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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낮 고 노우빈 일병의 묘 앞에서 가족들이 3주기 추모식을 열고 있다.
▲ 고 노우빈 일병 3주기 추모제 24일 낮 고 노우빈 일병의 묘 앞에서 가족들이 3주기 추모식을 열고 있다.
ⓒ 김도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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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빈이가 살 수 있는 기회가 8번은 있었어요. 만약 그때, 그 위치에서 권한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 중 단 한 명이라도 애 상태를 꼼꼼히 들여다봤더라면 이렇게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지는 않았을 겁니다.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더 죽어나가야 군대가 바뀌는 걸까요."

24일 낮 대전광역시 유성구 갑동 국립대전현충원 사병 제3묘역. 지난 2011년 4월 논산 육군훈련소에서 의료사고로 사망한 고(故) 노우빈(당시 21세) 일병(사망 후 추서)의 3주기 추모식이 열렸다. 노 일병의 어머니 공복순씨는 황망히 떠나보낸 아들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미어진다.

어머니 공씨의 말대로 노 일병이 살 수 있는 기회가 적어도 8번은 있었다. 숨지기 이틀 전 이웃한 27연대 훈련병 한 명이 뇌수막염으로 확인됐다. 바이러스나 세균감염에 의해 생기는 뇌수막염은 뇌와 척수를 포함한 중추신경을 감싸고 있는 뇌척수막에 염증이 생겨 38도 이상의 고열과 두통, 머리를 앞으로 굽히지 못할 정도로 고통이 뒤따른다.

병원 측은 전염병 발생 사실을 훈련소 당국에 알리고 항생제 복용 통보를 내렸지만 군은 훈련병과 같은 생활관을 쓰던 27명에게만 항생제를 투약했다. 30연대 훈련병이었던 노 일병은 항생제를 복용하지 못했다. 첫 번째 기회를 놓친 것이다.

야간행군 전 노 일병은 이미 40도의 고열과 기침에 시달리고 있었다. 훈련소측은 노 일병을 야간행군에서 제외시키지 않았다. 행군을 하면서도 여러 차례 아프다고 호소했지만 동행한 군의관과 앰뷸런스의 도움은 받을 수 없었다. 탈진상태에서 동료 훈련병들이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고하며 행군을 마쳤다.

행군에서 복귀한 뒤 상태는 더욱 악화됐다. 육군의 조사보고서는 노 일병이 '행군 후 얼굴이 창백하고, 입술이 파랗고, 군장을 벗지도 못하고 침상에 기대서 호흡이 곤란한 상태였다'고 적고 있다. 이미 상당히 심각한 상태였다는 것을 훈련소 측에서도 파악했다는 증거다.

하지만 의무병은 군의관에게 보고하지 않고 고통을 호소하는 노 일병에게 해열제(타이레놀) 두 알을 건넸다. 위생병은 아픈 병사들을 걸러서 보내라는 지시를 받고 있었지만, 의료자격이 없는 의무병이 자체판단을 한 것이다. 노 일병은 밤새 불침번에게 죽을 것 같다고 호소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병원으로 보내지 않았다.

다음날에도 진료는 받지 못했다. 노 일병의 진료차례가 왔을 때는 이미 군의관은 퇴근한 후였다. 군의관이 정해진 시간에 순회 진료하는 훈련소 의료시스템 때문이다. 그것이 마지막 기회였다.

뒤늦게 노 일병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고 판단한 훈련소 당국이 그를 대전의 건양대 병원으로 이송했지만 이미 쇼크로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노 일병에게 뇌수막염 증세가 나타나고 이틀동안 조교와 의무병, 교관, 소대장, 중대장, 군의관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 제 역할을 제대로 한 사람이 없었던 결과였다.

고 노우빈 일병의 어머니 공복순씨가 아들의 묘 앞에 꽃다발을 놓고 있다.
▲ 어머니의 눈물 고 노우빈 일병의 어머니 공복순씨가 아들의 묘 앞에 꽃다발을 놓고 있다.
ⓒ 김도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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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를 받고 갔을 때는 이미 의식도 없고 눈에서는 핏물이 나오고 있었어요. 인공호흡기를 달아놨지만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목숨이 꺼져 가는 아이 앞에서 울부짖으면서 얼마나 하느님을 찾았는지 몰라요. 제발 살려만 달라고, 애만 살려주시면 무슨 일이든 시키시는 대로 다 하겠다고 무릎으로 병실 바닥을 기면서 기도를 드렸어요."

노 일병은 24일 새벽 숨을 거뒀다. 마침 그날은 부활절이었다. 고통은 고스란히 부모의 몫으로만 남았다.

"우빈이를 떠나보내고 한동안은 너무 괴로워서 매일 술을 마셔야만 겨우 잠이 들 수 었었어요. 세월이 약이라더니 지금은 그래도 견딜 만해요." 아버지 노동준씨는 아들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끝내 목이 메였다.

"그동안 우빈이 비석 색깔을 검은색으로 알고 있었는데, 작년에서야 회색이라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어요. 애가 그렇게 가고 나서 2년 동안이나 세상이 흑백으로만 보였던 거예요. 지금도 선홍색이나 빨간색을 보면 흠칫흠칫 놀라서 바로 보지 못해요." 어머니 공씨의 말이다.

육군훈련소의 부실 대처로 목숨을 잃은 고 노우빈 일병의 묘비 앞에 군인권센터는 "감사하고 미안하다"는 추모패를 세웠다.
▲ 노우빈 훈련병을 기억하며 육군훈련소의 부실 대처로 목숨을 잃은 고 노우빈 일병의 묘비 앞에 군인권센터는 "감사하고 미안하다"는 추모패를 세웠다.
ⓒ 김도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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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부부는 그날 이후 교회를 나가지 않는다. 믿음까지 포기한 것은 아니지만 누군가에게 자꾸 화가 나기 때문이라고 했다. 단원고 수학여행단을 태우고 바다 속으로 가라앉은 세월호 뉴스를 부부는 차마 보지 못한다. 자식 잃은 부모의 고통이 얼마나 끔찍한지 이미 경험했기 때문이다.

"우빈이에게 살 수 있었던 8번의 기회가 있었던 것처럼, 세월호가 가라앉기 전에도 분명히 수 십 번, 아니 수 백 번의 기회가 있었을 거예요. 누군가 제 정신 박힌 사람이 하나라도 제 역할을 똑똑히 했더라면 이렇게 수많은 생명이 어처구니 없이 사라지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이 나라가 더 밉습니다." 

2014년 4월, 대한민국의 봄이 서럽다.


태그:#노우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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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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