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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공학 중학교인 우리 학교는 지금 도교육청에 여자중학교(여중) 전환 신청을 해 놓았다. 지방 중소도시인 우리 지역에는 인근의 비슷한 규모의 도시와 달리 여중이 한 곳도 없다. 학교에서는 여중 전환 신청을 하면서 학부모들의 선택권을 중요한 대외적인 이유로 내걸었다.

또 하나 중요한 요인이 있다. 남학생들에게 열악한 학교 환경이다. 우리 학교는 언덕바지에 자리잡고 있는 지형적 이유 때문에 운동장이 손바닥만하다. 이마저도 같은 재단 소속의 여자고등학교와 함께 사용한다. 한창 뛰어 놀아야 할 남학생들이 놀 만한 공간이 턱없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우리 학교 교장 선생님은 그런 남학생들을 보면서 죄책감을 느낀다고까지 말씀하신다.

우리 학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겨레> 보도('중2 병' 심각한데…운동장 면적이 일본의 3분의 1, 2014년 2월 23일자 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중학생 1명이 쓸 수 있는 운동장 면적이 일본 중학생의 3분의 1 수준(한국 13.1제곱미터 대 일본 38.9제곱미터)에 불과하다고 한다.

한국교육개발원이 지난 2월 23일 공개한 '한·일 중학교의 공간 구성 비교 연구' 결과다. 심리적 혼란기를 겪는 중2 아이들이 신체 활동을 통해 땀을 흘리면서 안정을 찾을 만한 공간이 부족하다.

운동장 문제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더 큰 문제는 학교 건물 자체에 있다. 우리 학교는 대한민국의 여느 학교와 마찬가지로 공간 구조나 배치가 틀에 박힌 모습이다. 성냥곽 같은 직사각형 건물에 25평 교실이 획일적으로 배열돼 있다. 교실들은 복도를 사이에 두고 다닥다닥 붙어 있다. 군대 내무반이나 감옥 수감방과 흡사하다.

쉬는 시간, 학교 복도 모습.
 쉬는 시간, 학교 복도 모습.
ⓒ 정은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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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학교 2학년에는 일명 복도파가 있다. 쉬는 시간에 복도를 휩쓸고 다니며 장난 치고 고함을 지르는 말썽꾸러기 녀석들을 일컫는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말썽꾸러기들만 복도파가 아니다. 대다수 아이들이 수업 끝종만 울리면 복도로 쏟아져 나온다. 북적거리는 쉬는 시간에는 복도를 오가는 게 거의 불가능할 정도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 사이에 다툼이 자주 일어난다. 우리 학교 2학년 복도에서는 크고 작은 시비가 끊이지 않는다. 좁은 공간에 많은 아이가 오가니 다툼과 시비가 없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 지난 금요일에는 우리 반을 포함해 세 개 반 아이들이 엮인 싸움이 잇따라 두 건이나 터졌다. 수업조차 빡빡한 날이었다. 틈틈이 진술서 받고 이야기를 나누는 데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중2 아이들의 '과격함'은 통계로 뒷받침된다. 지난 2월 4일, 주요 언론에는 한신대 산학협력단(연구책임자 강남훈 교수)이 경기도교육청의 의뢰로 작성한 '학교폭력 패턴' 연구보고서 관련 기사들이 실렸다. 이들 기사가 전하는 보고서 내용에 따르면, 경기도에서 2007년 3월부터 2013년 6월 사이에 발생한 학교폭력 1만64건을 분석한 결과 중2가 동급생에게 가해한 경우가 1694건으로 가장 많았다고 한다.

폭풍의 '중2병'이 정말 실체가 있을까. 낙인이론이라는 게 있다. 어떤 사람이 폭력을 행사하는 이유가, 그 사람 자체가 폭력적이거나 악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 폭력적이라고 사람들이 규정하기 때문에 실제로 폭력을 저지른다고 보는 이론이다.

낙인이론은 폭력의 배경에 외부인의 부정적인 시선이 자리잡고 있다고 보는 관점이다. 지금 중2 아이들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태도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우리는 지금 중2의 '과격함'이나 '폭력적인 태도' 사이의 인과 관계를 엉뚱하게 파악하고 있는지 모른다.

낙인이론은 그대로 인정하자. 중2가 이른바 '괴물'이 되는 또 다른 배경이나 원인은 없을까. 나는 무엇보다 현재 우리나라 학교 시스템의 문제를 짚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본다.

너무나도 많은 수의 아이들이 25평의 좁다란 교실에서 빽빽이 앉아 수업을 듣는다. 2012년을 기준으로 우리나라 중학교의 학급당 학생 수는 34.0명이었다. 오이시디 평균보다 10.7명이 많다. 중학교의 학급 과밀 수준은 오이시디 국가들 중 1위였다. 말 그대로 콩나물 시루다.

아이들은 쉬는 시간 10분간만이라도 시원한 바깥 공기를 쐬고 싶다. 비좁은 교실은 답답하고, 그런 곳에서 하는 틀에 박힌 수업과 공부는 스트레스만 안겨 준다. 그런 답답함과 스트레스를 풀기에는 쉬는 시간 10분이 너무 짧다. 어디 따로 가서 차분하게 쉴 만한 공간도 없다. 너도 나도 복도파가 되는 이유다.

비좁고 획일적인 사각의 공간에서 아이들이 '괴물'이 되는 건 정해진 수순이다. 그런 곳에서는 사소한 장난이 큰 싸움으로 커지기 일쑤다. 며칠 전 금요일에 첫 번째로 일어난 형국(가명)과 수민(가명)의 싸움도 그랬다.

둘은 거의 날마다 함께 등교를 할 정도로 친한 사이다. 그런데도 장난을 치다가 서로 욱하는 마음에 주먹질을 벌였다. 형국과 수민은 원조(?) 복도파가 아니다. 둘 다 평범하고 순하디 순한 아이들이다. 그런데 의외로 그런 아이들이 다툼을 더 자주 벌인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학교를 창살 없는 감옥이나 철조망 없는 군대에 빗대는 이들이 많다. 선생님과 출석부와 교복은 간수와 죄수 명단과 수인복이 된다. 군부대의 사령부와 사병 숙사, 연병장, 사열대, 위병소는 교사동, 강당, 운동장, 조회대, 교문에 해당한다.

학교가 감옥이나 군대와 흡사한 까닭이 뭘까. 효율적인 훈육과 통제 때문이다. 복도를 중심으로 교실이 늘어서 있는 구조는 학생들의 강압적인 통제를 용이하게 해 준다. 우리 학교에는 호르라기를 가지고 다니는 선생님들이 많다. 복도에서 엉망으로 노는 아이들에게 호르라기만큼 좋은 통제 도구는 없다. 우리 학교만 그럴까. 호르라기를 부는 교사는 훈련병을 통제하는 군대 조교의 모습과 아주 자연스럽게 겹친다.

훈육과 통제가 일상적으로 이뤄지는 곳에서 아이들은 진정한 '개인'이 될 수 없다. 전체와 집단의 부속품일 뿐이다. 그런 곳에서 진정한 '나'를 찾을 수 있을까. 친구들과 여유롭게 관계를 맺고 소통하기도 어렵다. 물리적인 공간마저 전체와 집단에 봉사하는 구조라면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는다.

고삐 풀린 망아지 같던 청년들이 군대를 다녀와 어른이 된다고들 말한다. 순했던 아들이 군대 제대 후에 패기 있는 남자가 됐다고도 말한다. 삐딱하게 풀이해 보자. 멋대로 날뛰던 청춘의 열정과 패기가 구조적인 힘의 논리에 압도되어 길들여졌다는 게 아닐까. 순진한 젊은이가 폭력적인 힘과 권력의 마성을 받아들였다는 게 아닐까.

군대라는 가공할 시스템의 위력은 상상 이상으로 크다. 학교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많은 부모가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면서 철이 든다고 생각한다. 학교를, 사람 구실을 하면서 살아가기 위해 이것저것을 배우는 곳으로 여긴다. 과연 그럴까.

안타깝게도 대한민국의 많은 학교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군대에서와 비슷하게, 아이들은 학교를 다니면서 훈육과 통제의 시스템에 익숙해진다. 학교에서는 '개인'을 따지는 일이 무의미할 때가 많다. 그런 아이들이 관계를 맺고 소통하는 힘을 제대로 기를 수 있을까. 평범한 아이들이 '괴물'이 되는 모순을 이런 데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태그:#중2, #복도파, #학교 교육 시스템, #낙인이론, #훈육과 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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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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