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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길 판화
▲ 어머니의 길 어머니의 길 판화
ⓒ 홍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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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직공장은 대마베를 짜서 일본군의 군복을 만드는 군수공장이었다.

첫날부터 일본군가를 가르치면서 아침마다 군가를 부르게 하고 체조를 시킨다. 콩깻묵밥을 먹고 일을 시작해야 했다. 소선과 시남이를 비롯 함께 근로정신대로 끌려온 처녀들한테 주어진 일은 작업장 밖에서 청소하는 일과 실을 매는 일이다. 일본인들이 일을 시키는데 마치 죄수를 잡아다놓고 일을 시키는 것처럼 욕설과 매로 노동을 시켰다.

기술자들은 공장 안에서 베 짜는 일을 했다. 소선은 얼마동안 실매는 일과 잡일을 하다 보니 은근히 화가 치밀어 올랐다. 방직공장에 왔으면 베 짜는 일을 시켜야지, 베 짜는 일은 안 시키고 잡일을 시키고 기껏 해봐야 실매는 일만 시키는 것이다. 공장 안에서 베 짜는 기술자들이 부러웠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저 안에서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궁리 해 봤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관리자한테 얘기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동안 벼르고 별러왔던 얘기를 할 기회가 왔다. 소선은 체조시간에 용기를 내어 손을 번쩍 들었다. 체조시키는 관리자가 뭐냐고 물었다.

"나는 밖에서 이런 잡일 안하고 저 안에 들어가서 베 짜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저 안에서 일 하게 해주세요."

"뭐라꼬? 쪼끄만한 것이 어디서 지 맘대로 탕탕 말을 하는 거야! 너는 기술도 없잖아."

"기술 없는 것이야 배우면 되는 것이고, 어차피 내가 여기에 일을 하러 왔는데 마음에 드는 일을 해야지 하기 싫은 일을 하니까 능률도 오르지 않고 일도 힘들지 않습니까?"

이렇게 주고받는 말을 옆에서 듣고 있던 높은 사람이 참견을 한다.

" 너 몇 살 먹었냐?"

"열여섯 살이요."

나이 이외에 몇 마디 더 묻더니 '쪼끄만 것이 제 주장을 말하는걸 보니까 뭘 시켜놓으면 잘 하겠는데......'라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저 베 짜는 데로 가겠다고 했냐?"

그 사람은 공장 쪽을 가리키면서 물었다.

"예, 그렇습니다."

"왜 그랬냐?"

"우리가 남자도 아닌데 돌을 나르는 일, 청소하는 일, 무거운 물건을 운반하는 일, 실 매는 일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짐승처럼 몰고 다니면서 일을 시키는데 기왕에 여기 와서 일을 할 수밖에 없다면 기술을 똑바로 배워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나는 방직 기술을 배워서 베 짜는 것이 소원이니 저 안에 들어가서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소선은 공장 안에서 베를 척척 짜는 모습이 어찌나 좋아보이던지 자신도 저렇게 베를 척척 짜는 기술자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소선이 이렇게 말대꾸를 하니까 그 높은 사람은 매를 가지고 와서 소선을 때렸다.

"어린것이 뭔 말이 많아."

"내가 언제 일을 안 하겠다고 했어요? 저기 안에 들어가서 일을 더 잘하겠다고 했는데 왜 나를 때리는 거요?"

소선은 매를 맞으면서도 악착같이 자신의 주장을 얘기했다.

"소선아, 그렇게 해 봤자 소용없으니까 매 맞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해라."

소선이 공연히 매를 맞는 것을 보고 시남이는 울면서 호소했다. 한참을 두드려 맞고 나서 기숙사 방으로 왔다. 소선은 기숙사 방으로 와서 생각해 보니 억울했다.

'일본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공출 바치라, 관솔 따다 바치라 하면서 그것도 모자라 남자들은 징용으로 끌어가고 여자들은 데이신따이로 잡아가고, 이제 여기까지 와서도 내가 일을 안 한다는 것도 아니고, 기술 배워서 일하겠다는데 매를 때리다니......'

소선은 방에 누워서 생각했다. 개떡을 쥐어주던 엄마가 보고 싶다. 집에도 가고 싶다. 그러나 집에 갈 수도 없고, 엄마도 볼 수도 없다. 서러움의 눈물이 한정 없이 흐른다.

"이소선, 너 이리 나와 봐!"

"왜 그러세요? 나는 저기 공장 안에서 일을 하려고 해도 안 시켜줘서 속상해서 일을 못하겠으니 집에 갈라요."

"이것 봐라, 여기가 어딘데 니 맘대로 집에 갈 수 있는 덴지 아나!"

"왜 집에 못 가는 거요? 못 가게 하면 도망이라도 가란 말이요?"

"이 건방진 것."

이런 일이 있고 난 뒤, 다른 사람이 소선을 데리러 왔다. 공장 안에서 일을 하면서 베 짜는 일을 배우도록 조치를 한 것이다. 그들이 왜 이런 조치를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소선의 작업장이 바뀌었으니 숙소도 따라서 옮기게 되었다. 이전 숙소에서는 한동네에서 정신대에 함께 잡혀와 일하는 곳도 같았고, 숙소도 같은 곳에 배치되었던 시남이가 있어서 서로 의지하고 살아가고 있었는데 시남이와 떨어지게 되었다.

시남이는 일을 마치고 저녁에 방으로 와 보니까 같이 지내던 소선이 없어진 것을 확인하고 나서 징징 울기 시작했다. 다음날 아침까지 시남이가 징징 울면서 일을 안 나가니까 일본인 간수장이 시남이를 두들겨 팼다. 마침 아침 체조하러 가면서 소선이 이 광경을 목격했다. 소선은 시남이를 때리는 일본인 간수장한테 일본말로 항의했다.

"네 친구냐?"

감독이 물었다.

"우리 동네 옆집에서 같이 온 동무예요"

그 간수장은 소선을 째려보더니 때리는 것을 멈추었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어찌 되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시남이는 소선과 같이 공장 안에서 함께 일을 하게 되었고 잠도 같은 방에서 자게 되었다.

근로정신대들은 온종일 죽어라고 일을 하고 나서 먹을 것이라고는 강냉이를 커다란 물통에 우려서 삶은 강냉이 밥이다. 그까짓 것을 먹고는 힘을 쓸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배가 고파서 견딜 수가 없다. 특히 밤에는 배가 고파서 잠이 안 올 정도다. 배가 고파서 잠이 안 오면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본다. 그럴 때는 마당에서 자라고 있는 토마토가 어찌나 먹고 싶은지 견딜 수가 없다. 그러나 저 토마토를 따다 먹다가 들키는 날이면 맞아 죽을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배가 고파도 함부로 따 먹을 수가 없다.

토마토가 점점 더 먹음직스럽게 익어가는 어느 날 밤, 배가 심하게 고프기도 하고, 집 생각도 간절해서 견딜 수가 없다. 소선은 '저것을 따먹다가 들켜서 매 맞아 죽을 때 죽더라도 따먹고 싶다'고 생각했다. 달빛 아래 탐스러운 토마토가 정신을 잃게 유혹했다.

"야 시남아, 우리 배고파 죽겠으니 저 토마토 좀 따다 먹자."

"저걸 따먹다 잡히면 매 맞아 죽을텐데......"

"그러니까 몰래 따 먹어야지. 내가 따 올 테니까 니가 망 좀 보거라."

소선은 살금살금 기어서 밖으로 나왔다. 간수가 통로에서 지키고 있는데 살며시 엿보니까 졸고 있다. 때는 이때다 싶어 창문을 뛰어 넘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그 탐스러운 토마토를 따서 방으로 가지고 왔다. 소선은 따온 토마토를 어두운 방에 누워서 시남이와 다른 동무들한테 나눠주고 맛있게 먹었다. 토마토를 다 먹고 난 꼬투리를 버릴 데가 마땅치 않아 그것을 모아 치마에 몰래 싸서 가지고 잤다. 아침에 체조하러 나가면서 슬쩍 버렸다.

이런 수법으로 일하고 나서 저녁마다 토마토를 따 먹었다. 처음 며칠간은 일본인들이 눈치를 못 챘는데 점점 눈에 띄게 토마토가 없어지는 것을 보고 누가 몰래 따간다고 판단한 것 같다. 하루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창문을 뛰어 넘어 토마토를 막 따려고 하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간수가 나타나서 소선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아이고! 이제 나는 죽었구나.'

간수는 소선을 끌고 가서 꼬챙이로 온몸을 여기저기 쑤시면서 높은 사람한테 말해서 혼을 내겠다고 한다. 그리고 곧바로 높은 사람 앞으로 끌려 갔다.

"이 도둑년, 왜 토마토를 따 먹었어!"

"배가 하도 고파서 도저히 못 살겠어서 따 먹었소. 안 죽으려고 토마토를 따 먹었소. 콩깻묵이나 강냉이 우려낸 것 먹고는 도저히 살 수가 없소."

소선은 무서운 것도 잊은 채 말대꾸를 했다.

"이 맹랑한 것 봐라, 너 몇 번이나 따 먹었어?"
"여러 날 따 먹어서 몇 번 따 먹었는지 알 수가 없소."
"너 토마토를 몰래 따 먹으면 도둑질인지 모르나?"

"내가 토마토를 따 먹은 것이 도둑이라면 할 말이 없지만, 우리들은 농사지은 것 다 공출에 바쳐야 하고 그뿐 아니라 여기까지 와서 뼈 빠지게 일을 하고서도 콩깻묵이나 강냉이밥밖에 못 먹으니 배가 고파서 일도 못하고 죽을 것 같아서 안 죽으려고 토마토를 따 먹었소."

소선은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꼬박꼬막 말대꾸를 했다. 간수는 이런 소선이 더 미워서 사정없이 두들겨 팼다. 그리고 창고에다 소선을 가두어 버렸다. 소선은 창고 안에 갇혀서 며칠을 보냈다. 그러던 중 감독자 중에서 조선 사람이 있었는지 그 사람이 와서 문을 열어 주면서 이른다. 말대답을 하지 말고 잘못했다고 빌어야 한다고 타일렀다. 소선은 어찌 됐든 매는 맞았어도 그 배고픔을 토마토로 달랠 수 있었던 것이 그나마 다행스러웠다.


태그:#이소선, #전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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