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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길 어머니의 길 판화
▲ 어머니의 길 어머니의 길 판화
ⓒ 홍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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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선은 1929년(호적에는 1930년으로 되어 있음) 11월 19일(양력 12월 30일)에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곳은 지금은 대구광역시로 편입된 달성군 성서면 감천리. 농촌마을로서 광주(廣州) 이씨들이 사는 집성촌, 동족촌락이었다. 조선왕조 중기에 이윤경, 이준경, 이덕형 등의 명재상을 배출하였던 집안이다. 성서면의 이씨들은 그 이후로 이렇다 할 벼슬을 한 이들을 배출하지 못하였고, 다만 깨끗한 선비의 기질만 그대로 지켜가고 있을 뿐이었다. 이소선이 태어나던 당시에는 만주침략을 앞두고 왜놈들의 수탈이 극심해져 말 그대로목구멍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지경이었다.

이소선의 아버지는 당시 30대의 청년으로 농민운동을 일으키면서 동시에 경북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항일독립운동 조직에 가담하고 있던 이성조씨다.

첫딸과 아들에 이어 둘째로 이소선이 태어났다. 집안 어른과 그의 아버지는 갓난아기가 선녀처럼 예쁘고 해맑았던지 이렇게 자랑하시곤 했다.

"저 가시내 참말로 선녀 같으대이, 이름을 뭐라 지을꼬? 작은 선녀 같으니께 작은(小) 선녀(仙)라고 부를까?"

이리하여 아버지의 말씀에 따라 이소선(李小仙)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소선의 나이 세 살적인가 네 살 적인가 그의 아버지가 왜놈들에게 붙잡혀갔다. 소작쟁의 농민운동에, 지하 항일 독립운동 조직에 가담해 있다는 것을 왜놈들이 탐지해냈던지 사지를 결박당한 채 산으로 끌려가 처형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왜놈들한테 죽으면서 "네놈들이 내 하고 싶은 말조차 못하게 막는구나, 하지만 이놈들아, 내 죽어서 바위라도 말을 하게 하리라!" 라고 했다고 이소선은 전해 들었다.

3남매를 거느린 작은 선녀의 어머니는 남편도 없이 살아갈 일이 막막하기만 했을 것이다. 시가 댁 친지들은 모두 자기 코가 석 자인지라 마음은 있어도 도와줄 형편이 도무지 되지 않았다. 소선의 큰언니는 이미 열네 살 나이여서 공짜 밥은 먹지 않을 만했던지 어머니는 큰딸을 눈물을 머금고 친정으로 보내버렸다. 그것이 생이별이었다.

아홉 살의 오빠와 다섯 살인 소선을 데리고 어머니는 개가하기로 어려운 결정을 했다. 입에 풀칠하자면 다른 방도가 없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그 사실을 차마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어서 소선에게는 '일본에 사는 외삼촌 찾아 바다 건너간다.' 고 속삭였다. 어머니와 어린 남매는 성서면에서 신당고개를 넘어 다시면 서재동으로 들어섰다. 금호강을 나룻배로 건너 박곡동, 박실마을로 갔다. 다시 장고개를 넘어 동래 정씨들의 동족촌락으로 찾아들었다. 다 왔다고 어머니가 말했다.

금호강 박곡리 박실마을 앞으로 흐르는 강을 내려다 보는 전태삼씨.
▲ 금호강 박곡리 박실마을 앞으로 흐르는 강을 내려다 보는 전태삼씨.
ⓒ 민종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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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무이야, 여그는 일본 아니다."

소선은 어머니의 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투정을 부렸다. 오빠는 아무 말도 않고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후살이 어머니 따라온 어린 이들 남매는 그 동네 사람들로부터 인간대접을 받지 못했다. 구박덩이, 데림추 신세가 되었다.

"어무이야, 와 우리가 이래 살아야 하노? 우리 나가 살자."

소선은 나이가 들수록 기가 막혔다. 그는 무작정 어머니의 소매를 붙들며 졸라댔다.

어머니가 후살이하게 된 박실마을 정씨네 집안 형편은 논 두 마지기에 소작을 얻어서 하는 논 두 마지기 그리고 약간의 밭뙈기가 있어 목화, 고추, 팥, 상추, 부추(정구지) 따위를 심어 먹는 정도였다. 거기에다 전실, 후실 자식들이 올망졸망 매달렸으니 입에 풀칠하기 마저 어려운 형편이었다.

원래 박실은 70여 호나 되는 제법 큰 동네인 데다가 동래 정씨들의 집성촌이어서 지주와 소작, 양반과 상놈의 갈등과 차별은 그다지 심한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식민지 시대가 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더욱이 소선의 가족은 다른 고장에서 껴묻어 온 천덕꾸러기가 아니었던가. 소선은 어머니한테 졸랐다.

"어무이, 산에 가면 송기가 있고, 들에 나서면 다래(목화의 덜 익은 열매)가 안 있나? 굶어도 좋으니 이런 구박 받지 말고 나가 살자."

이들은 겨울에 잠도 냉골에서 자야만 했다. 소선은 오빠와 함께 구석방에서 지내야 했다. 어머니가 밤이면 이들 방에 와서 기구한 운명을 탓하면서 울기도 많이 했다. 그러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생활이 주는 압박 속에서 개가할 때 마음먹었던 것은 차차 사라지고 현실에 적응해서 살아야 했다.

소선은 오빠하고 새벽 4시에 일어나서 개똥을 주우러 나가야 했다. 마을 골목에 있는 개똥은 이들 오누이가 다 줍다시피 했다. 이들은 야단을 맞지 않기 위해서라도 부지런히 개똥을 주웠다. 그 개똥으로 거름을 해서인지 이들 집 곡식이 가장 거름기가 많았다. 추운 겨울 오빠는 소선을 깨우지 않고 혼자 개똥을 주우러 나가려고 했다. 소선은 그때마다 눈을 비비고 일어나 오빠 뒤를 따라나섰다. 개똥을 한참 줍다 보면 손이 깨질 듯이 시리다. 오빠는 소선을 위해 짚단으로 불을 피워주었다. 오빠는 소선을 불가에 앉혀놓고 혼자 개똥을 줍기도 했다.

박곡 박실마을 경로당 경로당 왼쪽집에는 이소선의 성이 다른 남동생이 지금도 살고 있다. 그 집 뒷쪽에 학우재가 있다.
▲ 박곡 박실마을 경로당 경로당 왼쪽집에는 이소선의 성이 다른 남동생이 지금도 살고 있다. 그 집 뒷쪽에 학우재가 있다.
ⓒ 민종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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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는 서당에 겨우 다니는 듯 마는 듯했다. 그래서 오빠는 공부를 더 하고 싶어 했다. 남들이 일본에 가면 공부를 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오빠는 일본에 가고 싶다고 했다. 사실 오빠는 징용에 끌려간다는 것을 소선한테 알리지 않기 위해 거짓으로 둘러댄 것이다. 소선은 깊은 생각을 할 수가 없어서 무턱대고 반대했다. 오빠하고 떨어지는 것이 싫었다.

"소선아, 내가 일본에 가서 돈 많이 벌어서 부쳐줄게. 그 돈 가지고 너 공부도 하고 시집도 가거라."

오빠는 기어코 일본으로 떠났다. 소선은 울며불며 오빠를 못 가게 말렸지만 어린 소선이 잠든 사이에 오빠는 가버렸다. 새벽녘에 일어나보니 오빠는 없고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고 계셨다. 소선이 오빠가 공부하러 일본에 간 것이 아니라 징용으로 끌려갔다는 것을 한참 후에서야 알게 되었다.

완고한 구습에 봉건주의가 뿌리 박혀 있던 고장에다 시절 또한 궁핍하기 이를 데 없는 식민지 산천이었다. 어린애 늙은이 가릴 것 없이 모두가 손이 터지도록 일에 매달려야 했다. 이 마을은 와룡산을 에두르고 물 맑은 금호강을 끼고 있어 경치는 아름다웠으나 들판이 넓지 않아 소출이 적을 수밖에 없었다. 열 살도 안 된 나이에 소선은 나무를 하러 다녀야 하고, 밤에는 목화찌꺼기로 불을 밝힌 호롱불 밑에서 미영을 자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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