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추방되나 한국사회10년표류기 이번사건이남긴것 인터뷰 페이스북 공유 트위터 공유 유우성 스토리 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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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홍기(anongi) 기자 l 2014.04.24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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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래도 대한민국에 살고싶습니다"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 피고인 유우성씨. 항소심 선고를앞두고 있는 그는 여전히 한국에서 계속 살고 싶어한다. 유씨는 "너무나도 어려운 일을 겪었지만 한반도를 떠나서 내 꿈을 펼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 이희훈

내일(25일) 오전 10시 유우성씨에 대한 두 번째 법적 판단이 내려진다(서울고등법원 형사7부·재판장 김흥준). 지난해 8월 22일 1심 재판부(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21부·재판장 이범균)는 국가보안법상 간첩 등 혐의에 대해서 무죄를, 그 외 혐의(북한이탈주민지원법, 여권법 위반)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과 추징금 2565만여 원을 선고했다.

유씨의 재판은 항소심 과정에서 국가정보원과 검찰의 위조 증거 제출이 드러나 한국사회에 충격을 줬다. 그런데도 검찰은 어떻게든 유씨를 처벌하겠다는 의지를 발휘했다. 검사는 공소장을 변경해 1심에서 유죄가 나온 북한이탈주민지원법 위반을 형법상 사기죄로 바꾸고 부정수급 금액도 8508만여 원으로 대폭 올렸다.

14시간 넘는 결심 공판이 있던 다음날인 지난 12일 <오마이뉴스>는 유씨를 만났다. 오후 3시 시작된 인터뷰는 밤 늦게까지 이어졌다.

그에게 물었다. 차라리 한국을 떠나고 싶지 않냐고. 돌아온 답변은 의외였다.

"그래도 대한민국에 살고싶습니다."

그래도 이 곳에서 살고 싶다고? 그렇게 당하고도? 그의 말은 이어졌다.

"그래도 대한민국에는 좋은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나같이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자기 일처럼 나서는 사람들, 정의로운 사람들 말입니다. 나를 담당한 변호사님들은 1년 4개월 동안 수임료도 하나도 안 받고, 오히려 밥을 사먹이고, 중국 출장까지 몇 차례 가면서 변호를 해주셨어요. 진실을 알리고자 노력한 기자분들도 고맙습니다. 북한에서 이런 일을 당했다고 생각하면, 그냥 끝입니다."

그는 진지했다. 그는 "여기(남한) 와서 너무나도 어려운 일을 겪었지만, 내가 태어나고 성장한 곳은 한반도"라며 "한반도를 떠나서 내 꿈을 펼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화교지만 정체성은 영락없는 '한반도인'이었다. 그는 "통일의 꿈을 이루고 싶다"는 말도 했다.

2004년 탈북한 유씨의 남한 생활 10년은 '완전한 한국 사람이 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는 남한 사회를 점점 알아가면서 "탈북자는 진짜 대한민국 국민이 되기 힘들고 여전히 2등 국민일 수밖에 없다는 느낌, 내가 이 꼬리표를 평생 못 벗어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만약 몸 속에 북한 출신만 갖고 있는 뼈가 있고 그 뼈를 잘라내서 완전히 한국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잘라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만큼 그는 남한에서 성공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했다.

그는 "과연 이제 다 끝나는 것인지 아니면 앞으로 또 다른 괴로움이 찾아올지, 선고를 기다리는 처지에서 한편으론 홀가분하지만 동시에 막연한 두려움이 있다"고 말했다. 검찰은 현재 진행 중인 재판과는 별개로 유씨의 외국환거래법 위반 혐의에 대해 조사 중이다. 이 건은 이미 지난 2010년 3월 기소유예 처분을 내린 사안이다. 다분히 보복성 수사라고 볼 수 있는 이유다.

이제 얼마 후면 판결이 내려진다. 과연 한국 사회는 그를 어떻게 대접할 것인가. 다음은 유씨와 나눈 일문일답.

"밀입북 기소 안 한 수사관들에게 보답해야 한다 생각했다"

/ ▲ 유우성씨가 그동안 치러온 재판 자료를 살펴보고 있다.
ⓒ 이희훈

- 어제(11일)가 항소심 마지막 공판이었다. 마지막 법정 공방을 끝낸 소감은?
"지난 1년 4개월 동안 어려웠던 순간들, 고통 받은 시간들이 공판 내내 생각났다. 민변 변호사님들이 그렇게 열심히 변호해주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 정의로운 언론사들이 없었다면 내 사건이 알려질 수 있었을까? 도와주신 신부님과 목사님이 없었다면 견딜 수 있었을까? 과연 이제 다 끝나는 것인지, 아니면 앞으로 또 다른 괴로움이 찾아올지. 선고를 기다리는 처지에서 한편으론 홀가분하지만 동시에 막연한 두려움이 있다."

- 또 다른 괴로움?
"최근 주변 사람들의 연락을 받았는데 나와 친하게 지낸 사람들을 검찰이 참고인 조사를 하고 있다. 2010년에 기소유예 처분한 외국환거래법 위반 혐의를 조사하고 있는 것이다. 나랑 가깝게 지냈다는 이유만으로 이 분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

- 간첩 혐의의 근거 중 하나인 2006년 5월 밀입북(23~27일 어머니 장례식을 위해 입북)에 대해서도 이미 2010년 7월에 '혐의 없음' 처분을 받았었다.
"2009년 조사를 받을 때 내가 북한에 갔던 사실을 털어놓으니 '탈북자가 북한에 들어가서 어떻게 무사히 나올 수 있었느냐'가 문제가 됐다. (사실 화교 신분이었지만) 탈북자 자격을 잃을까봐 당시 북한 공민이었다고 주장했던 나는 중국인 통행증을 위조해서 들어갔다고 했고, 또 보위부에 뇌물을 줘서 무사할 수 있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당시는 수사관들이 맛있는 것도 많이 사주고 수업 시간과 학원 시간도 다 배려를 하면서 조사했다. 강압적이지 않은 분위기였다. 끝나면 차비조로 5만 원씩 주곤 했다. 그런데 2010년 3월에 갑자기 가택수색을 당했다. 국정원 직원 10명이 우리 집을 탈탈 털어갔다. 그때를 전후해 도청했다는 것도 나중에 알았다. 이때부터는 내가 다른 시기에도 북한에 또 갔다 오지 않았느냐 하는 내용으로 조사가 진행됐다.

오랜 기간 조사를 받으면서 사실 법적 처벌을 받게 될 거라 생각했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2010년 7월 기소유예라고 연락이 왔다. 더 이상 화교 신분에 대해서도 추궁 받지 않고 끝났다. 그땐 한국에 살고 싶어 하는 내 마음이 수사관들에게 전달돼 나를 봐준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런 고마움에 보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성공적으로 정착해서 도와준 많은 분들에게 은혜를 갚으면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고 이후부터 봉사활동도 많이 했다."

- 새출발의 계기가 된 셈이네.
"그렇다. 이름도 바꾸고 새롭게 살려고 했다. 서울시에 채용돼 일을 하던 2011년 말부터 국정원 직원이 접근해 왔다. 이 사람은 처음에는 '북한에 왕래하면서 자료를 빼올 수 없느냐, 사진 같은 걸 찍어올 수 없느냐'고 했다. 나는 그런 걸 갖고 올 능력이 안 된다고 딱 잘라 거절했다. 그 후 그는 그냥 인간적으로, 동네 아저씨처럼 친하게 지내자고 했고, 가끔씩 같이 밥 먹고 소주 한 잔 하고 헤어지곤 했다. 그땐 주로 사는 이야기를 했고, 그는 내가 탈북자 동아리 회장을 하고 있으니 수상한 탈북자가 있으면 제보를 하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어느 날 내가 그에게 동생을 한국으로 데려오고 싶다고 상담을 했다. 국정원 직원은 동생이 탈북자 판정을 받는 데에 별 문제가 없다며 합동신문센터에 동기들도 있으니 도와준다고 했다. 그래서 동생이 한국에 들어왔을 때 그에게 '하나밖에 없는 동생 잘 부탁한다'고 문자도 보냈던 거다. 그런 동생에게 내가 간첩이라는 진술을 시킬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했다."

"뼈를 잘라내 완전히 한국 사람 될 수 있다면, 잘라내고 싶었다"

/ ▲ 한국에서 보낸 10년의 대부분을 간첩으로 의심받으며 살았지만, 탈북자라는 이유로 '2등 국민' 같은 느낌을 받았지만 여전히 한국에 있고 싶다는 유우성씨. 25일 법원은 그에게 어떤 선고를 내릴까.
ⓒ 이희훈

- 결국 간첩 혐의로 유명해지게 됐다.
"북한을 떠나면서 잡았던 큰 틀의 계획이 있었다. 한국에서 5년 안에 대학을 졸업하고, 10년엔 직장도 잡고 생활의 기반을 닦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잘 하면 그때쯤 가정도 이루고 자식도 낳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20년 정도 되면 나도 사회에 베풀면서 사는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라고 꿈을 꿨다.

처음 한국에 와서 좋았던 건 죽기살기로 하면 최소한 기회는 생긴다는 것이었다. 북한에서는 성분을 가려서 내가 할 일을 국가가 정해주니 기회란 게 없고 꿈도 없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죽기살기로 하면 대학도 갈 수 있고, 성적이 좋으면 좋은 회사도 갈 수 있다. 적어도 출신성분 때문에 할 수 없는 일은 없고 열심히 일을 하면 그 대가를 받을 수 있어서 좋았다. 내가 북한에서 준의사로 일하고 의사가 되는 과정을 밟고 있었지만, 그렇게만 해선 생활이 안됐다. 그런데 한국에선 내 운명을 스스로 만들어갈 수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천국 같았다."

- 아직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가.
"살아가면서 한국의 이면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아무리 자유민주주의 사회고 자본주의 사회이지만 안 되는 건 안 된다는 걸 알겠더라. 만약 몸 속에 북한 출신만 갖고 있는 뼈가 있고 그 뼈를 잘라내서 완전히 한국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잘라내고 싶었다. 탈북자는 진짜 대한민국 국민이 되기 힘들고 여전히 2등 국민일 수밖에 없다는 느낌, 내가 이 꼬리표를 평생 못 벗어나겠구나 하는 생각,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노력해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체감했다.

그렇게 더 알아가면서 자본주의 국가는 역시 권력과 돈이 있어야 한다는 걸 절감했다. 학력도 따지고 집안도 따지고, 서로 비슷한 사람들끼리 어울리려 하고, 그렇게 친 테두리를 넘어서는 건 정말로 큰 장벽을 넘는 일이란 걸 실감하게 됐다. 북한은 계급사회다. 그런데 여기는 계층사회란 걸 느꼈다."

- 의사가 되려고 북한을 나왔지만, 결국 연세대 중문학과를 졸업했다. 의사를 포기하되 좋은 학연을 만들자는 생각이었나.
"주변에서 '대한민국에서 살려면 학벌과 학연이 중요하다, 의대만 고집하지 마라'고 상담해주신 분들이 많았다. 당시는 의학전문대학원 체제로 바꾼다고 할 때였다. 중국어를 할 줄 안다는 점을 살려 명문대 들어가 졸업을 하면 의학전문대학원도 지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결국 그렇게 하길 잘 한 것 같다. 교수님과 선배님들한테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다. 사건 초기에 과 선배님 한 분은 내가 간첩으로 기소된 게 정말 말이 안 된다고 언론사에 열심히 제보했다. 중국에 있는 선배님은 국정원이 발급받았다는 허룽시 공안국에선 정작 출입경기록을 떼주지 않는다고 현지에서 알아봐줬다. 교수님은 구치소에 면회도 많이 오셨고, 지금도 전화를 주신다. 일부 탈북자단체가 연세대에 가서 내 학위를 박탈하라고 시위했지만, 학교에 계신 많은 분이 오히려 응원 메시지를 보내주셨다. 정말 큰 힘이 됐다."

"그래도 대한민국은 좋은 사람들이 더 많은 곳"

/ ▲ 유우성씨는 "그래도 한국에는 좋은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변호를 맡고 있는 민변 변호사들과 언론, 지인 등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며 "북한에서 이런 일을 당했다면 그냥 교수형을 당했을 것"이라고 했다.
ⓒ 이희훈

- 증거조작이 드러난 뒤에도 몇몇 언론에서는 '그래도 유우성이 수상하다'는 식의 보도가 많았다.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보도가 있었다. 한 탈북자가 남한에서 나를 만났는데, 내가 준 맥주를 먹고 정신을 잃었고, 자신의 북한 가족들이 보위부에 잡혀갔다는 내용이었다. 이 탈북자 이름을 가명으로 처리하긴 했지만, 기사 중간에는 실명도 노출된 좀 이상한 기사였다. 그는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물어보니, 자기는 오래 전에 이 기자와 전화통화는 했지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면서 소설을 썼다고 욕을 해댔다. 그가 기자에게 전화해서 기사를 내리라고 이야기 하겠다고 했고, 얼마 안 돼 홈페이지에서 그 기사는 삭제됐다. 그런데 그 기사는 여전히 여러 홈페이지에 복사돼 유포되고 있다.

내가 이름도 4번이나 바꾸고, 주민등록번호도 바꾸고, 환치기로 돈을 몇 억이나 번 이상한 사람이라고 보도한 기사도 정말 많았다. 그런데 나한테 사전에 그게 맞느냐, 왜 그랬느냐고 물어본 곳은 없었다. 내가 그런 보도를 낸 기자에게 이메일을 보내고 제발 전화를 좀 달라고 해도 연락이 없었다. 내 설명을 들으면 수긍이 갈텐데, 들으려는 시도 자체를 하지 않은 것이다."

- 이렇게까지 당했으니, 차라리 한국을 떠나고 싶을 것 같다.
"그래도 대한민국에 살고싶다. 한국에 올 때 여기에 뼈를 묻겠다고 결심하고 왔다. 여기 와서 너무나도 어려운 일을 겪었지만, 내가 태어나고 성장한 곳은 한반도다. 한반도를 떠나서 내 꿈을 펼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부모가 나를 때리고 구박한다고 해서 내가 그 집안 자식이 아닐 수 있는가. 내가 한반도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사람이란 건 내가 다른 나라 가서 산다고 해도 결코 지울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많은 고통을 받았지만 통일에 대한 꿈은 버릴 수 없다. 한국에서 살면서 내 자신의 소박한 꿈과 통일의 꿈을 이루고 싶다."

- 10년 동안 그렇게 많은 일을 겪고도 계속 이 곳에서 살고 싶다는 말인가.
"그래도 대한민국에는 좋은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다. 나같이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자기 일처럼 나서는 사람들, 정의로운 사람들 말이다. 나를 담당한 변호사님들은 1년 4개월 동안 수임료도 하나도 안 받고, 오히려 밥을 사먹이고, 중국 출장까지 몇 차례 가면서 변호를 해주셨다. 심지어 국정원이 명예훼손으로 변호사 세 분을 각 2억 원씩 소송까지 걸었다. 진실을 알리고자 노력한 기자분들도 고맙다. <뉴스타파>의 최승호 PD는 1억 5000만 원 소송을 당했다. 1심 재판부도 공정한 재판을 통해 간첩혐의를 무죄로 판결해주셨다.

대한민국은 정의로운 사람들이 많아서 좋은 곳이다. 북한에서 이런 일을 당했다고 생각하면 그냥 끝이다. 교수형 당하거나 그랬을 거다. 보위부가 나보고 간첩이라고 하면 그냥 간첩이다. 내가 아무리 아니라고 해봐야 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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