 아이들의 학생 의자 밑에 숨어서 듣는 것이었다. 그땐 교실 바닥이 흙이었으니까 연필 대신 뾰쪽한 돌을 주워 바닥에다 그리면서 배울 수 있었다.

한번은 선생님이 구구단을 다 외운 사람에게는 면장 딸도 신어보기 어려운 고무신에다 연필과 잡기장을 준다고 말씀하셨다. 소선은 그 상품이 너무도 욕심이 나서 그날 늦게까지 집에 안 들어갔다. '일 안할 폭 잡고, 두드려 맞으면 두드려 맞자'하고 단단히 작정을 한 뒤 내내 명밭(목화밭) 고랑에 엎드려서 구구단을 외웠다. 구구단을 외우다가 밤에 집에 갔다. 집에서는 야단이 났다. 어머니한테 매를 맞았다. 매를 맞고도 포기하지 않았다. 밤늦게까지 낮에 외운 구구단을 복습했다.

드디어 구구단을 다 외운 사람한테 상을 준다는 날이 왔다. 선생님이 구구단을 다 외울 수 있는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고 하는 것이다. 아무도 손을 드는 아이가 없었다. 소선은 가슴이 설렜다. 손을 들까 말까 망설이다 용기를 내어 손을 번쩍 들고 자청해서 나섰다. 선생님이 소선을 보고 너는 이 학교 학생이 아니지 않느냐 자격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다른 학생은 없느냐고 물어도 손을 드는 학생이 없자 선생님은 소선을 가리키며 그러면 어디 한번 외워보기나 하라는 것이다. 소선은 벌떡 일어나 그동안 열심히 외운 실력을 발휘해서 똑똑하게 다 외웠다.

"너 참 똑똑하구나."

일본인인 그 선생님은 소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리고 고무신, 연필, 잡기장을 상으로 주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집안 어른 갖다 드리라며 편지를 써주었다. 그 편지에는 입학금과 공납금을 면제해주겠으니 소선을 학교에 보내라는 간곡한 내용이 적혀있었다. 그런데 이 일로 인해 집안에서는 야단이 났다. 상으로 타온 고무신도 연필도 잡기장도 다 빼앗아버리면서 왜 학교에 갔느냐면서 소선을 야단치는 것이다.

소선은 학교를 정식으로 다니지는 못했지만 공부가 너무 하고 싶었다. 그래서 정씨문중에 언문을 배워서 시집 온 '논뱅이댁'이 있었는데, 소선은 그 '논뱅이댁'을 찾아가서 언문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

논뱅이댁은 박실 정씨문중에 시집 온지 얼마 안 되어 남편은 징용에 끌려가고 홀로 시부모를 모시고 있었다. 홀로 시집살이하는 새댁의 일하는 양이 많았다. 온종일 목화를 골라야 하고 명을 자아야 하는 일이 산더미 같았다. 그래서 소선은 그 일을 도와 함께 끝내고 밤늦게 다른 사람 몰래 글을 배웠다.

"'가' 자에 '기억'하면 '각', '나'자에 '기억'하면 '낙.'"

소선은 밤에 논뱅이댁한테 배운 글을 낮에 산에 나무하러 가서도 그 소리만 하고, 밥을 먹는 시간에도 그 소리만 외웠다. 그렇게 열심히 배웠지만 글자를 종이에다 연필로 쓰면서 배운 것이 아니라 일하면서 입으로 배운 것이라 글을 읽는 것은 아주 쉽게 읽을 수가 있지만 쓰는 것은 매우 서툴다.

소선의 어린 시절은 한없이 가난하고, 한없이 공부하고 싶고 그러면서도 아무 힘도 없는 시절이었다. 흔히들 얘기하는 꿈 많은 처녀 시절이 그에게는 반항의 시절이었다.

소선의 나이 많은 의붓아버지의 전 부인이 연어동에서 시집 왔다고 해서 연어댁이라고 했다. 그래서 개가한 그의 어머니도 그냥 연어댁이라고 불렸다. 사람들이 소선을 가리켜 연어댁이 시집 올 때 데려온 '것'이라고 했다.

그의 식구들을 가리켜 '그것들' 이라고 했다. 이렇게 사람들이 까닭 없이 천시를 하기 때문에 소선은 어디를 가도 '너 누고?' 하며 묻는 말이 무서웠다. 또 심하면 자기 아이들한테 소선하고는 놀지 말라는 사람들도 있었다. 소선의 친구들이 자기 집에 그를 데리고 가면 어른들이 하도 그러니까 소선한테 "우리 어무이 안 보이는데서 숨어 있어라"고 하기도 했다.

그래서 소선은 커다란 결단을 내렸다. 그한테 정가 촌수를 못 부르게 하는 것이 서러워서 어른들한테 따지기로 했다. 문중의 어른을 만나러 '학우재'로 갔다.

"어르신, 우리 어무이 정씨집안에 개가를 했어도 내가 정씨 아니라 이씨인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아닙니꺼. 하지만 점두리 엄마는 '재하고 놀지 마라, 값어치 없는 애다'하고 나를 따돌리고 동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다 나를 업신여기니 이래도 되는 긴가요? 정씨네들이 이럴 양이면 내를 '이소선'이 아니라 '정 작은선'이라고 바꾸어 주든가, 아니면 사람차별을 말든가 해야 할 것 아입니꺼?"

학우재 이소선이 동네 어르신들한테 '사람차별'을 항의하던 곳
▲ 학우재 이소선이 동네 어르신들한테 '사람차별'을 항의하던 곳
ⓒ 민종덕

관련사진보기


소선의 말을 듣는 문중 어른은 어린것이 당돌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듣고 보니 경우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내일 아침에 재실에서 문중회의가 있으니 문중회의를 해서 그 결과를 알려줄 테니 회의가 끝날 시간에 오너라."

이튿날 소선은 재실로 갔다.

"어린 니가 그런 말을 하러 왔을 때는 얼마나 혼자 생각을 해가지고 왔겠노. 그러나 성은 바꿀 수 없다. 그렇지만 우리 문중에서 집집마다 통보를 해서 니들이 오빠나 헝(형)이라고 부르면 잘 대답을 하라고 해주꾸마."

문중 어르신은 안쓰러운 눈길로 말씀하셨다. 그런 일을 겪고 난 뒤에야 동네 일가 오빠나 형들이 다정하게 대해주고 호칭도 '그것들'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소선은 마침내 자신이 정가가 되는 것처럼 되었다. 이후부터는 구박을 덜 받고 인간대접을 받은 것이다.

소선의 처녀시절은 외로웠다. 하나밖에 없는 친동기의 오빠는 일본으로 징용을 가버리고, 성이 다른 오빠 동생은 여럿 있었으나 늘 외톨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피어나는 봄의 꽃처럼 부풀어 오르는 처녀의 마음을 남녀유별이 엄격한 시절이라고 해도 억누를 수만은 없었다. 소선은 바깥출입이 금지된 관습을 깨고 밖으로 나가는 것을 감행했다.

어느 해 설 명절날이었다. 명절이라 모처럼 일손을 잠시 쉬고 동네처녀들이 모여 놀았다. 이때 소선은 오래 전부터 마음속으로 별러 왔던 것을 실행했다. 그것은 번갯불처럼 번쩍 하고 불이 터지면 사람의 모습이 그대로 박혀 나오는 '사진'이라는 것이 하도 신기해서 자신도 언젠가 한번 사진을 꼭 박아보고 싶었는데 그것을 이 기회에 하기로 해 보기로 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사람의 혼이 박히는 것이라고 해서 무섭다고 하지만 소선은 사진 박는 것이 신기하고 재미가 있을 것 같아서 사진 박는 사람들을 몹시 부러 했었다.

"애들아, 우리 오늘 대구로 사진 박으러 가자."

소선은 설날을 이용해 동네 처녀들을 꼬드겼다. 망설이는 친구들을 설득해 여러 명의 처녀들이 소선을 따라서 사진 박으러 눈길을 헤치고 그 먼 대구로 갔다. 처녀들이 대구에 가 사진관에서 신기한 사진을 박고 난 뒤 시내 구경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이미 날은 저물어버렸다.

한편 마을에서는 여러 명의 처녀들이 한꺼번에 없어졌으니 난리가 났다. 어른들은 밤중에 등불을 켜들고 마을 처녀들을 찾으러 천지사방으로 헤매고 다녔다. 이윽고 한밤중에 처녀들은 등불을 들고 찾아 나선 어른들한테 발견이 되었다. 처녀들은 저마다 집으로 잡혀가서 흠씬 야단을 맞았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